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3.
이제르트 자작령이 분주해졌다. 궁병들은 성벽 위로 올라와 활시위를 잡아당겼고, 기사들은 그들을 지휘했다.
문수르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성벽을 넘는다.’
문수르는 단숨에 드높은 성벽을 넘어버릴 생각이었다. 문수르의 눈이 빠르게 지형지물을 살폈다. 도약을 위해 필요한 포인트를 집었다. 동시에 문수르의 오러가 문수르의 전신에 퍼지기 시작했다.
약물과 온갖 훈련을 통해 강화된 육체는 오러를 스펀지마냥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전력으로 달리던 문수르의 달리기 속도가 더 가속되기 시작했다. 그것도 곱절로!
눈에 간신히 비칠 정도의 빠르기, 스포츠카의 그것마냥 가속을 시작하는 문수르.
그러나 그 상황 속에서도 문수르의 감각은 주변의 것들을, 정보들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부드럽고, 뚜렷하게 수용했다.
초인(超人)이 된 듯한 감각이다.
아니, 실제로도 문수르는 이제 충분히 초인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수준이다.
파밧!
순간 문수르가 성문을 바로 앞에 두고 도약했다. 정면을 향했던, 곧게 뻣었던 이동방향을 보법을 이용해 너무나도 쉽게 성벽 위로 향하게 만들었다.
팟팟!
금방이었다. 미리 예상했던 몇 개의 포인트를 밟고 올라가자, 성벽이란 활주로가 끝나 있었다.
하늘이 보였다. 성벽 너머가 보였다. 그리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우악스런 둔기를 들고 험악한 기세를 풍기는 오우거가 보였다.
문수르의 눈빛이 빛났다.
‘로이드!’
- 오우거 포착했습니다. 이제부터 대전 모드로 넘어가겠습니다.
문수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멀티 글라스를 착용했다. 멀티 글라스를 쓰자, 오우거의 모습이 포착되면서, 오우거 주변으로 오우거에 대한 정보들이 출력되기 시작했다.
마치 게임을 하는 것 같다.
‘목숨을 건 게임이지.’
꿀꺽!
침 한 번 삼킨 문수르가 곧바로 성문 너머의 땅에 착지했다. 그런 문수르의 착지에 맞추어 궁병들이 활시위를 잡아당긴 채로 화살 끝을 하늘 높이 세웠다.
여차할 때 활시위를 놓아 문수르를 돕기 위함이다.
문수르는 곧장 오우거를 향해 달려갔다.
‘성벽 근처에서 싸워서 좋을 건 없다.’
보통은 성벽을 방패삼아 싸우는 게 정석이겠지만, 성벽에 손상이 가면 수루비가 보통이 아니다. 예산 및 회계를 담당하는 문수르 입장에서는 가장 무시무시한 게 성벽이 파괴되는 경우다.
‘좋아.’
머릿속으로 잽싸게 전투 상황을 상상해본 문수르가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그 순간 문수르와 오우거의 눈빛이 충돌했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문수르의 존재에 당황한 것일까?
“응?”
아니다.
순간 문수르는 당황했다.
‘이 녀석……!’
시선이 부딪쳤다. 보통 오우거는 자신과 시선을 마주친 놈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절대로!
저 흉악한 놈은 자기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는 것만으로도 화를 내고, 그 상대를 쳐부숴야 속이 풀리는 놈이다.
그런데, 그런 오우거 놈이 문수르와 시선이 마주친 다음에 한 행동은 바로 외면이었다.
뭐지?
그 순간 로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 주인님,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숲이지?’
- 맞습니다.
문수르를 외면한 오우거, 놈의 시선이 향한 방향은 다름 아니라 숲이었다. 테블스 산과 이어진 울창한 숲! 오우거 놈이 그 울창한 숲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로이드는 그 울창한 숲에서 다른 무언가의 움직임을 포착한 것이다.
‘오우거가 성을 포기하고 숲으로 향했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오우거는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놈이다. 거기에 놈은 후각도 무지막지하게 예민하고, 뛰어나다. 성 너머에 있는 인간들의 살 내음을 놓칠 놈이 아니다. 더군다나 겨울이다. 먹을 것들이 사라져 굶주림마저 겪는 놈에게 인간들의 성은 뷔페이며, 만찬이다.
그런데 그걸 포기했다는 건?
- 숲속에 무언가를 오우거가 쫓는 모양입니다.
오우거의 본능을 더 자극한 무언가가 숲속에 있다는 의미다.
“왜 그걸 이제야 알았지?”
문수르는 로이드에게 질책하듯 말했다.
- GPS 시스템을 이용해도 포착하기 힘들 정도로 숲 내에서의 은폐능력이 뛰어납니다.
로이드가 변명을 했다.
문수르는 그 변명이 어처구니없었다.
“그게 말이 돼? GPS 시스템을 속일 정도로 은폐 능력이 뛰어나다고? 그런 게 가능한 건 엘프를 제외하면…….”
순간 문수르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진짜 엘프라도 등장한 거야?”
- 정확하게 파악되진 않습니다. 하지만 숲속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이동 중입니다.
“정말인가?”
예상외의 일이 생겼다. 감히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다.
때문에 문수르는 여기서 잠깐 고민했다.
‘일단 오우거는 빠진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성을 향해 다가오던 오우거가 몸을 돌려 숲으로 돌아갔다. 오우거를 기다리던 궁병들 중 일부는 활시위를 잡아당기느라 줬던 힘을 풀 정도다.
이 정도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오우거를 막아낸 셈이다. 적어도 손해는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우거를 뒤쫓는 행동은 미련한 짓이다. 괜히 오우거의 분노를 샀다가 다시 놈이 성으로 돌아온다면?
문수르는 오우거를 혼자 상대할 자신이 있다. 이미 다섯 번이나 오우거를 혼자 쓰러뜨렸다.
그러나 그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꽤나 심한 중노동이다. 오우거와 한 번 싸우고 나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크게 지치게 된다. 솔직히 문수르도 오우거와의 싸움은 부담스럽다.
혹여 문수르가 오우거에게 당하기라도 한다면? 최악이다. 그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자, 그렇다면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자.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물러나는 게 옳다.’
오우거는 없는 셈치고, 여기서 곧장 오크 무리들을 상대하는 병사들을 돕는 게 훨씬 나을 터.
그러나 문제는 역시 그 단어다.
“엘프…….”
엘프라는 존재.
문수르가 케르빈 월드에 온 이후로 엘프를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굳이 말하자면 하프 엘프인 소피아가 전부다.
물론 그 숲속에서 등장한 무언가가 엘프라는 보장은 없다. 그냥 몬스터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만약 정말 엘프라면?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문수르가 로이드를 불렀다.
- 현재 실시간으로 오우거의 위치를 감시하는 중입니다. GPS 시스템의 남은 여력을 집중했습니다.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습니다.
“음…… 오우거가 쫓는 대상은?”
- 여전히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시스템만으로는 그 대상의 명확한 파악이 불가능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문수르는 생각했다.
‘정말 오우거가 쫓는 게 엘프라면, 어쩌면 좋은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
엘프.
‘당장 엘프의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사실 문수르는 당장 엘프가 필요한 건 아니다. 사실 엘프를 데려다가 할 수 있는 건 노예로 써먹거나, 노예로 파는 정도다. 그런데 문수르는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뭐, 엘프 족이 스스로 와서 노예로 써먹어달라고 나온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그럴 가능성은 없다.
문제는 바로 드워프다.
‘엘프 족은 드워프 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들의 세상 속에서 엘프는 그 미모 때문에, 드워프는 그 가진 능력 때문에 언제나 노예 사냥꾼들의 표적이 된다. 때문에 엘프 족과 드워프 족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보호해준다.
물론 엘프 부족만 혹은 드워프 부족만 지내는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만약 테블스 산에 엘프 부족이 있다면…… 그리고 그들과 드워프 부족이 관계되어 있다면?’
엘프 부족이 있다면, 드워프 부족도 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걸 위해선 한 가지 전제가 확실히 충족되어야 한다.
‘과연 정말 엘프일까?’
지금 오우거가 쫓는 그 무언가가 엘프인지 아닌지, 그걸 확실히 해야지 그 다음 논의가 의미가 생기는 거다.
‘선택지는 두 가지.’
때문에 문수르 앞에는 지금 두 가지의 선택지가 생겼다.
선택지 하나, 엘프인지 아닌지 확인한다.
선택지 둘, 그냥 무시한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후자다. 오우거는 버거운 상대야. 괜히 뒤쫓다가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당장 이익이 보장되는 건 두 번째 선택지다. 오우거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부담스럽다.
그리고 만약 엘프라면…… 로이드의 GPS 시스템을 이용해서 위치를 추적할 수도 있다.
“로이드.”
- 예, 주인님.
“추적은 어떻게 되고 있지?”
- 오우거의 위치는 실시간으로 파악됩니다.
“다른 건?”
- 엘프로 추측되는 생명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 죄송하지만, 위치 파악에 성공했다, 실패했다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추적할 가능성은?”
- 29퍼센트입니다.
로이드가 확실한 답을 내놓았다. 지금 이대로 놔두면, 그 무언가가 엘프인지 아닌지 파악할 수 있는 확률이 29퍼센트다. 결코 적은 확률이 아니다. 거의 30퍼센트에 근접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엘프가 살아남는다면 필시 자신의 마을로 돌아갈 터. 오히려 이대로 가만히 감시만 한다면, 엘프 부족의 위치까지 파악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적인 선택지는 두 번째다.
그때였다.
- 주인님.
“왜?”
- 오우거가 엘프로 추측되는 생명체를 공격했습니다.
“뭐?”
변수가 생겼다.
“멀티 글라스에 감시 화면 출력해봐.”
- 알겠습니다.
문수르의 말에 멀티 글라스의 화면이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GPS 시스템이 보는 광경, 로이드가 보는 광경이 출력됐다.
가장 먼저 거대한 오우거의 모습이 보였다. 오우거가 둔기를 휘두르자 숲이 쑥대밭이 됐다.
‘무지막지하군.’
위에서 보니까 오우거의 능력이 대단하다.
‘내가 저런 놈을 혼자서 다섯 마리나 잡았단 말이야?’
그런 놈을 다섯 마리나 잡은 문수르의 능력은 과연 얼마나 된다는 의미일까?
“잠깐! 이 부분, 이 부분 좀 더 확대해봐!”
그 순간 문수르가 무언가를 포착한 듯 로이드에게 화면의 확대를 요청했다.
로이드는 빠르게 작업을 처리했다. 이윽고 문수르가 요구했던 장면이 확대되어 출력됐다.
거기서 문수르는 흐릿하지만 볼 수 있었다. 사람과 비슷하지만, 호리호리만 몸에 긴 금발을 가진…… 그리고 머리통 양 옆에 눈에 띌 정도로 삐져 나온 귀를 말이다.
‘엘프다.’
확실하다.
‘테블스 산에 엘프 부족이 있었어.’
몬스터들의 땅이라고 불리는 테블스 산에 엘프 부족이 분명하게 살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엘프가 있는 건 확실하다.
때문에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
‘지금 내가 가서 도와주지 않으면…….’
케르빈 월드에 와서 처음 보는 엘프, 그런 엘프가 지금 오우거의 우악스러운 폭력 앞에 죽기 일보 직전이다.
그렇다면 문수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엘프를 도와주는 걸로 호감도를 쌓을까, 아니면 GPS 시스템을 이용해서 테블스 산을 다시 한 번 탐색할까?’
도와줄까, 말까?
문수르는 짧게 고민했다. 지금은 길게 고민할 시간조차 없었다. 도와주려면, 지금 당장 뛰어야 한다.
그때 문수르는 자신이 썼던 소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도박 없이 대박 없다.’
- 도박 중독자 같은 생각이군요.
로이드가 태클을 걸었다. 그 태클에 오히려 문수르는 확실하게 선택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대박의 배경에는 도박이 있던 건 분명한 사실이지.”
문수르에겐 대박이 필요하다.
그럼 도박을 하는 수밖에!
“로이드, 엘프를 돕는다. 현재 오우거가 위치한 곳까지 최단시간에 갈 수 있는 루트 파악해. GPS 시스템의 모든 전력을 주변에 집중시키고.
-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