72화
3.
“푸후!”
거대한 오크가 숨을 토해냈다. 숨에는 피가 섞여 있었다. 붉은 핏물이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쿵!
그 순간 오크가 제 주먹으로 제 가슴팍을, 왼쪽 가슴팍을 거세게 후려쳤다. 두터운 갑옷 위에 자국이 큼지막하게 생길 정도로 강렬한 일격이었다. 그 일격에 오크는 재차 피를 토했다.
쿠웩!
그 한 번의 토혈을 끝으로 오크는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았다. 오크의 숨소리도 본래의 소리를 되찾았다.
그 무렵이었다.
“낄낄낄!”
기괴하기 짝이 없는 웃음, 일부러 뱉으라고 해도 뱉을 수 없을 것 같은 웃음,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것만 같은 웃음소리가 오크의 그림자 뒤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크는 입을 열었다.
“검은 인간, 나와라.”
“입이 험하구나, 험해. 그리 당했으면 이제 굽힐 만도 하거늘, 아직도 뻣뻣하구나.”
오크의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솟아오른 그림자는 이윽고 사람 형태를 띄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형태였다. 사람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검은 흙으로 만든 듯한 인형(人形), 그런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그 검은 인형은 말을 뱉었고, 사람처럼 행동했다.
“나는 오크들의 왕이다. 나는 인간에게 굽히지 않는다.”
“낄낄낄, 그러든지 말든지.”
검은 인형은 이윽고 오크의 그림자로부터 떨어져 나온 후에 이리저리 오크를 살펴보았다. 검은 인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검은 인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르트 자작가에 묘한 게 있었군. 아마도 탈라트 부족을 방문한 그놈이겠지?”
검은 인형의 입에서 나온 말은 놀라운 말이었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핵심, 문수르를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묘한 놈이야. 아니지. 할루이 이제르트, 놈의 가문 아닌가? 할루이, 놈이 무언가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이야 얼마든지 있지. 왜 그 수작이 이제 와서 꽃을 피우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검은 인형은 그렇게 혼자서 중얼중얼,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 옆에서 오크는 붉은 눈동자를 불태우고 있었다.
이윽고 검은 인형의 혼잣말이 끝났을 때.
“네놈은 다시 날뛰어라. 어차피 그리 하라고 네놈에게 그런 힘을 주었으니 말이야.”
검은 인형은 허무한 말 한 마디만을 남긴 채 스르르, 다시금 본래의 그림자로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붉은 눈동자의 오크, 또투가 가진 검으로 사라진 검은 인형의 흔적 위를 내리찍었다.
쩌억!
일격으로 땅이 갈라질 정도로 엄청난 공격이었다. 또투는 그 후에도 속이 풀리지 않았는지.
쾅쾅!
“크아! 인간! 죽어라!”
계속해서 땅을 내리찍었다. 땅이 운석에 맞은 듯 박살이 났다. 또투는 그렇게 한참이나 분풀이를 한 후에야 자취를 감추었다.
문수르와 포비어의 만남.
감동을 나눌 시간 따위는 없었다. 서로를 향한 인사말도 없었다. 문수르는 명령했다.
“포비어 경, 우두머리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 오크 무리들은 일반적인 오크무리들과 다릅니다.”
“이미 느꼈습니다.”
“우두머리와 졸개들 사이를 연결하는…… 마치 부대장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처치해야 저 쉬운 격파가 가능합니다.”
“그보다 성에는 연락을 취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이미 방어적인 형태를 띠었습니다. 당장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말과 함께 문수르가 고개를 들어 포비어를 바라봤다. 기가스에 탑승한 포비어를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기가스의 활동 시간도 정해져 있으니, 빠르게 움직입시다. 마나 동력이 60퍼센트 대에 돌입하면 성으로 돌아가세요.”
한편 포비어는 경악했다.
‘문수르 경, 대체 어떤 수법으로 성 전체의 상황을 보지도 않고 파악할 수 있는 거지?’
포비어는 몰랐다. 문수르가 가진 GPS시스템의 정체를 말이다.
어쨌거나 문수르와 포비어가 몇 가지 합의를 나눈 후에, 그들은 곧장 전장에 뛰어들었다.
포비어의 기가스가 전장을 헤집었고, 문수르 역시 그에 뒤질세라 전장을 뒤집었다. 그런 문수르의 등장에 성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병사들과 기사들의 눈이 커졌다.
“누구지?”
“설마, 문수르 경인가?”
문수르의 등장. 그 소식은 곧장 이제르트 자작에게 알려졌다. 그 소식을 들은 이제르트 자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뻐하거나, 춤을 추거나 하진 않았다.
이제르트 자작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문수르 경이 왔다.’
상황이 달라졌다. 가장 중요한, 가장 도움이 되는 자가 전장에 투입된 것이다.
‘왜 곧장 성으로 돌아오지 않은 이유는?’
여기서 이제르트 자작은 문수르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했다. 만약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면, 전장은 포비어에게 맡긴 채 이제르트 자작에게 찾아왔을 것이다.
‘이대로가 좋다는 의미다.’
딱히 지적할 게 없다는 의미겠지.
그렇다면 지금의 포지션을 취하는 게 낫다. 방어를 더 두텁게 하는 것이다.
‘그래, 어차피 이 전투는 장기전이 될 수 없다.’
전술, 전략으로 무장한 오크라고 해도, 그런 오크들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게 있다.
바로 보급이다.
인간들의 전쟁에서 보급이 가지는 비중은 상상을 초월한다. 실제 전투보다 보급이 더 중요한 경우도 다반사다. 제 아무리 오크들이 전술을 쓴다고 해도, 보급 없이 버틸 수 있는 건 고작해서 며칠 정도뿐이다. 아니, 며칠 정도가 아니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준비한 식량 대부분을 소진했을 터.
전투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오래 막을 필요도 없다. 길어야 3일! 3일만 버티면 전쟁은 종료된다.
물론 문제는 지금 당장 막는 게 쉽지만은 않다는 의미다. 아직도 살아남은 오크의 숫자가 엄청나다. 거기에 성벽은 한 곳이 무너졌고, 몇 곳은 균열을 보이고 있다.
‘어떻게든 막는다.’
결국 이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정석뿐이다. 정석대로 버티는 게 최선이다.
이제르트 자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더 이상 자리에만 앉아 상황을 지휘할 수는 없다. 이제르트 자작은 직접 전장에 나서서 전황을 지휘할 생각이었다.
문수르의 창이 오크들을 나무처럼 베었다.
‘역시나.’
보통 우두머리를 잃은 오크들은 본능에 충실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오크들은 죽어나가면서도, 공포에 쩔기보다는 오히려 투박하지만 호흡을 맞추며 문수르를 포위하고 있었다.
우두머리인 또투가 사라졌음에도 어느 정도 명령체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오크를 이 정도까지 훈련시켰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대체 어떻게?’
또투라는 놈이 가진 능력이 새삼스럽다. 단순한 카리스마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군대를 모으고 지휘하는데 카리스마는 중요하지만, 그 군대를 쓸모 있게 만드는 데에는 또 다른 능력이 필요한 법이다. 또투에게는 그런 능력도 있었던 모양이다.
‘대체 어디서 나온 오크 놈이야?’
또투 놈을 잡았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놈은 여기서 이렇게 사라질 놈이 아니다.
언젠가 기필코 다시 이제르트 자작령을 노릴 것이다. 다시 군대를 이끌고 오겠지.
‘놈의 배후도 찾아야 해.’
더 큰 문제는 또투가 혼자 힘으로 그런 모든 것을 이룩했을 가능성은 적다는 것!
‘이번 전쟁은 한 번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오크들을 막는다고 치자. 끝이 아니다. 모르는 일이다. 그 후에 다른 어떠한 공격이 있을지 모른다. 결국 처음 기획했던 일 중 하나, 불스 백작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것이다.
‘골치 아프군.’
이래저래 할 일이 많다.
한편 문수르가 이것저것 생각을 하며 싸우는 것과 다르게 포비어는 이제까지 가졌던 모든 고민을 내려놓았다.
‘문수르 경이 왔다. 그럼 나는 이 싸움에만, 전투에만 집중하면 된다.’
문수르가 오기 전에는 솔직히 이런 저런 잡다한 고민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딴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 전투에만 집중하면 된다.
이 차이는 의외로 컸다.
오러 나이트의 능력은 정신 상태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지금 모든 잡념을 버리고, 전투에 집중하게 된 포비어의 움직임은, 기가스의 움직임은 엄청났다.
콰앙, 콰앙!
기가스의 거대한 몸체가 움직일 때마다 오크들이 낙엽처럼 쓸려나갔다. 기가스의 거대한 검은 더 위력적이었다. 풍압만으로 오크들이 날아가 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기가스의 공격은 무식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절제된 공격이었고, 무엇보다 무차별적인 공격이 아니라, 정확한 표적을 노리는 공격이었다.
“쿠웩!”
“부장, 죽었다. 명령 없다.”
예상대로 오크들 무리에는 다시 오크들을 관리하는 부대장 격의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을 처치하다, 오크들이 더 흔들렸다. 물론 그들의 투지는 여전했다. 그건 쉽게 꺾이지 않았다. 오크들은 준비했던 밧줄을 던져 기가스의 움직임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고, 기가스를 향해 몸을 던지며, 기가스의 움직임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무리를 이끄는 자가 사라지자, 그들의 움직임이 비효율적으로 변하는 건 당연했다.
그게 중요했다.
오크들은 멍청하다. 본래 전술, 전략과는 거리가 멀고, 명령과는 인연이 없는 족속들이다. 그래서 이제까지 인간들에게 귀찮은 가축 취급을 받은 것이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전술과 전략이 없이 본능에만 의존하는 오크들은 이제 강력한 적이 아니라, 귀찮은 짐승이 될 뿐이다. 그런 귀찮은 짐승이 강력한 병기, 기가스의 적이 될 리 만무했다.
포비어의 기가스가 더 활개 치기 시작했다. 그쯤 되자 전장 한 구석은 아수라장이 됐다.
그리고 부장이 사라지자, 몇몇 오크들이 상황을 눈치 채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점차 전장에서의 오크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희소식만 있는 건 아니었다.
쿠구구!
“성벽이 무너졌다!”
“병력을 집중시켜라!”
다시 한 곳의 성벽이 무너지며, 그쪽으로 오크들이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르트 자작은 어떻게든 오크들이 무너진 성벽을 넘어오는 걸 막으려고 했지만, 그 와중에 생기는 피해는 어쩔 수 없었다.
가뜩이나 병력이 적어서 귀한 이제르트 자작가에 그러한 피해는 더욱 무거운 것이었다.
병력이 줄어든다는 소식을 들은 이제르트 자작의 얼굴 표정은 굳어갈 뿐이었다.
“오크들이 물러난다!”
“막았다!”
기어코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을 때, 이제르트 자작은 이 엄청난 승리에 대한 기쁨의 표정 따윈 짓지 않았다.
오히려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아직 살아남은 오크의 숫자가 더 많다. 그저 운이 좋아서 막았을 뿐이다. 다음에는 포비어 경의 기가스 출격도 쉽지 않다. 다시 마나 동력을 충전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성벽을 보수하는 것도 쉽지 않다. 승리에 기뻐하지 마라. 죽은 이들을 위로해라.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무리 오크들이 보급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해도, 맨주머니로 전장에 나오진 않았을 터. 놈들은 다시금 올 것이다. 최소한 두 번, 세 번의 공격이 더 있을 것이다. 경비를 강화하라. 예전처럼 땅굴을 팔지도 모르니.”
이제르트 자작은 혹여 기쁨에 긴장의 끈을 놓칠지도 모를 기사들을 위해 충고를 뱉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기사들은 그런 이제르트 자작의 말에 단 한 마디의 반문도 뱉지 않았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반듯하고, 완벽한 말이었기에, 감동마저 느낄 뿐이었다. 실제로도 이제르트 자작은 경거망동하지 마라 했지만, 이번 승리는 충분히 감동을 느낄 만큼 대단했다.
1만의 오크 군단이었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나름 전술과 전략으로 무장한 오크다.
그런 그들을 막아낸 것이다.
전장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희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 희열감을, 승리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전장에서 버틸 수조차 없었을 터.
기사들이 간신히 솟아오르는 승리감을 억누를 무렵, 포비어가 기가스를 이끌고 문수르와 함께 성으로 귀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