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14화. 오러 마스터.>
1.
계획했던 영지 순회가 끝났다.
‘영지 순회였는지, 의료 봉사단이었는지 모르겠군.’
처음에는 많은 걸 계획했다. 어떻게 해야 얼굴을 알릴 수 있을까, 호감으로 접근할 수 있을까…… 고구마 재배법도 알려줘야 하는데…….
하지만 그런 걱정은 무의미했다.
마을에 방문할 때마다 문수르를 기다리고 있던 건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병자들이었다.
‘생각보다 심각해.’
어느 마을이든, 환자가 없는 마을은 없었다. 더군다나 환자들 대부분의 상태가 아주 안 좋았다. 단순한 감기인 경우에도, 그 상세가 매우 심각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예상은 했다
케르빈 월드의 의료수준이, 지적수준이 어스 월드와는 비교가 불가능한 만큼 병자들이 도처에 넘쳐나고, 죽는 이들도 넘쳐날 것이라고. 평균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특히 단순히 의료수준이 떨어져서 생기는 문제보다는 다른 부분 때문에 그냥 한 번 앓고 끝날 감기 같은 게 악화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헬라 교단.’
그건 바로 헬라 교단의 교리였다.
콩탄 왕국에서 가장 교세가 큰 헬라 교단은 국교는 아니지만, 콩탄 왕국민 대부분이 믿는다.
그런 헬라 교단의 교리 중에 질병에 관계된 게 있다.
그 교리는 다음과 같다.
- 병은 신이 주신 시험이니, 경건하게 받아드려라. 음식을 멀리하고, 물조차 입에 대지 마라. 신의 시험 앞에 경건하지 못한 차, 죽음으로 심판 받으리라.
콩탄 왕국민들은 이 때문에 병에 걸리면 일단 음식을 먹지 않고, 물도 안 먹는다.
‘그게 뭐야? 어디서 약을 팔아?’
문수르가 보기엔 미친 짓이다.
병에 걸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체력이 떨어지거나 면역력이 부족해 병에 걸렸을 경우에는 당연히 잘 먹고, 푹 쉬어서 병을 치료하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물론 케르빈 월드의 사람들이 면역력 따위란 단어를 알리가 만무하지만, 그래도 아플 때 잘 먹고, 푹 쉬는 게 좋다는 것쯤은 알지 않은가?
그러나 헬라 교단의 교리는 그걸 정면으로 부정했다.
더 웃긴 건 그 다음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픈 인간이 먹질 않으면 병이 더 심각해지고,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헬라 교단은 그들을 위해 은혜를 베푼답시고 성수를 준다. 물론 성수는 매우매우 비싸다.
‘전형적인 사이비인데?’
누가 봐도 사이비다.
그런데 사실 더 웃긴 사실은 따로 있다.
‘더군다나 이제르트 자작령엔 헬라 교단의 신전은 고사하고 사제조차 없잖아?’
헬라 교단의 교리는 전형적으로 사이비다. 사기를 치는 거다.
하지만 막상 이제르트 자작령에는 그런 헬라 교단의 신전은커녕 사제조차 없다.
이유?
테블스 산의 몬스터 눈에는 헬라 교단의 사제나, 다른 평민이나 똑같은 식량으로 보인다.
성수를 팔아먹을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이제르트 자작령에는 헬라 교단의 교리가 나름 깊숙히 퍼져있었다.
우스운 광경이지만, 우습다고 그냥 놔두기엔 무척 심각한 이야기였다.
‘영지 순회를 하길 잘했어.’
사실 문수르는 이제르트 자작령에 그 어떤 교단의 신전도 없는 것을 보고, 종교적인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여유를 가졌다. 종교가 가지게 되는 무수히 많은 단점들, 악영향이 이제르트 자작령에는 미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하물며 헬라 교단의 교리라니?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
영지민을 하나로 묶을 계획을 하고 있는 문수르은 이미 진즉부터 종교라는 카드를 사용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미 써먹을 종교를 고른 상황이었다. 대륙을 놓고 봤을 때 그 교세는 꽤나 약하지만, 문수르 입장에서도 충분히 거부감 없을 정도의 교리를 품고 있는 푸흐르 교단이 바로 문수르가 점찍은 교단이었다.
그런데 푸흐르 교단이 오기 전에 헬라 교단의 교리가 뿌리를 내렸다면, 큰 문제로 번질지도 모른다.
그 전에 싹을 뽑아야 한다.
때문에 문수르는 마을 주민들을 치료해주는 한편, 헬라 교단의 싹도 제거했다.
하지만 교리라는 게 진짜 잡초처럼 뽑는다고 뽑혀지는 게 아니다. 주기적인 감시와 관리가 필요하다.
“결국 일만 더 늘어났군.”
문수르가 할 일이 늘어난 건다.
이제 마을과 마을 그리고 성과 마을 사이를 수시로 이동하는 소위 전령병도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 휴가 제도도 만들고…… 고구마 재배법도 계속해서 알려줘야 하고, 영지민의 고충도 들어주고, 한편으로는 의사도 육성해야 하고…….
“당장이라도 노크를 하고 싶군.”
어스 월드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아직 돌아갈 시기가 아니다.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고, 문수르는 그 일을 절대 외면하지 않을 테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얼굴 하나는 제대로 알렸다는 거로군.”
물론 문수르가 열심히 한 덕분에 영지 순회의 목표 중 하나였던 문수르 얼굴 알리기는 성공했다.
아니, 그냥 얼굴을 알린 정도가 아니었다.
이제 문수르의 존재는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이제르트 자작과 동등한 수준이었다. 영지에서 영주와 동등한 수준이란 건, 문수르를 모르는 인간이 없다는 소리다.
“그래, 하나씩 해내가는 거다, 하나씩.”
그 사실이 문수르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2.
겨울이 시작됐다.
이제르트 자작령의 겨울은 겨울다웠다. 눈이 펑펑 내렸고, 해는 늦게 뜨고, 빠르게 졌다. 기온은 뚝뚝 떨어졌다.
이 과정에서 죽는 이들도 등장했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춥군요.”
“그나마 식량이 부족하지 않은 탓에 덜 죽는 겁니다. 식량난이 심했던 4년 전에는 시체를 처리하는 것조차 고역이었지요. 얼어붙은 시체를 처리하는 ㄱ서만큼 힘든 일도 없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나마 문수르가 짧은 시간 내에 해둔 많은 성과 덕분에 피해가 크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기뻐할 틈은 없었다.
겨울이 온다고 해서 몬스터는 쉬지 않았으니까. 물론 몇몇 몬스터들은 동면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반대로 그 때문에 이제르트 자작령을 습격하는 놈들도 있었다.
먹잇감이 줄어드니, 기어코 인간들을 먹기 위해 이제르트 자작령을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오크들이 그 정도가 심했다. 그리고 오크들이 움직이자, 오크를 먹이로 삼는 몬스터들이 이제르트 자작의 성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악순환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상황이 어떻게 되지?”
몬스터의 침입을 알리는 종소리에 회계 장부를 작성하던 문수르가 곧장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 한 명이 문수르 옆에 붙여 상황을 설명해줬다.
“상황이 어떻게 되지?”
“성벽 오른쪽에서는 오우거가, 왼쪽에서는 오크 무리가 포착되었습니다.”
“단순한 염탐일 확률은?‘
“없습니다.”
몬스터들도 상황이 급한 모양인지, 이제는 순번도 지키지 않았다. 사실 보통 오우거가 등장하면 오크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그냥 물러난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크 놈들도 급한 모양이다.
“오크 무리의 머릿수는?”
“이백여 마리쯤으로 파악됩니다.”
“흠.”
오크 무리의 숫자가 쫌 됐다. 겨울 내에 이백여 마리나 움직일 만하면 나름 세력이 있다는 의미다.
더군다나 테블스 산에는 강력한 오크 부족이 존재한다.
“또투 부족인가?”
마치 인간처럼 전술을 쓰는 오크 부족, 또투. 문수르가 언젠가 아주 씨를 말려버리겠다고 작정한 종족이다.
“또투 부족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장의 수준이 또투 부족보다 떨어집니다.”
또투 부족이 아닌 오크 이백여 마리는 문수르의 거친 훈련을 통과한 병사들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지금 포비어 경은?”
문수르는 곧바로 오우거를 처치하기 위한 방법응 강구했다. 오우거라면, 가장 좋은 건 기가스로 처치하는 것. 기가스 파일럿인 포비어가 나서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사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포비어 경은 오크 무리를 소탕하기 위해 움직이셨습니다.”
“아직 출격은 무리인가?”
겨울 내에 무리하게 기가스를 운행하다 보니, 부품 몇 개가 과열에 의해 파손되어 버렸다. 뜨거워졌다가, 식어버리고, 그런 것을 반복하다 보니 버티지 못한 것이다.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것이다.
“좋아.”
문수르가 결단을 내렸다.
“오우거는 나 혼자 처치한다. 내쪽으로 지원을 위한 궁병 열 명만 배치하도록.”
문수르의 결단은 바로 자기 혼자 오우거를 상대하는 것이었다.
누가 듣는다면 말도 안 된다고 말할 것이다.
오러 나이트가 오우거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기가스를 이용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단신으로, 맨몸으로 오우거를 상대한다고? 더군다나 테블스 산의 오우거는 보통 오우거보다 더 흉악하고, 더럽고, 강력하다. 그런 놈을 맨몸으로 상대하려면 오러 마스터는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문수르의 경지가 오러 마스터라는 건가?
그건 아니었다.
‘후우, 오러 마스터가 되면 좀 더 쉽겠지만…….’
하지만 지금 문수르의 경지는 오러 나이트의 끝자락, 달리 보면 오러 마스터가 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영지 순회가 끝남과 동시에 로이드는 케르빈 월드의 마나 농도를 계산한 트레이닝 계획을 짰다. 여기에 계속되는 몬스터와의 전투로 오러 사용에 대한 노하우가 쌓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오러 마스터를 목전에 두게 된 것이다.
물론 오러 마스터가 아님에도 오우거를 상대할 수 있는 건 로이드와 어스 월드의 과학이 만들어낸 창 덕분이기도 했다. 더불어 단전 내의 오러의 양이 늘어나면서, 이제야 페르수스 창법의 제대로 된 비기들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그 전까지는 오러 운영도 부족하고, 보법도 미숙해서 페르수스 창법의 기본기들만 사용했을 뿐, 페르수스 창법의 알짜배기들은 머릿속에만 기억해 두었었다.
‘그건 그렇고,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이런 문수르의 성장. 많은 이들이 놀랐겠지만 사실 가장 놀란 건 문수르 본인이었다.
오러 마스터를 꿈꿨다. 한석균도 말했었다. 마법을 익히지 못하는 문수르가 케르빈 월드에서 제몫을 하기 위해선 최소한 오러 마스터는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오러 마스터를 목전에 두고 있으니, 신기할 수밖에 없는 노릇. 사실상 케르빈 월드에 온지 아직 채 1년조차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오러 마스터라…….’
솔직히 말해서 너무 쉽다.
물론 문수르가 토할 정도로 훈련을 하고, 전장에서 경험을 쌓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쉽다.
때문에 문수르는 오히려 조금씩 강해질 때마다 기쁨보다는 걱정이 생겼다.
‘내가 혹시 착각하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전혀 다른 길을 걷는 게 아닐까?’
이제 문수르도 무(武)가 무엇인지 알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문수르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었다.
‘나는 사도(邪道)다.’
무에는 정도와 사도가 있다.
그리고 문수르가 무를 연마하는 과정은 엄연히 사도다. 순수하게 자기수양을 통한 성장이 아니라, 온갖 약물과 시술 등, 외부의 도움을 통해서 육체를 만들었다.
그 후에는?
깨달음이나, 깊은 통찰은 배제한 채, 로이드라는 철저하게 계산적인 존재가 만든 훈련법을 통해서 성장을 했다.
효과는 있었지만, 반대로 깨달음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사실 보통 소설, 무협 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을 보면 오러 마스터 같은 건 어떠한 깨달음을 얻어야 가능하지 않은가?
물론 현실은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문수르는 이 부분이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했다.
소설 속의 어떤 조연처럼, 결국 그 깨달음을 느끼지 못해 오러 마스터의 경지를 목전에만 둔 채 평생을 살게 되는 건 아닐까?
“배부른 고민이다.”
문수르는 애써 그 고민을 무시했다.
하지만 그 불안감은 어느새 문수르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