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크맨-69화 (69/293)

69화

5.

쿠웅, 쿠웅!

이제르트 자작령의 성벽이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들썩거리는 성벽은 언제 어느 순간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일 정도였다.

성벽을 두드리는 건 오크들이었다. 또투 부족의 오크들, 보통 오크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고, 덩치도 더 큰 놈들! 그런 놈들의 수중에는 다름 아니라, 공성무기가 있었다.

특히 놈들이 준비해온 충차는 엄청났다. 오크들도 나름 생각을 하는 대가리는 가지고 있는지라, 가끔 충차라는 걸 쓰기는 한다. 하지만 그 충차 수준은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대부분 큰 나무를 잘라다 그걸 무식하게 들고 돌진하는 게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이번에 오크들이 가져온 충차는 무려 바퀴가 달려 있었다. 그 엄청난 무게도 무난히 견뎌낼 정도로, 충분하 훌륭하단 소리가 나올 정도의 바퀴였다.

적당한 가속을 받은 채 돌진하는 충차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물론 모든 충차가 효과적으로 이제르트 자작령의 성벽에 닿은 건 절대 아니었다.

“막아!”

“화살! 화살은 더 없나?”

그 위태한 성벽 위에서 비명을 지르듯 소리를 지르는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 그들의 눈빛에서 포기나 절망 따위의 불운한 기운은 별로 없었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은 이 절체절명의 순간 속에서 오히려 분전했다.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는 건 당연했고, 없는 힘도 쥐어짜내 전장에 토해냈다.

성과는 확실했다.

“막았다!”

애초에 해자를 깊게 판 이제르트 자작령의 성벽에 충차가 도달하는 건 쉽지 않다.

결과적으로 충차를 써먹을 수 있는 건 자이언트 트롤의 시체로 만들어진 다리 위에서인데, 그것도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바퀴가 망가지면 충차는 제 역할을 할 수 없으니까.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은 그 사실을 제대로 파악했다.

“궁병들은 충차를 먼저 노려라.”

기사들 역시 빠르게 상황을 지휘하며, 전장을 이끌어갔다.

그때였다.

쿠웅!

짧은 굉음이었다. 마치 번개가 번쩍이는 듯한 찰나! 그러나 그 소리가 들렸을 때 이제르트 자작가의 모든 이들이 직감했다.

‘아뿔싸!’

마치 번개를 본 후에, 천둥소리가 몰려오는 것처럼.

짧은 굉음을 시작으로.

쿠구구구구!

지진이 난 듯, 땅이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충격에 이제르트 자작령을 휩쓸고 지나갔다.

무너진 것이다.

성벽, 이제까지 위태했지만 나름 끈질기게 버텨주었던 그것이 기어코 무너진 것이다.

“성벽이 무너졌다!”

모두가 아는 사실, 그러나 누군가가 입 밖으로 그 사실을 알렸다. 멍청한 행동은 아니었다. 모두가 안다고 해도, 그 즉시 반응하는 자는 많지 않다. 그 누군가가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음으로써, 그 사실을 제대로 직시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용병대, 이동한다.”

기다리고 있던 용병들이 움직였다. 1만의 오크 대군을,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테블스 산의 강력한 오크들을 상대로 하는 전쟁이다. 성벽이 무너지는 것쯤은 얼마든지 염두에 두었다.

용병대가 움직였다. 애초에 최초로 성벽이 무너질 경우 용병대가 투입되기로 합의를 마친 상황이었다.

한편 기사들은 상황을 살폈다.

“성벽은?”

“젠장, 하필이면 해자 쪽으로 무너졌군.”

기사들은 성벽이 무너졌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성벽이 무너진 후의 광경에 이를 갈았다. 성벽이 무너지며 그 잔해들이 다른 곳이 아니라, 해자 쪽으로 넘어간 것이다. 당연히 해자가 성벽의 잔해들로 채워졌다. 오크들에게 더 확실한 길이 생긴 것이다.

용병대가 향할 것이다. 하지만 그쪽을 향해 꾸역꾸역, 마치 먹이를 향해 몰려오는 굶은 돼지무리마냥 돌진하난 또투 부족의 오크들을 막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

더군다나 그쪽에 전력이 집중되면, 다른 쪽이 허술해진다. 그럼 다른 쪽이 무너진다. 성벽이 또 다시 무너진다면, 더 문제가 생긴다. 전력의 분배는 그 정도로 중요하다.

이쯤 되면 모든 기사들이…… 사람을 다루는 지휘관들은 한 가지를 떠올릴 것이다.

‘반전이 필요해.’

이 빌어먹을 상황을 동전 뒤집듯 뒤집을 수 있는 반전! 지금 가장 필요한 겐 바로 그것이다.

그럼 대체 무엇으로 반전을 꾀할 수 있을까?

‘기가스는?’

기가스.

결국 답은 그것밖에 없다. 인류가 마법을 이용해 만들어낸 최강의 전투 병기! 제 아무리 구식 소리를 듣는 기가스라고, 그것이 가지는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기사 수십여 명이 달려드는 것보다 기가스가 움직이며 그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는 게 더 효과적이다.

기가스만 있다면 반전은 충분하다.

그러나 기가스를 움직이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상황에서 기가스가 할 수 있는 건, 성 밖에서 싸우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성 밖에는 1만의 오크 대군이 있다.

기가스라고 무적은 아니다. 1만의 오크 대군을 상대로는 기가스도 승산을 점칠 수 없다.

물론 큰 성과를 거둘 것이다. 수천 마리의 오크들을 시체로 만들어줄 수 있겠지.

그러나 기가스가 파괴된다면? 그 후에는? 이번 오크들의 침략이 전쟁의 끝인가?

아니다.

테블스 산에는 아직도 몬스터가 넘쳐난다. 기가스는 마지막 보루다. 반전의 장치지만, 최후의 반전을 위한 장치다. 지금 기가스가 나서는 건 너무 이른 반전이다.

이미 합의는 있었다.

오크의 수가 어느 정도 줄어들 경우, 그때 기가스를 출격시키기로 말이다. 당연한 합의였다.

“젠장, 정말 말도 안 되게 밀려오는군.”

“1만…… 말만 들었을 땐 몰랐지만 이렇게 보니까 소름이 돋는 건 어쩔 수 없군.”

하지만 상황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 합의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포비어는 출격을 준비 중이었다.

“마나동력의 충전 상태는?”

“89퍼센트입니다.”

마지막으로 기가스의 상태를 점검하는 포비어, 그는 순간 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정비사는 그런 포비어의 웃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포비어는 언제나 차가운 인상에, 표정도 많지 않은 자였으니까.

“포비어 경,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정비사의 물음에 포비어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르트 자작령에 온 이후로 이제까지 줄곧 기가스를 타고, 전장에 나갔지만, 마나동력의 충전 상태가 90퍼센트에 가까웠던 적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서 그러네.”

“아…….”

정비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랬다. 문수르가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우거가 등장하거나, 막기 힘든 몬스터가 등장할 때면 언제나 기가스가 출격했다. 그때는 더 심했다. 해자는 이미 해자 구실을 못 하던 때였고, 성벽의 보수도 거의 눈 가리기 식으로만 한 정도라, 툭하면 성벽이 무너지고 몬스터가 성벽을 넘어와 활개를 치기 일쑤였다.

언제나 기가스가 출력했다. 출격 횟수는 많은데, 마나동력 충전은 제대로 하지 못하니, 언제나 마나동력의 수치는 움직이기 위한 최소 수치인, 60퍼센트에서 오락가락했다.

그건 포비어가 오기 전에도 그랬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가스는 단 한 번도 완전한 상태로 전장에 출격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쩌면 오늘 처음으로 완전한 상태로 전장에 출격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동력이 100퍼센트도 아닌데, 완전한 상태라고 할 수 있겠냐, 그리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마나동력이 100퍼센트 가득 차게 되면 출력 시 예상 이상의 마나가 공급되는 바람에 부품이 손상될 가능성이 높다. 더군다나 포비어의 기가스는 기존 1세대 기가스를 1.2배 급으로 개조했다. 마나동력을 100퍼센트로 채운 상태에서 출격하면, 오버페이스다. 그래서 일부로 충전에 뜸을 들였다. 90퍼센트에 맞도록 말이다.

여기에 최근 부품 대부분을 새것으로 교체했다. 외부 장갑(裝甲)부터가 다르다. 그동안 어설프게 보수해서 쓰던 장갑이 아니라, 새로이 구매한 장갑이었다. 번쩍거리는 것이, 날아오는 빗물로 반사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문수르 경이 남겨준 것이다.’

미소를 짓고 있던 포비어, 그의 표정이 점차 굳었다.

‘문수르 경,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이런 기가스를 내가 타는 일은 결코 없었겠지.’

문수르 덕분이다.

지금 기가스가 이 정도까지 완전 상태가 된 것도, 그나마 이 기가스가 출격하지 않은 채 전장이 유지되는 것도.

모두가 문수르가 없었다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

하지만 지금 그 문수르가 없다.

포비어가 최후의 전력이다.

그렇기에 포비어는 각오했다.

‘이미 바우어 자작님과 이야기는 끝났다.’

또투 부족이 묘한 움직임이 포착될 때부터, 바우어 자작과 포비어는 둘이서 계획을 세웠다.

대단한 계획은 아니었다. 계획의 내용은 너무나 간단했다.

기가스의 완전한 파손을 감수하고 또투 부족의 오크들을 처치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계획이었다.

내용은 단순하다. 문제는 이제까지 기가스의 전력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다른 전력을 소모했던 이제르트 자작가의 전력과는 전혀 상반되는 계획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둘이서만 논의했던 것이다. 다른 기사들의 반발을 무시하기 위해서.

더불어 당시…… 문수르가 등장하기 전에 이 계획 뒤에는 전제조건이 하나 더 있었다.

기가스의 희생을 담보로 구하는 건 이제르트 자작가의 모든 목숨이다. 모든 기사들, 영지민들, 병사들, 용병들…… 그들이 이제르트 자작령을 버린 채 피난을 간다는 것이 바로 전제조건이었다.

말 그대로다.

목숨을 구하는 대신, 이제르트 자작가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몰락이며, 파멸이다. 하지만 이제르트 자작은 각오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모든 이들이 함께 죽는 것보단, 자신의 명예를 버림으로써 그나마 살릴 수 있는 자들이라도 살리고 싶다고.

좋게 말하면 그런 거고, 사실 이 부분을 논의했을 때 이제르트 자작은 자포자기 상태였다. 영지 재정은 결국 바닥을 드러냈고, 어디에서도 긍정적인 점은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이번엔 다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아니, 조금 다른 게 아니라 많이 다르다.

‘문수르 경이 있다.’

그 누구도 아닌 문수르, 이제르트 자작가에는 그가 있다. 놀라운 능력을 가진 문수르의 존재에 계획은 수정되었다.

‘내가 죽어도, 혹여 기가스가 파괴된다고 하더라도 문수르 경이 있다면 뒷수습이 가능하다.’

문수르가 오기 전까지 포비어는 이제르트 자작가의 절대전력이었고, 최후의 전력이기도 했다. 포비어 없이는 이제르트 자작가의 존폐 논의를 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문수르가 있는 이상, 포비어는 필요하다면 소모해도 되는 전력이다.

가차 없다고?

아니다.

가차 없고, 매몰찬 게 아니다. 오히려 좋아해야 하는 일이다. 포비어란 막강한 전력을 소모해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이제르트 자작가의 저력이 다져졌다는 의미니까.

포비어 역시 지금 전장을 향하기 전, 죽음을 각오했음에도 웃을 수 있었다.

‘문수르 경에게 감사한다.’

문수르는 살아있을 것이다. 그가 죽었다는 건 믿을 수 없다. 기필코 다시 영지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까 포비어는 지금 죽어도 된다. 지금 당장 전장에서, 저 오크무리들 대부분과 동사(同死)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목숨을 내놓을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었다.

“출격을 준비하게.”

“예!”

그 각오를 담고, 포비어가 천천히 기가스에 올랐다. 그가 기가스에 탑승했다.

가슴팍에 위치한 조종석에 들어간 후에 팔다리와 연결된 와이어 장갑을 착용했다.

푸우!

기가스의 육중한 몸체의, 사지의 무게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보통 기사라면 버티는 것조차 불가능한 무게감. 포비어는 단전에서 마나를 끌어올려 전신에 퍼뜨렸다. 온몸에서 힘이 넘쳐났다.

그제야 기가스의 팔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우웅!

이윽고 기가스의 투구에서 뿜어지는 두 개의 눈빛. 포비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리던 문수르가 멈췄다. 긴급하기 짝이 없는 상황. 그러나 문수르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문수르에게 뒤쳐졌던 히스티가 문수르를 따라잡았다.

“하악, 하악…….”

차오른 숨을 고르기 시작한 히스티. 그런 그녀의 눈에 문수르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딜 보는 거지?’

문수르는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더불어 문수르는 히스티가 신비하게 봤던 그 멀티 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히스티의 눈빛이 반짝였다.

한편 문수르는 로이드가 주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보며, 이를 갈기 시작했다.

‘지금 이 장면은?’

- 오크 군단의 흔적을 파악하던 중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오크를 포착했습니다.

지금 오크 군단의 우두머리라면 단 한 명 밖에 없다.

‘또투…….’

문수르의 명령에 따라 오크 군단의 행적을 조사하던 로이드가 그 무리의 우두머리를 발견한 것이다.

오크, 또투!

2미터가 넘는 신장에, 체격은 보통 오크의 두 배는 훌쩍 넘기는 괴물 중의 괴물!

놈이 있었다.

‘어떻게 하지?’

때문에 문수르는 고민했다. 지금 문수르는 확신한다. 이 모든 일이 또투, 놈 하나 때문에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강력한 다른 어떤 존재가 개입된 게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또투 놈을 처치한다면?

지금 1만의 오크 대군이 인간들의 병력처럼 규합되고, 움직이는 건 또투의 존재 때문이다.

또투만 죽으면, 오크는 오합지졸이 된다. 오합지졸이 된 오크는 1만이 있다고 해도, 절대 이제르트 자작령을 넘보지 못한다.

‘또투를 잡을까?’

지금 문수르에게는 또투를 잡을 만한 능력이 있다. 오러 마스터, 지금 문수르의 경지다.

하지만 다른 경우도 생각해보자. 최악의 결과도 생각해야 한다. 지금 이제르트 자작가가 무리한 판단을 내릴 가능성도 있다.

‘또투의 위치는 파악됐다.’

또투는 위치를 파악한 이상 GPS시스템을 이용하면 꼬리를 잡는 셈이다. 언제든지 위치 파악이 가능하다. 그때 다시 움직여서, 놈을 죽이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빨리 영지로 돌아가서, 상황을 정리한 후에 나서는 게 낫지 않을까?

‘어떻게 하지?’

길게 고민하던 문수르.

빠득!

이를 갈면서까지 그가 내린 선택은 결국 하나였다.

“영지로 귀환하는 게 먼저다.”

영지를 구한 후에 또투, 놈을 죽인다. 지금으로써는 그게 가장 이득이 되는 판단이었다.

또투를 잡는다고 해도, 통제 받지 못하는 오크 무리들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어떻게든 영지를 정비해야 한다. 또한 문수르가 감으로써, 무사하다는 걸 알림으로써 이제르트 자작이 무리한 결단을 내리는 걸 막아야 한다.

더군다나 이미 조짐이 느껴지고 있다.

‘기가스가 움직인다. 포비어 경이 지금 당장 전장에 나온다는 건…… 포비어 경의 희생으로 영지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겠다는 의미겠지.’

이제르트 자작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하지만 문수르가 있다면 좀 더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 다른 선택을,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다시금 문수르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문수르를 바라보던 히스티가 질색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인간…… 대체 정체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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