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5.
어스 월드에서 케르빈 월드로 떠나기 전.
한석균이 문수에게 어스 월드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르쳐줄 당시, 그 둘은 엘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사실 한석균은 엘프에 대해서는 짤막한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그냥 엘프라는 종족이 있다…… 뭐 그 정도?
그러나 문수가 재차 질문했다.
“엘프에 대해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없습니까?”
문수의 질문에 한석균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확실하게 말하지. 드워프는 앞으로 자네가 영지 운영을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종족이다. 드워프가 없다면, 내 계획도 무의미하지. 하지만 엘프는 아닐세.”
한석균은 자신의 계획, 이제르트 자작가 부흥계획에서 엘프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엘프는 영지 운영에 별 도움이 안 되네. 오히려 자네는 앞으로 이제르트 자작령의 부흥을 위해서 무차별적으로 숲을 훼손하고, 파괴하게 될 걸세. 엘프들의 원수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물론 굳이 엘프들의 쓰임새를 말한다면…… 잡아다가 노예 시장에 팔아서 돈을 챙기는 정도겠지. 하지만 영지가 제대로 운영되고,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돈은 빠르게 모일 걸세. 더군다나 자네가 엘프를 잡아다가 노예로 팔만한 성정도 아니고.”
드워프는 꼭 필요하다. 그들이 가진 기술력이 없으면 한석균이 준비한 무수히 많은 발명품들을 만들 수가 없으니까.
그러나 엘프는? 엘프에게는 딱히 바랄 게 없다. 물론 굳이 엘프에게 바랄 게 있다면 전투력 정도일 것이다. 오래 사는 엘프들은 뛰어난 궁사이며, 검사이다. 엘프 전사들의 능력은 오러 나이트 이상이다.
하지만 엘프 부족은 인간들과 사이가 좋지 못하다. 또한 그들은 쉽게 뭉쳐지지 않는다. 그저 부족 단위로 활동할 뿐이다. 문수에게 필요한 건 즉각즉각 명령을 따르는 충실한 병력이지, 실력만 좋고 제 멋대로 행동하는 병력이 아니다.
“그래도 엘프들의 전투력이 뛰어나다면, 군대로 받아들여 운영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합니다만?”
“자네에게 시간이 천년만년 있다면 나쁘진 않겠지. 하지만 인간들보다 곱절은 수명이 긴 엘프들에게 제대로 된 확답을 받으려면, 족히 10년은 걸릴 걸세.”
한석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문수는 계속해서 엘프에 대한 질문을 했다. 나름 판타지 소설 작가였던 문수에게는 엘프에 대한 로망이 나름 있었다.
“혹시 모르니, 그래도 만났을 때 무작정 싸우는 것보단 좋은 관계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계속되는 문수의 질문에 한석균은 포기했다는 듯, 결국 엘프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알려줬다.
개중에서 가려준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피는 피로 갚는다.”
문수르는 그 말을 뱉으면서, 동시에 한석균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피는 피로 갚는다.
한석균에게 배운 말이었다. 한석균은 그 말의 배경에 대해서도 간략한 설명을 해줬다.
‘엘프 사회의 철칙이 있다. 피는 피로 갚는다. 언제부터 이 철칙이 계승됐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엘프 사회에는 이 철칙이 당연하다시피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중요한 약속을 할 때도 끝에 대부분 피는 피로 갚는다, 이 말을 하더군. 중요한 건, 이 말을 할 때는 그냥 단순한 엘프어가 아니라, 엘프들이 예전에 사용하던 고대어를 써야 한다는 것.’
한석균의 설명은 확실했다.
피는 피로 갚는다, 그 말을 하자 엘프가 귀를 쫑긋거렸다. 엘프의 분위기도 조금 달라졌다.
이윽고 엘프의 눈이 문수르를 이리저리 훑어보기 시작했다. 마치 상대를 품평하듯 말이다.
그 순간 문수르가 엘프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엘프를 품에 안아버렸다. 아미 아기를 안듯 말이다.
기겁하는 엘프!
쿠웅!
그와 동시에 그 둘의 등 뒤에서 거친 굉음과 함께 오우거가 모습을 드러냈다.
데굴데굴!
오우거의 눈깔이, 독기에 찬 눈깔이 엘프를 안고 있는 인간을 포착했다.
크르르……!
자신이 쫓던 두 존재가 하나로 엉켜있는 걸 보자, 오우거의 두 눈깔이 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크오오오!
몽둥이를 하늘 높이 들며, 놈이 괴상한 울음소리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보통 울음소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쿠구구!
그 울음소리에 숲이 떨었고, 오우거의 등장에 숨만 죽이고 있던 새들이, 동물들이 기겁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우거 피어였다.
찌릿찌릿!
문수르 역시 그 오우거 피어 앞에서 담담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이 오우거 피어에 반응했다.
‘후우!’
털끝이 곤두섰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버텼다.’
그러나 문수르는 오우거 피어 앞에서 무너지지 않았다. 고작 식은땀을 흘리고, 털이 곤두서는 선에서 끝났다.
대단한 일이었다.
수련이 낮은 오러 나이트들 중에서는 오우거 피어에 노출되는 순간 몸이 경직되는 바람에, 이어지는 오우거의 공격에 조금의 대처도 하지 못해 무기력하게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잇다.
그러나 문수르는 오우거 피어 앞에서 나름 버텨냈을 뿐더러, 오우거 피어에 노출된 후에도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일단 엘프는 잡았다.’
문수르는 엘프를 품에 안은 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문수르가 한 일은 엘프의 몸에 발신기를 부치는 일이었다.
사실 문수르가 가장 믿는 구석이 바로 발신기의 존재였다. 기존 GPS 시스템으로 엘프를 제대로 잡을 순 없었지만, 발신기의 도움을 받는다면 백퍼센트 잡을 수 있으니까!
이제 엘프를 놓쳐도 무방하다. 최소한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다. 엘프가 자기 부족으로 돌아갈 경우, 그 위치를 중심으로 다시 GPS 시스템을 통한 탐색을 시작하면, 드워프 부족의 존재 유무를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결국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건 하나다.
오우거를 처치하는 것!
문수르는 품에 안았던 엘프를 대충 내동댕이쳤다. 이제 솔직히 엘프에 신경 쓸 틈이 없다.
“좋아.”
문수르는 곧바로 오우거를 향해 몸을 돌렸다.
동시에 엘프는 도망쳤다. 엘프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엘프의 몸으로 인간에게 잡힌다는 건,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치욕을 경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문수르도 느꼈다.
‘바람처럼 튀는군.’
그래도 나름 호의를 가지고 접근했는데, 아쉬운 맛이 있다. 적어도 대화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 로맨스라도 기대한 겁니까?
그런 문수르의 생각을 읽었는지, 로이드가 묘한 말을 건넸다. 문수르는 피식 웃었다.
“엘프와의 연애는 로망이긴 로망이지.”
팔팔한 이십대 청춘의 문수르라고 엘프에 대한 로망이 없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로망에 정신이 나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다.
‘엘프는 잊는다.’
문수르는 그 순간 엘프를 잊었다. 나머지 일은 일단 눈앞의 일을 처리한 후에 처리하면 된다.
지금 필요한 건 하나!
“로이드! 타깃 포인트 재설정 시작해.”
- 예.
오우거를 처치하는 것!
순간 오우거는 짧게 고민했다. 자신이 쫓던 두 먹잇감이 하나로 됐다가, 다시 둘이 됐다.
자, 그럼 뭘 쫓아야 할까?
답은 뻔했다.
크오오오!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문수르! 놈을 처치하는 게 오우거의 일생일대의 목표였다.
문수르는 자신을 향해 흉포한 울음소리를 토해내는 오우거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기도하듯 말했다.
“내 선택이 실수가 아니었기를.”
전투가 시작됐다.
이미 분노할 대로 분노에, 이제는 이성마저 잃어버린 오우거의 몸놀림은 격동적이었다. 놈의 움직임에서 절제라는 단어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놈은 그저 자신의 분노에 맞추어 몽둥이를 휘둘렀다.
콰앙, 콰앙!
오우거가 몽둥이로 땅을 내려칠 때마다, 땅이 파이고, 초목이 뒤집혔다. 파괴된 부산물들은 사방으로 튀며,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마치 작은 운석이 땅 위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젠장!’
문수르는 이를 갈았다.
‘공격은 별로 무섭지 않은데…….’
사실 문수르 입장에서 분노에 취한 오우거의 공격 자체는 너무나도 단순하게 느껴졌다. 때문에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렇게 공격할 때마다 생기는 여파였다. 놈이 몽둥이로 땅을 내리찍으면, 나무가 뽑히다 못해 나무가 마치 표창마냥 날아다닐 지경이었다. 문수르 입장에서는 갑작스레 눈앞에서 거대한 나무가 날아오니, 식겁할 수밖에!
우우웅!
그러나 이 와중에도 문수르의 창은 오러를 머금고 있었다. 문수르는 계속해서 창에 오러를 주입했다.
파밧!
동시에 문수르가 보법을 밟으며, 빠르게 이동했다.
보기엔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만약 오러를 다룰 줄 아는 실력자들이 이 광경을 봤다면 감탄사를 뱉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문수르가 보여주는 무위는 놀라운 것이었다. 보법으로 빠르게 움직임과 동시에 무기에 오러를 주입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히 보법만 쓸 줄 아는 수준이 아니라, 오러 운영에 깊은 이해와 능력을 가져야만 가능하다.
‘로이드 덕분이다.’
단시간 내에, 1년 전까지만 해도 오러조차 쓰지 못했던 문수르가 짧은 시일 내에 이 정도 경지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건, 로이드의 체계적인 트레이닝 덕분이었다.
할때는 죽어라 로이드를 욕했지만, 정작 중요한 상황이 되자, 로이드에게 고마웠다.
- 주인님, 창 쪽에 너무 많은 오러를 주입했습니다.
- 주인님, 보법이 틀어졌습니다. 수정한 루트를 출력시키겠습니다.
- 측면에서 공격이 예상됩니다. 이동 루트를 변경합니다.
더군다나 지금 로이드는 실시간으로 문수르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냥 도와주는 수준이 아니다. 이 정도면 로이드가 거의 문수르를 꼭두각시 인형마냥 조작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문수르는 이런 상황에 결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로이드가 없었으면 저 오우거를 상대로는 10분을 버티지 못했겠지.’
로이드가 없었다면 이번 전투는 아예 성립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수르는 감히 오우거에게 시비조차 걸지 못했을 테니까.
만약 로이드의 도움이 없다면, 문수르는 실력은 지금 보여주는 것의 3할 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불만은 무슨 불만이란 말인가?
- 타깃 포인트 재설정 완료했습니다.
그 순간 기다리던 소리가 들렸다.
‘좋아!’
로이드가 재빨리 이동 경로를 수정했다.
타깃 포인트로 지정된 곳, 오우거의 두개골의 뼈들이 만나는 접함점을 보다 쉽게 노릴 수 있는 위치를 지정해준 것이다.
문수르는 군말 없이 로이드가 알려주는 경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크오오!
한편 쥐새끼마냥 자신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는 문수르를 향해 오우거는 거친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이미 분노할 만큼 분노한 놈의 눈은 더 이상 불꽃처럼 타오르지 않았다.
그저 이성을 잃은 채 회까닥 뒤집어졌을 뿐이다.
쾅쾅쾅!
이제 놈은 문수르가 아니라, 땅을 내리치는 걸로 분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땅이 울릴 정도였다.
실제로 문수르의 시야는 마치 비포장도로에 들어온 자동차 속의 운전자의 그것마냥 크게 요동쳤다.
“진짜 이 새끼가…….”
멀미가 날 지경이다. 문수르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러나 문수르는 계속해서 발을 내딛었다. 한 발 한 발, 로이드가 보여주는 길을 걸었다.
‘실패는 곧 죽음!’
싸늘한 각오는 등줄기의 식은땀방울조차 말려버렸다.
문수르는 뛰었다.
빠르게, 잽싸게 그러나 절제된 움직임을 보이며 지정된 위치로 향했다.
휘이잉!
동시에 문수르의 손 안에서 창이 회전했다.
“스파이럴 어택!”
지정된 위치에 발을 딛자마자, 문수르가 타깃 포인트를 향해 스파이럴 어택을 날렸다.
피융!
창에서 뿜어진 화살 모양의 오러 블레이드는 탄환처럼 회전하며, 타깃 포인트를 향해 날아갔다.
아니, 조금 어긋난 것처럼 보였다.
조준 실패인가?
크오오오!
그 순간 오우거가 몸을 돌렸다. 제 몸뚱이 옆으로 피한 문수르를 쫓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 덕분이었다.
퍼억!
문수르의 공격은 오우거의 움직임에 맞추어, 타깃 포인트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푸홧!
오우거의 머리통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쿵쿵!
오우거는 다시 제 머리를 향한 공격에 거칠게 몽둥이와 팔로 주변 땅을 내리쳤다.
- 세 번째 타깃 포인트 설정에 들어갑니다.
그때였다.
- 긴급상황.
로이드가 하던 모든 작업을 멈추고 긴급상황임을 알렸다. 그러나 문수르는 그런 로이드의 말에 반응할 후가 없었다.
“이런…….”
문수르가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젠장, 대체 왜…….”
지금 문수르의 코에서는 코피가 줄줄,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 주인님의 몸 상태가 이상합니다. 전투를 중지합니다. 지금 당장 안전한 지역으로…….
로이드가 매뉴얼대로 대처했다.
하지만 문수르는 로이드의 말이 점차 흐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몸이 붕 뜨는 느낌, 동시에 온몸에서 힘이 빠져가는 느낌.
문수르와 로이드는 염두에 두지 못했던 결과.
다름 아니라 주화입마의 상태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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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르 넌, 이제까지 너무 잘 나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