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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맨-63화 (63/293)

63화

10.

문수르가 눈을 떴을 때, 그의 앞에는 엘프 전사 가누스가 있었다. 그것도 그냥 서 있는 게 아니었다. 살벌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아름다운 미녀가 반겨주는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아름다운 사람이 반겨주니, 기분은 묘하군. 뭐, 소름이 돋을 정도긴 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엘프의 살벌한 기세를 느낀 문수르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저 자, 오러 마스터구나.’

처음 가누스에게 제압당했을 때는 몰랐다. 그저 몸뚱이가 너무 맛이 간 탓에, 허무하게 제압당했으니까. 상대에 대한 분석 따위가 가능한 처지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문수르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가누스, 그는 오러 마스터다.

‘그리고 나도…….’

그리고 문수르, 그 역시 오러 마스터다.

‘이게 기연이란 것이군.’

말 그대로였다.

기연…… 아니, 천운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 문수르에게 일어났다.

‘그 일 때문인가?’

기절한 이후 문수르는 환상 속의 공간에서 페르수스와 전투를 했다. 전투라기보다는 가르침에 가까웠지만. 아마 한석균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마법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진 그지만, 무(武)라는 것 역시 그 깊이가 마법에 비해 결코 얕지 않았으니까.

‘너무 운이 좋았다.’

어쨌거나 상황을 정리해보자.

죽을 위기에 빠졌다가 눈을 떠보니 오러 마스터가 됐다?

놀라운 일이다. 이게 꿈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봐야 할 정도다.

그러나 문수르는 지금의 사실을 너무나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지금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사실을 이 정도까지 담담하게 그리고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환상 속에서의 페르수스와의 대련 덕분이었다. 수백…… 아니, 수천 번이었다. 페르수스에게 셀 수 없을 만큼이 살해당했다. 그러나 의미없는 죽음은 아니었다. 죽을 때마다 페르수스가 보여주는 무의 이치를, 그의 창법이 가지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게 됐다.

‘역시 그건 페르수스, 그분이 훗날 자신의 창술을 이어갈 계승자를 위해 마련해둔 방편이었나 보군.’

페르수스, 그는 단순히 실력 좋은 창술가가 아니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 높은 경지를 이룩한 무인이었다. 자신의 진전을 이을 후대를 남기지 못했던 그는 자신의 무(武) 속에 가르침을 남겨주었다. 자신의 창술을 익힌 자가 자신의 사념(思念)을 통해 확실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말이다.

뭉클!

여기서 문수르는 울컥했다.

페르수스에 감사했다.

수천 년 후의 제자에게 이런 배려를 해준 그에게…… 실제로는 현실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말 한 마디 나눠본 적 없는 그지만, 지금 문수르에게는 그 누구보다 훌륭한 스승으로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한다.

자신에게 이런 것을 베풀어주는 세상에, 이런 경험을 하게 해준 케르빈 월드라는 세계에.

때문에 문수르는 빠르게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나는 세상에 보답해주겠다.’

케르빈 월드에서 얻은 모든 것, 공짜로 얻어갈 생각은 없다. 그만큼의 보답을 해줄 것이다.

각오를 다진 문수르의 눈빛이 빛났다. 가누스가 움직인 건, 바로 그 눈빛을 본 직후였다.

“내 이름은 가누스. 나는 탈라트 부족의 전사다.”

가누스는 문수르가 겪는 모든 과정을 보았다. 폐욤의 말에 따라 신목의 열매를 통해 만든 약을 정기적으로 문수르의 입에 넣어준 것 역시 바로 가누스였다.

물론 가누스가 무슨 호의로 문수르의 입에 약을 넣어준 건 아니었다. 여차해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문수르를 곧장 제압하기 위함이었다. 미래란 예측이 불가능한 거니까.

덕분에 문수르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들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의미를, 문수르가 겪은 그것의 의미를 가누스가 모를 리가 없었다.

‘오러 리사이클링이었다.’

오러 리사이클링.

오러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 무인과 오러 나이트의 구분점이라면, 오러 리사이클링은 오러 나이트와 오러 마스터의 구분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러 나이트가 한계까지 오러를 보유하게 되었을 때, 각고의 노력과 재능이 합쳐지면, 육체는 보다 많은 양의 오러를, 보러 효율적인 오러 사용을 위해 육체를 진화시킨다.

이제까지 오러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몸뚱이가, 이제는 오러를 완벽하게 다루기 위한 형태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러 리사이클링이다.

그 현상이 문수르에게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건 가누스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신목의 열매로 가능한 건 몸을 치료하는 것뿐이었다. 운이 좋아야 본래 기량의 9할 정도를 되찾는 것이었지.’

신목의 열매로 할 수 있는 건 문수르가 본래 가진 기량의 9할 정도를 되찾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문수르의 몸 상태는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무리하게 힘을 탐낸 탓에 치르게 된 대가는 무시무시했다.

목숨을 구한다고 해도 평생 병신으로 살아갈 팔자였다. 그 팔자마저도 고마워해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목숨을 구하는 것도 모자라서, 본래의 힘까지 상당부분 되찾을 수 있다니?

만약 바나푸스 열매만 먹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페욤 족장, 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수르는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갔다.

‘기절해 있는 동안 무슨 경험을 한 모양이군.’

어쨌거나 문수르에게 일어난 오러 리사이클링, 그건 가누스 역시 경험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가누스는 문수르를 경계했다.

‘상대는 이제 오러 마스터다.’

오러 마스터에도 물론 급이 있다. 당장 오러 마스터가 된 이와, 오러 마스터가 된 지 수십 년은 넘은 이와 동급일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오러 마스터의 세계에서 그 급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반전될 수 있다. 가누스가 문수르에게 패배하는 경우도 분명히 나올 수 있다. 그것도 꽤나 높은 확률로 말이다.

오러 나이트 때와는 이야기가 다르다.

이것이 가누스가 문수르를 경계하는 절대적인 이유다.

더불어 이제부터 가누스는 문수르를 존중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문수르는 좋든 싫든, 탈라트 부족의 천형을 고쳐줄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만약 문수르가 탈라트 부족의 천형을 고쳐주지 못한다면…… 탈라트 부족은 문수르를 죽일 것이다.

문수르를 이대로 살려두면, 탈라트 부족의 위치를 비롯한 모든 정보가 인간들의 세상으로 퍼지는데, 그가 탈라트 부족의 숙원을 고쳐주지도 못하는데, 그를 살려둘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이 사실을 가장 잘 아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문수르였다.

문수르에게는 로이드가 있었으니까.

- ……해서 이렇게 된 겁니다.

문수르는 계속해서 정보를 수집했다. 문수르가 기절한 와중에도 그를 중심으로 한 모든 이야기를 수집했고, 정리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들은 문수르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내가 필요해서, 나를 살려준 거군. 반대로 내가 필요 없어지면, 날 죽이겠지?’

눈앞의 인물만 해도 엘프지만, 오러 마스터다. 그가 문수르를 죽이려 마음먹으면 충분히 죽일 수 있을 터.

한편으로는 의문이 생겼다.

‘천형이라고 표현했다. 대체 그 천형이 뭐이기에 날 필요로 하는 걸까? 아니, 그보다 날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탈라트 부족이 문수르를 필요로 하는 이유.

그리고 탈라트 부족이 문수르를 알고 있는 이유.

‘적어도 내가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활동한 기간은 이제 막 1년을 넘어가려고 한다.’

상식적으로 1년 전까지는 케르빈 월드란 세계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문수르다. 그런 그들을 탈라트 부족이 잘 알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

혹여 알고 있더라도 인간인 문수르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있을까? 문수르가 신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는 건, 문수르를 직접 보고 관찰했다는 건데? 반대로 문수르는 엘프를 본 적도 없다. 낌새를 느낀 적도 없다. 문수르는 몰라더라도 로이드는 파악했을 것이다.

결국 문수르가 내놓은 답은 하나였다.

‘이제르트 자작령에 탈라트 부족과 소통하는 누군가가 있다. 그가 수시로 이제르트 자작령의 정보를 탈라트 부족에 보내주는 거다.’

간자라면 간자라 할 수 있는 자.

탈라트 부족과 소통하는 누군가가 이제르트 자작령에 있는 거다. 그리고 그가 수시로 이제르트 자작령의 상황을, 특히 문수르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오우거에 쫓기던 그 엘프의 목적이 그 간자와의 소통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이해가 된다.

어째서 엘프가 이제르트 자작의 성 근처까지 왔는지 말이다.

‘이것도 확인은 해봐야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후에야 문수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르트 자작님을 모시는 기사, 문수르라고 합니다.”

문수르가 자신을 소개했고, 가누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이 서로 처음 만난 건 대략 보름 전. 결과적으로 만난 지 보름 만에 통성명을 한 것이다.

“일단 저를 도와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길게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네게 필요한 게 있어서 살려줬을 뿐이다. 네가 만약 우리가 원하는 걸 해내지 못한다면, 네 녀석의 목숨은 보장하지 못한다.”

가누스의 퉁명스러운 말에 문수르는 미소로 대답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얼마든지 해드리겠습니다.”

“아니, 정정해라. 할 수 없는 일이라도 살고 싶으면 해야 한다.”

공격적인 가누스의 말투. 그러나 문수르가 가누스에서 느낀 감정은 적대감보다는 초조함이었다.

‘대체 무엇이 오러 마스터이까지 한 이 자를 초조하게 만드는 거지?’

대체 이들이 말하던 그 천형이란 무엇일까?

문수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잠시 후였다.

============================ 작품 후기 ============================

이번 챕터는 이걸로 끝이네요.

모두들 좋은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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