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4.
최근 이제르트 자작령의 성벽에는 두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성벽에 대한 보수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성벽 앞에 다시금 제대로 된 해자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특히 이제까지 해자인지 아니면 그냥 적당한 수준의 웅덩이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았던 이제르트 자작령의 해자는 최근 그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동안 전투를 치르면서, 성벽을 보수하는 것도 벅찼던 이제르트 자작가 입장에서 해자를 관리하는 건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대형 몬스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이제르트 자작령이다. 해자를 깊게 파도, 대형 몬스터들…… 오우거 따위가 난리라도 치면, 애써 만든 해자가 그저 그런 물웅덩이가 되고는 했다.
하지만 문수르의 등장 이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이제르트 자작가는 해자를 다시 파냈다.
문제는 물이었다.
“하필 겨울에 오다니!”
“봄이 되면 물을 채워 넣으려고 했거늘……!”
해자는 제법 깊어졌다. 하지만 아직 물을 제대로 채워 넣질 못했다. 겨울인 탓이었다. 물이 원래 있었다면 모를까, 겨울 중에 작업을 끝낸 상황이라 물을 채우기가 쉽지 않았다. 때문에 물이 녹는 봄 중에 물을 채워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시기에, 해자가 아직 제 구실을 하기 전에 오크들이 공격을 온 것이다.
“그래도 해자가 깊으니까 나름 충분히 도움이 되겠지.”
“아무렴, 솔직히 성벽으로 곧장 전진한다는 건 미친 짓이지. 전열이 아주 망가질 테니까!”
물론 물이 채워지면 더 효과가 좋겠지만, 물이 제대로 차지 않았어도, 해자는 깊었다.
해자의 깊이 덕분에 적어도 성벽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은 쉽지 않다. 투석기라도 가져오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러나 설마 오크가 투석기를 쓸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투석기는 보기에는 투박해보여도 꽤나 높은 기술력을 요구하는 병기다. 나무를 이용해 무식할 정도로 묵직한 돌을 날리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정밀하게 만들어진 투석기라고 해도 몇 번 돌을 날리다 보면 망가지기 일쑤다. 투석기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단순히 만드는 것뿐만이 아니라, 수시로 유지, 보수도 필요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유지 보수를 위해선 투석기에 정통한 기술자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이 오크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오크에게 투석기를 만들 만한 기술력이 있었다면, 대륙의 절반은 오크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제르트 자작령의 그 누구도 투석기까지는 걱정하지 않았다.
“궁병들, 활을 들어라!”
해자 때문에 오크들이 시도할 만한 공격은 활을 이용한 공격 정도다.
그러나 이마저도 문제가 있다. 궁병을 육성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훈련은 둘째 치고, 활과 화살 역시 제조에 어느 정도 기술력을 필요로 한다. 이 역시 오크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
해자 때문에 쉬이 성벽에 접근하지 못하는 오크들과 반대로 나름 어느 정도의 궁병 전력을 보유한 이제르트 자작령!
누가 보더라도 이제르트 자작령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제 아무리 오크의 숫자가 1만여 마리라고 해도, 이제르트 자작령이 큰 피해 없이 수성에 성공할 것으로 보였다.
그때였다.
“응?”
“어어?”
병사들 사이에서 눈이 좋은 이들 사이로 무언가 기묘한 낌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얼마 정도 더 시간이 지났을 때.
쿵!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병사들 대부분이 이제는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저, 저거!”
“자이언트 트롤?”
자이언트 트롤!
트롤 중에서도 덩치가 1.5배는 더 큰 놈들이다. 테블스 산에는 이런 자이언트 트롤이 제법 많았다. 십여 마리 숫자로 무리를 꾸리고 활동하는 놈들이긴 했지만, 놈들은 덩치가 일반 트롤보다 큰데 비해 재생능력은 일반 트롤들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어느 정도 훈련된 병사들 입장에서는 일반 트롤보다 훨씬 상대하기 쉬운 놈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이언트 트롤들이 오크들 무리 사이에 섞여 있었다. 덩치가 큰 탓에 눈에 들어올 법도 한데, 처음에는 놈들을 눈치 채지 못했다.
“저 녀석들 설마……?”
“나무로 자기 몸을 위장한 건가?”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자이언트 트롤들 주변에 있는 나무들 때문이었다. 오크들이 나무를 든 채 자이언트 트롤 주변을 포위하듯 서 있었다. 자이언트 트롤의 피부는 숲에서도 구분이 힘든 탓에 거리가 있을 때 자이언트 트롤의 위치를 파악하기란 무리가 있었다.
때문에 반응이 조금 늦었다.
자이언트 트롤의 존재를 파악했을 때, 그때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다.
쿵쿵쿵쿵!
어느 순간부터 느릿하게 전진하던 오크 무리들 사이로 거대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마치 멧돼지마냥 튀어나온 것들의 정체는 다름 아니라 자이언트 트롤들이었다.
우어어어!
놈들이 성벽을 향해 무식하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성벽 위에서 지켜보던 기사들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화, 활을 쏴라!”
궁병들은 반사적으로 잡아당긴 활시위에서 손을 놓았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활시위가 터졌다.
피융!
화살이 덩달아 터져 나왔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 중 일부가 자이언트 트롤의 몸에 박혔다.
푸욱!
화살이 박하지 자이언트 트롤들이 괴상을 내질렀다.
꾸어어!
그 괴성소리는 점차 성벽과 가까워졌다.
“아!”
그 사이 기사들은 아차 싶었다. 자이언트 트롤을 상대할 때 활을 이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무리 재생능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그 재생능력의 비교 대상은 일반적인 트롤이다. 트롤의 재생능력은 어마어마하다. 그럼 놈과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재생 속도가 보통 수준은 넘는다는 소리다.
때문에 보통의 활 공격으로는 자이언트 트롤에게 타격을 주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신체 부위를 자르는 공격이 더 효과적이지.
결국 화살을 낭비한 셈이다.
“큰일이다.”
“병사들 전열을 다듬어라! 모두들 준비해라!”
그러나 화살을 낭비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 기사들은 몇 없었다. 화살도 나름 중요한 군수물자이긴 하지만, 기사들이 아차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큰 충격이 올 것이다!”
“큰 충격이 오더라도 결코 당황하지 마라!”
달려오는 자이언트 트롤, 그런 놈들의 신장은 대부분 5미터가 넘는다. 도약력도 상당하다. 덩치도 크다. 때문에 놈들이 성벽을 향해 돌진하게 되면…….
우어어어!
“모두 충격에 대비하라!”
깊은 해자 정도는 어느 정도 뛰어넘을 수 있다.
쿠우웅!
자이언트 트롤의 몸뚱이가 성벽 위에 떨어졌다. 마치 투석기의 돌덩이마냥, 성벽을 무참하게 박살을 냈다.
물론 성벽은 나름 굳건했다. 대형 몬스터들을 염두에 두고 만든 성벽이었다. 또한 최근 들어 주기적인 유지보수를 통해 예전보다 더 굳건해진 성벽이었다.
들썩들썩!
수십여 마리의 자이언트 트롤들이 몸을 날렸지만, 성벽이 확실하게 붕괴된 곳은 세 곳에 불과했다.
이쯤 되면 선방이라고 할 수 있다.
우어어!
더군다나 전심전력으로 성벽을 향해 몸을 던진 자이언트 트롤들 대부분은 뼈가 박살나다 못해, 살점을 뚫고 튀어나왔으며, 머리를 날린 놈은 두개골이 박살나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이 전투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성벽 세 곳 정도가 무너진 것이 수십여 마리의 자이언트 트롤을 해치운 대가라면 나름 싸게 먹힌 셈이다.
그러나 그 어느 기사들도 그 광경에서 미소를 짓지 못했다. 기사들 중 일부는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젠장!”
“설마, 이걸 노린 건가?”
기사들의 안색이 시커멓게 굳었다. 기사들 중 일부는 욕지거리를 내뱉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깊은 해자 위에 떨어진 자이언트 트롤의 시체들의 모습이 마치 해자를 건너기 위해 만들어진 다리처럼 보인 것이다. 거기에 해자들 중 일부도 무너졌다.
해자를 건너, 성벽에 도달할 수 있는 수십여 개의 다리가 생긴 셈이다.
그리고 오크들이 전진을 시작했다.
쿵!
오크들의 전진은 섬뜩할 정도로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잘 훈련된 병사들의 그것마냥, 전열을 맞춘 채 한 걸음, 한 걸음을 천천히 내딛었다.
쿵!
1만여 마리의 오크들이 한 번에 내딛는 발걸음 소리.
두웅!
그 뒤로 들려오는 북소리에 기사들 중 일부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병사들 중 일부는 저도 모르게 겁을 먹은 듯, 부들부들 다리를 떨었다.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포비어가 이를 갈았다.
“북을 이용해 군대를 지휘한다? 오크들 주제에?”
포비어.
그는 나름 유능한 기사다. 유능한 기사가 무슨 의미인가? 단순히 몸뚱이만 단련한 기사를 의미하는 건가?
아니다.
유능한 기사란 무력 외에도 전술, 전략 등에도 능통한 자를 의미한다. 애초에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바로 기사들이다. 전술, 전략에 눈이 먼 자는 제대로 된 기사 대우를 받지 못한다.
그런 포비어가 지금 또투 부족의 오크 전사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펼쳐지는 광경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리 만무하다.
북을 이용해서 군대의 전열을 지휘하는 것! 듣기엔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합의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신의 이기심보다 협동심을 내세워야만 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인간에게는 몰라도, 오크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크들은 이성보다 본능에 충실한 놈들이니까.
달리 말하면, 또투 부족은 협동심이란 걸 가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포비어는 처음에 어느 정도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이제르트 자작과의 합의를 통해, 필사의 작전을 짜긴 했지만, 그 필사의 작전이 아니더라도 나름 승산은 있다고 봤다.
일단 최근 들어 병사들은 훨씬 강해졌다. 문수르의 훈련법은 확실하게 효과적이었다.
여기에 불스 백작에게서 받은 돈으로 해자 및 성벽의 보수했다. 성벽과 해자의 보수가 가져다주는 전력의 증가 효과는 병력을 곱절 이상 늘리는 것에 버금갔다.
마지막으로 겨울을 배부르게 보낼 수 있는 충분한 식량! 농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식량이 확보된 상황이었다.
이 세 가지를 봤을 때, 1만의 오크 대군을 상대로도 충분히 승리를 점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단순히 1만의 오크 대군이 아니었다.
놈들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합의를 이끌어낸 진짜 군대였다. 마치 인간의 그것마냥 말이다.
오크의 순수한 육체적 능력은 인간보다 훨씬 강하다. 그런 오크가 인간의 전술과 전략으로 무장했을 경우, 인간보다 강할 수밖에 없다. 전쟁이란 게 그리 단순한 방법으로 계산되는 건 아니지만, 보통은 그렇다.
이번 전쟁은 당연히 쉽지 않을 것이다.
“자작님께 말씀드려야겠군.”
그렇다면 보다 빨리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 괜히 어설프게 공성전을 치르다가 피해를 크게 입은 후에 결단을 내릴 바에는 차라리 미리 빠르게 결단을 내리고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게 훨씬 이익일 테니까.
포비어가 다른 기사를 불렀다.
“자작님께 갈 테니, 그동안 전선을 지휘해주십시오.”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포비어는 곧장 이제르트 자작을 만나러 갔다.
문수르는 멀티 글라스를 통해 출력되는 영상을 보며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 단순히 오크만 있던 게 아니었습니다. 오크 무리 사이로 다른 몬스터들이 보입니다.
‘젠장!’
최악이다.
오크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크 놈들은 다른 몬스터들을 데려와 전선에 투입하려는 중이었다.
문수르는 믿을 수 없었다.
‘오크들이 그렇게 강한 놈들이었나?’
오크.
분명히 약한 종족은 아니다. 1대1이라면 인간은 감히 오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테블스 산의 오크들은 그런 보통 오크들보다 훨씬 강하다. 하지만 테블스 산의 몬스터들 중에 강한 건 오크뿐만이 아니다. 트롤이나 오우거 등도 전부 다른 곳의 몬스터들보다 훨씬 강하다.
오크들은 그런 몬스터들의 먹잇감이었다. 넘치는 번식능력으로 얼마든지 머릿수를 늘릴 수 있는 오크들은 오우거와 같은 강력한 몬스터들에게 마치 인간들이 키우는 가축마냥, 필요할 때 배를 채울 수 있는 적당한 식사거리였다.
테블스 산에서 오크들은 약자다.
그런데 지금 그 오크들이 자신들보다 상위에 위치한 몬스터들을 마치 가축마냥 지휘하고 있었다.
단순한 일이 아니다.
‘로이드.’
- 예, 주인님.
‘GPS시스템에 여력이 얼마나 되지?’
- 조사 중인 게 많기 때문에, 여력이 많진 않습니다.
‘지금 당장 오크들이 지나온 방향을 추적해.’
- 추적만 하면 됩니까?
‘추적을 하다 보면, 어느 부분에서 분명히 어떠한 조짐이 포착될 거야. 그걸 실시간으로 내게 알려줘.’
- 알겠습니다.
문수르가 의심하는 것. 그건 다름 아니라, 초월적인 무언가의 개입이었다.
‘여긴 지구가 아니다.’
한석균의 말이 떠올랐다.
케르빈 월드에는 마법이 있으며, 그 마법으로도 설명이 쉽지 않은 초월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그런 초월적인 무언가들 중에는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고.
예를 들면 악마 따위들. 놈들은 강력한 능력을 가진 채 가끔 세상에 등장해 파멸을 불러온다고 한다.
그 빈도는 낮지만, 한석균은 확실하게 경고했다.
만약 단순히 논리적으로 분석이 불가능한 일이 생긴다면, 그런 초월적인 존재를 의심해보라고.
어쩌면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 초월적인 존재의 개입을 통한 것일 수도 있었다.
‘가장 의심 가는 건 흑마법사의 존재다.’
그리고 지금 당장 의심가는 건 바로 흑마법사였다.
세상으로부터 배척 받는 흑마법사들에게 테블스 산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안정적인 도피처니까.
실제로 흑마법사들 중 일부가 테블스 산에서 발견됐거나, 그쪽으로 도망쳤다는 정보는 꽤나 있었다. 과거에도 엄청난 실력을 가진 흑마법사들이 테블스 산의 몬스터들을 이용해 세상에 공포를 몰고 왔던 적이 분명히 있다.
‘만약 정말 흑마법사나 혹은 악마가 나서서 움직인 거라면…….’
그리고 그런 흑마법사들이 제멋대로 실험이나 연구, 마법 따위를 하다가 소환되는 존재가 있다.
그게 바로 악마다.
악마가 등장하면 공포의 시작이다. 몬스터들은 본능적으로 악마 앞에서 충실한 노예가 된다. 애초에 흑마법사들 중 일부가 몬스터들 수족마냥 부릴 수 있는 건 계약한 악마의 권능을 조금이나마 이어 받은 덕분이다.
만약 테블스 산에서 악마가 등장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악마는 무지막지한 군대를 손에 넣는 셈이다.
만약 정말 흑마법사가 아니라 악마가 등장한 것이라면…….
“젠장.”
문수르는 생각했다.
‘내가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이번 전쟁, 쉬우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1만의 오크 전사들이 등장했을 때부터 이미 정도를 벗어난 전쟁이었다. 역사에 분명하게 기록될 역사였다.
‘하필이면 이 순간에…….’
문수르도 각오했다.
그러나 어쩌면 이번 전쟁은 문수르의 각오조차 가소롭게 느껴질 정도로 위험하고, 어려운 전쟁이 될 지도 몰랐다.
그래서일까?
‘끄응…….’
창을 잡은 문수르의 손이 땀으로 젖었다. 식은땀이었다. 문수르도 긴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