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4.
폐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직후 문수르에게 연구실이 생겼다. 비어있는 나무 기둥 속에 마련된 연구실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통의 거대한 나무로 보이는 연구실. 그러나 속으로 들어가면 이것저것 넓은 공간이 제법 많았다.
한편 히스티에게는 엄명이 떨어졌다.
“히스티, 이제부터 문수르, 그 인간의 명령을 따라라. 부족의 이익에 반하는 명령이 아닌 이상 무조건 따라야 한다. 물론 감시역의 역할에도 충실해야 한다. 도와줄 이를 한 명 더 붙여주겠다. 문수르란 인간이 무언가를 요구하면, 그를 통해 말을 전달해주면 된다.”
히스티는 질색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명령을 내린 인물은 그 누구도 아닌 폐욤이었다. 탈라트 부족의 족장! 그의 명령은 그 어떤 것보다 절대적이었다. 만약 그 명령이 싫다면…… 부족을 떠나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여하튼 그 이후로 히스티는 꾹 참았다. 문수르가 어떤 잡일을 시키든, 그를 감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들어줬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났을 때.
문수르는 히스티에게 말했다.
“……폐욤 족장님을 불러주시겠습니까?”
문수르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분위기가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단순히 장난을 치는 게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상황이다!
문수르에 대한 불만이 많은 히스티라고 해도 그런 문수르를 보고 투정을 부릴 순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 역시 문수르 곁에서 볼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노력을 하는지 말이다.
‘정확히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문수르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히스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흙을 퍼와 이상한 물에 섞은 후에, 그대로 놔두더니 갑자기 다시 흙을 퍼와 이번에는 그냥 바닥에 뿌려놓고 하루 종일 그걸 멀뚱히 지켜보고만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흙들 위로 물을 뿌리고는 또 다시 나 몰라라 하고 다른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 식으로 수십 개의 일을 번갈아가면서 했다. 솔직히 히스티는 문수르가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히스티는 이런 문수르가 신목을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신목을 치료하기 위해 탈라트 부족의 뛰어난 엘프 마법사들이 수십여 년 동안 방법을 찾았으나, 허탕이었다. 그런 걸 고작 인간 놈이, 그것도 나이조차 얼마 안 되는 인간이 찾을 수 있을까?
그래도 일단 문수르의 명령은 따라야 하는 게 히스티의 역할.
히스티는 곧바로 대기 중이던 엘프를 시켜, 폐욤에게 말을 전했다. 족장 폐욤은 금방 달려왔다.
“그래, 치료법을 알았는가?”
“치료법을 안 건 아닙니다.”
“음?”
폐욤은 혹시 문수르가 벌써 치료법을 찾은 게 아닌가, 하는 기대감을 품고 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인가? 치료법을 찾은 게 아니라고?
“그럼 대체 왜 날 불렀는가?”
“치료법은 정확히 모르겠으나, 적어도 신목이 지금 죽어가는 이유는 알 듯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폐욤의 눈빛이 다시 달라졌다. 치료법을 모른다고 해도, 신목이 죽어가는 이유만이라도 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소득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소득! 그거라도 알 수 있다면,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토질에 문제가 있습니다.”
“토질? 땅이 정확히 무엇이 문제라는 건가?”
땅이 문제라는 말에 폐욤은 고개를 갸웃했다. 땅이 그냥 나쁘다는 건가?
문수르는 그런 폐욤의 말에 설명을 덧붙여줬다.
“질소, 인산, 칼륨 등 식물이 자라기 위해 필요한 영양소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정확한 건 아니지만 오히려 식물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보입니다.”
질소, 인산, 칼륨?
그 말에 폐욤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도무지 문수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후우, 당연히 이렇게 되는군.’
그리고 문수르도 이런 폐욤의 반응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케르빈 월드에서 토양에 대한 정보나 이해도는 높지 못하다. 물론 좋은 땅이 있고, 나쁜 땅이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기름진 땅과 척박한 땅을 구분하는 건 일개 농노도 할 줄 안다. 하지만 왜 기름진지, 왜 땅이 척박하고 제 아무리 개간을 해도 작물 수확이 안 되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 명확한 지식을 가진 경우는 없다. 하물며 문수르가 내뱉는 말은 그보다 더 고차원적인 이야기다.
하물며 엘프들의 경우에는 오히려 인간 농사꾼들보다 땅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
처음에는 몰랐다. 모든 자연과 어우러지는 엘프들이 땅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니? 다른 이들이 들으면 웃기는 소리라고 치부할 것이다.
그러나 문수르가 겪어본 바에 따르면, 엘프들은 땅이란 걸,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땅에 대한 엘프들의 지식은 전문적이지 못하다. 대부분 추상적이고, 경험에 의한 것들이지.’
익숙하지 않은 것에 적응을 하기 위해서는 조사와 탐구, 연구 따위가 필요하다.
하지만 엘프들은 모든 자연이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땅에 대해서 너무 익숙하고, 친밀하다. 그런 엘프들이 땅에 대해서 연구를 할까? 그저 땅은 땅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렇게 되는 거다.
여기에 엘프들은 보다 많은 작물을 수확하기 위해 무리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수확된 것을 취하고, 부족할 경우 다른 곳에서 보충하려고 한다.
어떻게든 정해진 땅에서 보다 많은 작물을 수확하기 위해 연구하는 인간들과의 전혀 다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엘프들은 인간들의 지식 그리고 인간들의 방법을 배척한다. 인간과의 나쁜 관계 때문이다. 심지어 인간들의 세계에선 화전(火田)이 매우 유용한 방법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그 화전이란 방식이 엘프들에게는 지옥이다.
제 아무리 지식이 깊은 마법사, 폐욤이라고 해도 그런 엘프들의 굴레에선 벗어날 수 없는 법.
물론 사실 지금 중요한 건 그 지식을 이해하느냐, 못 하느냐, 그건 아니다.
문제는 방법이다.
문수르는 신목을 살리기 위한 방법을 발견했다. 하지만 문수르는 확신할 수 있다.
‘그 방법을 말해주면…… 아마 절대 납득하지 못하겠지.’
지금 상황에서 그 방법을 말해주면, 제 아무리 어떤 이유를 붙여도 결코 그 방법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 대체 지금 바나푸스 나무에는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땅의 오염은 정말 심각한데…….’
토질 오염, 말 그대로다.
문수르가 계속되는 조사와 실험을 통해 알게 된 건, 신목 주변의 땅이 심각할 정도로 오염이 된 상태라는 것이다.
‘솔직히 그런 약식 조사로 결과가 그렇게 뚜렷하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지.’
사실 문수르도 이렇게 빨리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문수르의 실험과 연구라는 건 솔직히 조잡한 약식 수준이었으니까.
그런데 결과가 나왔다. 때문에 더 심각했다. 약식 조사 따위로도 결과가 나올 정도면, 그 정도가 매우 심하다는 의미였으니까.
로이드의 판단도 마찬가지였다.
- 뭐든 간에 오염의 정도가 심각합니다. 아마 신목 근처의 땅에선 잡초도 자라나지 못할 겁니다. 실제로 실험 결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실제로 신목 근처의 땅을 가져와 몇 가지 실험을 해봤고, 그 땅에 옮겨 심었던 끈질긴 생명력의 잡초는 사흘 만에 시들어 죽었다. 신목이기에 이제까지 버틴 걸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지.’
일단 문수르는 지르고 보기로 했다.
“그냥 본론만 말하면, 나무든 뭐든 지금 신목 주변의 땅에선 무언가가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 건가?”
“그야 일단 당장 식물의 성장에 필요한 질산, 인산, 칼륨부터가…….”
“질산, 인산 칼륨…… 그게 무엇인가? 새로운 마법인가?”
폐욤은 계속 캐물었다.
사실 폐욤 솔직히 말해서 문수르가 말한 그 질산이니, 인산이니 하는 것이 궁금한 게 아니었다. 당장 급한 견 결국 신목의 미래다.
단지 폐욤은 확실히 하고 싶었다.
‘인간을 믿을 수 없다. 인간이란 살기 위해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비열한 종족이니까.’
문수르가 지금 하는 말이 사실일까?
아닐 가능성이 높다. 폐욤이 보아온 인간들을 떠올리면 오히려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는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폐욤은 확실히 납득을 하고 싶었다. 납득조차 안 되는 상황에서 인간의 말을 덜컥, 따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문수르는 머리를 긁적였다.
‘결국 내가 하는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그걸 알고 싶다는 건데…….’
문수르도 폐욤의 의중을 알고 있다. 그가 무슨 명확한 답, 그 자체를 원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단지 납득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그저 두루뭉술하게 땅이 오염됐습니다, 하는 말에 폐욤이 납득을 할까?
폐욤을 비롯한 탈라트 부족도 수십여 년 동안 신목을 살리기 위해 온갖 일을 해왔을 터!
오염 역시 가장 먼저 의심했을 것이다. 때문에 그냥 오염, 그 단어로는 안 된다.
왜 오염! 어떠한 오염인지 그걸 보다 명확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그걸 위해선 또 다시 설명이 힘든 걸 설명해야 할 터.
문수르는 그냥 질렀다.
“본론만 말하자면, 신목을 다른 땅으로 옮겨 심어야 합니다.”
본론이란 말에 폐욤은 귀를 쫑긋했지만 이내 신목을 옮겨 심어야 한다는 말에 질색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불가하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현재 신목 주변은 마치 누가 악의적으로 오염을 시킨 것마냥, 너무 땅의 오염 정도가 심합니다. 이대로 있다간 신목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겁니다.”
보다 확실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사실 지금 위험한 건 신목 뿐만이 아니었다.
‘토양 오염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하물며 케르빈 월드는 어스 월드랑 다르다. 환경오염을 시킬만한 존재들이 거의 없다. 더군다나 자연과 어우르며 살아가는 엘프들이 환경오염을 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상황에서 생겨난 오염은…… 단순한 오염으로 치부할 순 없다.’
엘프와 토양오염.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적어도 토양오염의 이유에 엘프가 있을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다른 것이 이유가 됐다는 건데…….
‘무언가 의심 가는 건 없지만, 어쩌면 이 오염이 테블스 산에 득실거리는 몬스터들의 존재와 관계됐을 가능성도 없진 않겠지.’
그 이유가 무엇이 됐건, 탈라트 부족이 있는 땅은 적어도 엘프가 살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예전에는 몰랐어도,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때문에 문수르는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탈라트 마을 전체의 땅 곳곳에서 표본을 채취해 조사를 했다. 그 결과 바나푸스 나무로부터 시작된 오염은 점차 탈라트 부족 전체로 번지고 있었다.
조만간 엘프들이 살아가는 나무도 시들기 시작할 것이다. 그뿐인가? 엘프들이 먹는 과일, 풀들, 채소들 역시 그 오염에 노출될 것이고 종국엔 엘프에게 문제가 생길 터.
전멸이다.
이 땅을 떠나지 않는 한, 탈라트 부족의 미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솔직히 탈라트 부족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다. 내 계획에는 엘프가 존재하니까.’
문수르는 탈라트 부족이 필요하다. 드워프 부족과의 연결고리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문수르는 계획을 길게 잡고 있다. 그는 자신이 떠난 후에도 자신의 이념과 가치가 계속 이어지길 원한다. 그걸 위해선 수호자가 필요하다. 문수르의 의지를 받들어줄 수호자. 그 수호자 역할은 엘프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엘프가 필요한 만큼, 굳이 그 엘프라는 게 탈라트 부족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탈라트 부족도 설득하지 못하는데, 다른 부족을 설득할 순 있을까?
‘더군다나 여기서 솔직히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하물며 문수르와 탈라트 부족의 관계는 무슨 대단히 우호적이 관계가 아니다. 답을 내놓지 못하면, 문수르는 죽는다.
문수르가 도망칠 수 있다고?
사실 그것도 나름 문제가 있다. 문수르는 로이드의 도움을 받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도망친 문수르를 탈라트 부족이 그냥 두고 볼까?
‘언젠가 테블스 산을 개간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 만약 그때 가서 탈라트 부족이 이제르트 자작령에 적대적이면 골치 아파지지.’
이제르트 자작령의 적은 콩탄 왕국의 주류 귀족들과 테블스 산의 몬스터들로 충분하다. 더 이상 적을 만드는 건 사양이다.
최고의 해피 엔딩은 탈라트 부족을 설득하고,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런 만큼 해보는 데에까지는 해보는 거다.
최악의 선택은 가장 나중에 하면 된다.
‘좋아.’
그 순간 무언가를 각오한 듯, 굳은 표정을 짓는 문수르.
“히스티.”
문수르가 히스티를 불렀다. 멀뚱히 상황을 지켜보던 히스티가 문수르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힐끔!
문수르를 한 번 쳐다보더니.
힐끔!
다시 폐욤을 쳐다보는 히스티. 폐욤은 눈빛으로 히스티에게 말했다. 문수르를 다시 보라고. 문수르와 대화를 나누라고.
힐끔!
히스티의 눈동자가 비탈길을 구르는 돌멩이마냥 열심히 굴러가며 다시 문수르를 향했다. 문수르는 그런 히스티를 보며 말했다.
“검을 꺼내십시오.”
“무슨 소리죠?”
검을 꺼내란 말에 히스티는 반박부터 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검을 꺼내라니? 무슨 의도지?
“히스티.”
그러나 폐욤의 나지막한 부름에 히스티는 표정을 바꾸며, 당장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았다.
츠릉!
폭이 좁고, 기다란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수르는 그 검 앞으로 다가갔다. 히스티가 검을 살짝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검을 치우지 않았다. 검을 뽑은 상황에선 무조건 검으로 상대가 무릎을 꿇기 전까지 검을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고 배웠으니까. 가누스의 가르침은 그랬다.
이윽고 문수르가 검 위에 턱을 올려놓았다. 당장 히스티가 검을 움직인다면, 문수르의 목이 몸과 분리될 지도 모르는 상황!
“목숨을 담아 말하겠습니다.”
문수르는 그 상황에서 폐욤을 바라보며 말했다.
“땅이 오염됐습니다. 그 때문에 신목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땅을 정화할 방법? 얼마든지 시도해보십시오. 하지만 아마 웬만한 방법으로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겁니다. 아니, 애초에 정화하기 위해 많은 방법을 썼을 테니, 이런 말도 우습겠군요.”
정화라는 말에 폐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다.
신목이 말라가기 시작했을 때 혹시 어떤 부정한 것이 신목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닌가, 해서 온갖 정화마법을 썼다. 해독 마법부터 시작해서 온갖 마법을 말이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7서클의 마법사인 폐욤이 백날 연구하고, 시도를 해도 효과가 없었을 정도다. 문수르 역시 그걸 알고 있기에, 이 오염을 단순한 오염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강력한 정화마법에도 정화되지 않는 오염!
“물론 계속해서 연구를 하다 보면 방법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물론 세상에는 끝이 존재한다. 마법적인 해법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연구하다 보면 결과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엘프가 말하는 시간은 인간의 것보다 길다. 아마 탈라트 부족이 그 바업이란 걸 내놓았을 때 이미 신목은 말라 죽고 탈라트 부족의 땅 전역이 오염된 후일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면 이미 늦는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군. 자네는 지금 그저 자기 할 말만 하고 있네.”
폐욤은 그런 문수르가 내뱉는 말을 비수마냥 찔렀다.
폐욤의 말도 맞다. 지금 문수르가 하는 말의 본질은 그거다. 그냥 신목을 옮겨 심으라는 거다. 이유? 땅이 오염됐다고 한다. 오염된 근거가 질산 따위가 없어서 그런단다. 그럼 질산이 뭐냐? 라고 물었더니, 거기에 대한 설명은 못한다.
이게 개수작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하물며 문수르는 인간이고, 이번 일에는 문수르의 목숨이 걸려 있다. 인간이 살기 위해 어느 정도까지 비열해질 수 있는지, 폐욤은 이제까지 질리도록 봐왔다.
문수르를 신뢰한다?
힘들다.
지금 문수르가 목숨을 걸었다?
사실 다른 각도로 보면 이 역시 개수작으로 보일 수도 있다. 사실 문수르와 히스티의 무력 차이를 봤을 때, 문수르가 마음만 먹으면 이 상황에서 히스티를 역으로 제압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오러 마스터 아닌가?
오러의 신묘한 위력은 놀라울 정도다.
그리고 문수르 역시 이 진심을 보여줬을 때 폐욤이 다짜고짜 자신의 말을 믿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문수르도 알고 있다.
지금까지 자신의 행동에 너무 저돌적이었다는 것을! 너무 무례하고, 무식하고, 일방적이란 것을!
‘그래, 그러니까 기대할 수 있는 거다.’
때문에 여기서 폐욤이 택할 답은 하나다.
“나는 보다 확실하게 집고 넘어가야겠네. 자네가 살고 싶다면, 그리고 나를 설득하고 싶다면, 자네가 말했던 모든 것에 대해서 나를 납득시켜야 하네.”
타협!
문수르는 폐욤의 그 말을 들었을 때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제야 주도권이 내 쪽으로 넘어왔군.’
만약 처음부터 문수르가 타협을 시도했다면, 폐욤은 겉으로는 몰라도 의심을 풀지 않은 채 적당히 문수르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이번에 타협을 시도한 쪽은 폐욤이다. 때문에 그는 어떻게든 문수르의 말을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이건 중요하다.
특히나 엘프를 상대로 할 때는 더더욱 중요하다. 엘프의 가치관과 시간개념은 인간의 것과 아주 궤를 달리하니까. 엘프 쪽에서 강력하게 원하지 않는데, 인간이 그런 엘프를 설득하거나, 납득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때문에 문수르는 이런 상황을 일부러 만든 것이다.
‘좋아.’
더불어 문수르는 이번 기회를 통해 이제르트 자작을 아군으로 만든 것처럼, 폐욤 족장을 아군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