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8.
몬스터들의 땅이라 불리는 테블스 산.
오우거와 같은 흉악한 몬스터들조차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이 죽음의 땅에 엘프 부족이 뿌리를 내린 건,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 수도 있었다. 오래 전부터 인간들의 눈이 미치지 않고, 발이 닫지 않는 땅이야말로 엘프들에게는 황금 같은 땅이었을 테니까.
탈라트 부족은 그러한 이유로 테블스 산에 뿌리를 내린 엘프 부족 중 하나였다.
그동안 조용히 테블스 산에서 자신들만의 삶을 이끌어오던 탈라트 부족.
그런 탈라트 부족이 최근 소란스러웠다.
“족장님께서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그럼 따르도록 하지요.”
엘프 부족.
그들의 의사결정 방법은 간단하다. 부족을 이끄는 우두머리, 족장의 결정에 모두가 따른다. 독재가 아니라, 부족 단위로 살아온 엘프들의 오랜 전통이다. 만약 족장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그 부족을 떠나면 된다. 족장은 절대 떠나는 엘프를 막지 못한다.
탈라트 부족 역시 그러한 엘프들의 전통을 따랐다탈라트 부족으 족장, 폐욤은 말했다.
“이제르트 자작령, 인간들의 땅에 우리 부족의 천형(天刑)을 고쳐줄 자가 존재한다.”
칠백 년 넘게 살아온 뛰어난 마법사인 탈라트 부족의 족장 폐욤.
이제까지 테블스 산이라는 처절하고 절박한 땅에서 수백 년 간 엘프 부족을 이끌어온 그의 말에 반대하는 자는 없었다.
“족장님!”
그때였다.
“큰일 났습니다.”
엘프 전사 한 명이 시급하게 폐욤을 찾아와 말했다. 하얗게 새어버린 긴 머리칼의 엘프 노인 폐욤이 보석 같은 초록빛 두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인가?”
“그 인간이…… 문수르란 인간이 쓰러졌습니다. 이번에는 그 정도가 심각한 듯보입니다.”
“기어코…….”
폐욤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그런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르르!
폐욤의 흰색 머리칼은 너무 길어, 땅 위에 길게 늘어질 정도였다. 그런 그가 걸음을 내딛자, 머리칼이 땅 위를 지나갔다. 누군가는 생각했을 것이다. 저 머리칼이 마치 빗자루의 그것마냥 땅 위를 훑을 거라고.
그러나 폐욤이 움직일 때마다 머리칼은 마치 계곡 사이를 흐르는 물줄기마냥, 땅 위의 모든 것을 부드럽게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머리칼이 땅 위를 지나간 흔적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신묘하다.
그런 신묘한 자, 폐욤의 걸음이 향한 곳은 바로 문수르, 그가 있는 곳이었다.
문수르는 누워 있었다. 마치 시체처럼 말이다. 피부 역시 시체의 그것마냥 창백했다. 하얗게 질린 피부 위로 둥둥 떠있는 푸른빛 기운.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차가움이다.
그런 문수르의 근처에는 엘프 전사였다.
길쭉한 귀, 거기에 달린 귀걸이는 그가 마법사가 아닌, 전사의 길을 걷는 엘프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만약 마법사였다면 귀걸이 대신 신체 어딘 가에 문신을 했을 테니까.
더불어 전사의 길을 걷는 엘프는 자신의 경지에 따라 귀걸이의 개수에 차별을 뒀다.
처음 전사의 길에 입문하면 귀를 뚫게 한 개의 귀걸이를 단다.
그 다음에 오러를 느끼게 되는 경지, 오러 나이트의 경지에 접어들면 한 개의 고리를 더 단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세 번째 귀걸이를 다는 것이다.
문수르를 감시하던 엘프 전사, 가나스. 이 갈색 머리칼에 콧잔등 위로 길쭉한 검상을 품은 엘프의 귀에는 무려 세 개의 귀걸이가 매달린 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러 마스터!
그 보기 힘들다던 오러 마스터가 문수르의 감시역으로 붙어있던 것이다. 엘프들의 세계에서도 오러 마스터를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의 부족이 있어도, 오러 마스터가 있는 경우보다 없는 경우가 많다. 만약 오러 마스터가 그렇게 널려 있었다면, 제 아무리 부족 단위로 활동하는 엘프들이라고 해도 인간에게 노예 취급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 대단한 오러 마스터가 쓰러진 문수르의 감시역이라니?
언뜻 보면 말도 안 될 정도로 과한 행동으로 보인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 문수르에 대한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진 탈라트 부족이다. 그들은 문수르가 오러 마스터에 근접한 오러 나이트란 사실을 알고 있다.
만약 문제가 생겨, 그를 제압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다면? 최소한 오러 나이트 한 명으로는 제압이 불가능하다. 결국 오러 마스터 정도가 붙어야 제압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이렇게 보면 가나스, 그가 문수르의 감시역으로 붙은 건 나름 납득이 간다.
물론 지금 문수르는 오러 마스터인 가나스는 커녕 활 좀 쏠 줄 아는 엘프도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최악이었지만.
가나스는 폐욤이 등장하자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상황이 어떠한가?”
“생각하신 그대로입니다. 힘을 얻기 위해 사이한 길을 걷는 이에게 당연히 오는 대가이지요.”
가나스는 문수르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문수르가 오러 나이트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나스가 직접 봤을 때 문수르는 오러 나이트의 기준은 벗어났다. 오히려 단전의 발달 정도는 오러 마스터에 가까웠다. 문제는 오러 마스터 역시 아니라는 것.
당연히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말이 안 되는 걸 가능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결국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 사이한 방법을 부려야 한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는 법!
자신의 재량 이상의 무언가를 누린다면, 언젠가는 기필코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무(武)의 세계에서 대가는 평생 동안 이룩한 무위 또는 목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이란 참 미련한 생물입니다.”
그렇기에 가나스는 문수르를 가소롭게, 같잖게 봤다.
사실 수명이 긴 엘프는 정도를 벗어나 사이한 길, 사도를 걷는 걸 아주 이상하게 생각한다.
천천히 가도, 충분히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데 어째서 일부러 자신의 목숨을, 자신의 소중한 걸 포기하면서까지 빨리 경지에 도달하려고 하는 건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세상은 그런 인간들의 선택을 열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열정이 인간으로 하여금 강력한 힘을 가지게 하고 반대로 엘프들로 하여금 인간에 쫓겨 사는 신세가 되게 만들었다.
사실 마법적인 능력이나, 신체적인 능력 그리고 수명 등을 고려했을 때 엘프가 인간을 좌지우지할 순 없어도 인간에게 노예 취급당할 정도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너무 긴 명줄, 때문에 엘프들에게는 도전 정신이 희박했다. 결국 엘프에게는 성장은 있어도 발전은 없었다. 그 차이가 쌓이고, 쌓여 현재의 엘프와 인간들의 관계를 만든 것이다.
“인간이란 미련하지만, 발전하지.”
폐욤은 그런 인간의 무서움을, 그 본질을 너무나도 잘 꿰뚫어 보고 있었다.
눈앞의 것을 위해, 당장 보이는 목적을 위해 제 목숨도 가차없이 버리는 인간들은 기어코 결과를 만들어내니까.
인간들은 도전자다.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 폭주를 멈추지 않는 도전자!
엘프들이 그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엘프들은 언제까지나 인간에게 쫓길 것이다.
“힘을 잃은 거로군.”
“그렇습니다.”
“가누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자가 과연 자기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나?”
그 물음에 가누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힘을 되찾는다고?
“지금 목숨만 구해도 천운이 따라준 처지의 인간입니다. 다시 제 힘을 찾는 건, 욕심이 아니라 망상이지요.”
“정말 방법이 없다고 보는가?”
방법이란 말에 가나스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폐욤은 물어보고 있다. 정말 이 인간을, 문수르의 힘을 되찾아줄 방법이 있는가?
“……굳이 방법을 원하신다면, 신목(神木)의 열매 정도겠지요.”
신목(神木).
부족 단위로 살아가는 엘프들이 신으로 섬기는 나무누다.
정확한 명칭은 바나푸스 나무. 1년에 고작 1센티미터만 자라는 기괴한 나무이며, 심지어 생존력이 극히 나약해 지극한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만 성장이 가능하다. 케르빈 월드에서 오직 자연과 나무를 사랑하며, 긴 수명을 가진 엘프들만이 제대로 키울 수 있는 나무였다.
때문에 아주 오래 전부터 엘프들은 바나푸스 나무를, 엘프들의 신 바라나이의 흔적이라 여겼다.
그런 바나푸스 나무에게는 신묘한 능력이 있다. 1년을 주기로 단 하나의 열매를 맺는다. 호두알 크기의 작은 바나푸스 열매. 이 열매는 세상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 또한 바나푸스 열매는 바나푸스 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 빠르게 썩기 시작해 반나절 만에 흙이 되어 사라진다.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런 일을 하시려는 것은 아니시지요?”
그런 바나푸스 나무의 열매는 신이 깃들어 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바라나이 신이 엘프들을 보살핀다는 증거! 바라나이 신이 엘프들에게 축복을 내려준다는 증거!
이런 이유로 엘프들조차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바나푸스 나무의 열매를 따지 않는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나의 열매가 수백 년 동안 맺혀 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엘프들은 그 사실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긴다.
“설마 신목의 열매를 이따위 인간을 구하기 위해 주시려는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그런데 지금 그 열매를 고작 인간 따위에게 준다?
어림도 없는 소리!
이제까지 바나푸스 열매의 신묘한 능력을 탐낸 인간들은 부지기수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이제까지 호의가 아닌 탐욕을 위해 바나푸스 열매를 먹은 인간은 세상의 역사 속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엘프들의 마지막 자존심이니까.
인간 따위에게 바나푸스 열매를 줄 바에는 그 열매를 쥐어 터뜨려 못 먹게 만드는 것이 엘프들의 마지막 의지였다.
때문에 엘프 부족 하나를 몰살시키는 건 가능해도, 바나푸스 열매를 먹는 건 불가능하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칼란 왕국, 엘프와 드워프를 자국민으로 인정하고 대우해주는 그 칼란 왕국의 국왕 역시도 엘프들의 호의가 아니면, 바나푸스 열매를 먹을 수 없을 정도다.
“자네가 보기에 신목의 열매를 먹이면, 이 인간이 제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족장님, 이건 아닙니다. 이 인간이 대체 뭐라고 이따위 인간에게 그런 호의를 보내려 하십니까? 그저 목숨만 살리는 거라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굳이 힘까지 찾아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인간이 우리 부족의 천형을 고칠 수도 있지 않은가? 만약 이자가 우리 부족의 천형을 고친다면, 우리는 그에 맞는 대가를 지불해야 할 터.”
“그러니까…….”
그 대가가 힘이라는 말도 없지 않습니까?
가나스는 그리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천형이란 말에 가나스의 목소리는 저절로 기어 들어갔다. 그래, 그 천형(天刑), 1백 년 전부터 시작된 탈라트 부족의 그 심각한 문제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무거워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그걸 고칠 수 있다면?
바나푸스의 열매쯤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사실 어차피 1년 후에는 다시 열매가 맺을 테니까.
‘아니다.’
그러나 가나스는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건 확실치 않지 않습니까? 이 인간이 그 천형을 고칠 수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저 가능성만 있을 뿐이지.”
“그 가능성조차 우리에게는 없지. 때문에 그 가능성이라도 우리에게는 귀중한 것이네.”
“족장님!”
가나스의 언성이 높아질 무렵.
가나스는 스스로의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가나스는 뛰어난 전사다. 엘프 부족을 지키는 전사! 그런 그는 엘프 부족이 지켜야할 법에 대해 너무나도 충실했다.
그 법 중 하나가 무엇인가? 부족장에 반대하지 말라. 부족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부족을 떠나면 된다.
가나스는 탈라트 부족에서 태어나, 이제까지 살아왔다. 이곳을 떠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결국 가나스는 따라야 했다.
더군다나 이제까지 폐욤은 뛰어난 지식을 통해 탈라트 부족을 너무 잘 이끌어왔다.
테블스 산이라는 혹독한 땅, 강력한 몬스터들이 넘쳐나는 이 땅에서 그는 이제까지 큰 피해 없이 부족을 이끌어온 것이다. 만약 다른 이가 부족장이었다면, 잘못된 실수 한 번에 부족이 전멸하는 최악의 결말을 맞이했을 지도 몰랐다.
가나스는 그런 폐욤 부족장을 존경했다.
“족장님의 말대로 따르겠습니다.”
반대는 없다.
그 모습에 폐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준비해주게.”
“예.”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폐욤 족장이 하는 일에 반대를 하는 자들은 없었다.
“그럼 이제부터 신목을 위해 제를 지내겠네.”
그러나 당장 바나푸스 열매를 따다가 문수르의 입에 넣어주는 건 결코 아니었다.
명색이 신목이다. 그 귀중한 신목의 열매를 따는 작업인데 예법이 없을 리 만무하다.
그 예법도 복잡하고, 무엇보다 길었다. 애초에 시간 넘치는 엘프들이다. 그들의 예법이란 것은 제 아무리 간단한 것이라도 기본 사나흘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바나푸스 나무의 열매를 따는데 나흘이 걸렸다.
그 후에는 폐욤 족장이 다시금 그것을 가공해 약으로 만들었다. 그냥 먹어도 효능은 뛰어나지만, 그 효능을 한계까지 더 끌어내기 위한 마법적인 작업을 한 것이다.
그 작업에 또 다시 삼일이 걸렸다.
결국 문수르의 입에 바나푸스 열매로 만든 약이 들어온 건, 일주일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