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문수르가 환자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제르트 자작은 그런 문수르를 말렸다.
“문수르 경, 위험하네. 전염병이면 자네가 위험해질 수도…….”
만약 문수르가 전염병에라도 걸린다면? 앞날이 깜깜해진다. 이제르트 자작은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기를 빌었다.
하지만 문수르는 개의치 않았다. 문수르가 염두에 둔 것은 과연 이게 진짜 전염병인가, 아닌가 하는 부분이었다.
만약 콜레라 비슷한 전염병이거나 혹여 페스트라면…… 정말 심각해지는 거니까.
‘여기서 확실하게 봐야 한다.
그렇기에 보다 확실한 조사와 검사가 필요했다. 그걸 위해선 환자와의 접촉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윽고 문수르가 이리저리 환자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기, 기사님 저는 병이 아닙니다.”
“자, 잠깐 그런 겁니다. 금방 나을 겁니다.”
“어어엉! 제발 죽이지 말아주십시오…….”
환자들은 그런 문수르의 눈빛이 자신들을 훑을 때마다 온갖 변명을 내뱉거나,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하긴, 그들 입장에서 만약 이게 병이라는 말이 나오면, 전부 산채로 매장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들의 절박함이 문수르의 심장에 그대로 전해졌다. 그러나 실상 문수르보다 더 절박함을 느낀 건 다름 아니라 헤인 경이었다.
‘이게 세상이구나.’
기사로 살아오면서 보지 못했던 것. 그것들이 의사가 되니까 보이기 시작했다.
헤인의 천성이 의사와 맞았다.
그 천성이 이제야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문수르는 담담했다.
‘전염병은 아니다.’
오히려 문수르는 안심했다.
‘패혈증이군.’
환자의 상태를 보자마자 문수르는 그 증상이 자신이 알고 있는 증상과 같다는 걸 보고 안심한 것이다.
발열, 온몸에 멍이 든 것마냥 생긴 푸른 자국들.
물론 이것만으로는 패혈증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심지어 페스트 중에서는 패혈증성 페스트도 있다. 이게 전염병이 아니란 보장은 없다.
그러나 문수르에게도 나름 확신할 수 있는 배경이 있었다.
‘역시 무움(Mum) 뿌리 때문이겠지?’
무움 뿌리.
쉽게 생각하면 참마 비슷한 것으로 콩탄 왕국 전역에서 제법 쉽게 찾을 수 있는 작물이다.
사실 작물이라고 부르기에도 무의미한 것이다. 예전에 고구마를 나눠줄 때 무움보다 맛있다는 이야기에 무움이란 게 케르빈 월드의 고구마인가? 하고 먹어본 적이 있다.
‘그때 이후로 무움은 입에 가져가지도 않았지…….’
최악이었다.
차라리 맛이 아예 없다면, 무(無)라면 씹어서라도 삼킬 것이다. 그러나 무움은 그게 아니었다. 매우 썼고, 몇몇 것들은 역겹기까지 했다. 인간이 먹을 게 못 됐다.
그러나 이 무움이 콩탄 왕국의 평민들에게는 겨울을 보내게 해주는 유일한 식량이었다.
식량이 넘쳐나는 경우는 없다. 대부분의 평민들은 겨울 동안 굶주림과 싸워야 한다. 그 굶주림과의 싸움은 봄이 끝날 무렵까지 이어진다.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때문에 맛이 없든, 있든 뭐든 먹어야 했다. 하다못해 나무라고 갉아먹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무움이 평민들 사이에서는 겨울식량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무움조차 겨울에 없어서 못 먹어 죽는 이들이 있다.
‘문제는 이 무움을 캐내는 과정이지.’
무움 뿌리는 땅 깊숙한 곳에서 자란다. 때문에 무움을 캐내기 위해서는 땅을 깊게 파야 한다.
그러나 케르빈 월드에 제대로 된 농기구가 보급 됐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조잡한 것들뿐이다. 손으로 땅을 파서 캐는 경우도 있다. 날씨가 추워지면 땅이 얼어붙고, 그럼 더 힘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몸에 상처가 나는 경우는 다반사다.
그때 패혈증을 유발시키는 균이 상처에 침입한다. 여기에 겨울이 되면서 면역력은 내려가고, 잘 먹지 못하니 체력은 떨어진 상황. 병에 걸리기에는 딱 좋은 상태다.
때문에 문수르는 이 패혈증을 무움 패혈증이라고 명명했다.
‘이미 성에서도 몇 명이 비슷한 증상을 보였었지.’
그나마 먹을 게 풍족한 편인 성 내의 영지민들 중에서도 비슷한 증상으로 고생하다 죽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처지가 더 나쁜 영지 내 마을의 상황이 좋을 리 만무하다.
‘고구마 재배법을 알려주면서, 이 부분에 대한 교육을 하려고 했는데…… 내가 한 발 늦었군.’
이번 영지 순회에서 무움 패혈증으로 인한 사망자를 줄이기 위해 교육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한 발 늦은 모양이다.
‘그런데 너무 많은데?’
하지만 문수르는 한 가지 사실에 의구심을 가졌다. 그건 바로 지금 환자의 수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스무 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무움 패혈증에 동시에 걸리다니?
‘무움 패혈증은 의외로 사망률이 높다. 만약 순차적으로 병에 걸렸다면, 치료가 안 된 경우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들 전부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 모든 이들이 발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단체로 무움 패혈증에 걸린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
‘단체로 무움 뿌리라도 캐낸 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다. 이들 모두가 동시에, 단체로 산에 올라가 무움 뿌리를 캐는 거다.
‘설마.’
생각해보면 우습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이유를 문수르는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순간 문수르가 루커 촌장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최근에 무움을 캤습니까?”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던 루커 촌장이 기겁하며 반문했다.
“기, 기사님께서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문수르는 혀를 찼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군.’
“자세히 말해보십시오.”
“그게…….”
잠시 뜸을 들이는 루커 촌장. 문수르가 그런 촌장을 향해 다그치듯 말했다.
“확실하게. 거짓말 따윌 할 생각은 하지도 마십시오.”
꿀꺽!
그 말에 루커 촌장은 침을 한 번 삼킨 후에 사정을 설명했다.
“최근 영주님께서 식량을 배급해주신다는 말에 마을 사람들끼리 무움을 캐기 위해 산에 올라갔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문수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식량을 배급해주는데, 먹을 게 없어서 캐먹는 무움을 캐기 위해 단체로 산에 올랐다고?
말이 안 된다.
‘지금 이 노인이 헛소리를 하는 건가?’
문수르 기준에서는 이해조차 안 되는 일이다. 때문에 문수르는 다시 물어봤다.
“식량 배급을 해주는데, 왜 굳이 무움을 캐는 겁니까? 무움 뿌리가 그렇게 맛있습니까?”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먹는 게 무움 뿌리지요.”
“그럼 왜 그걸 캐는 겁니까?”
“그건…….”
촌장은 대답을 하기 전, 이제르트 자작을 한 번 바라봤다. 자작을 보는 그의 눈빛에는 존경심이 어려 있었다.
“이 촌부가 늙기만 하고, 배운 건 없지만…… 그래도 알고 있습니다. 이제르트 자작님이 좋은 영주님이라는 것과, 우리 영주님의 사정이 다른 영주님들과는 다르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촌장의 말은 계속됐다.
“그런 영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렇게 베풀어주시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천한 우리들이 그저 영주님의 은혜만 입는 건 옳지 않다고 봤습니다. 해서, 우리 마을에서는 영주님의 부담감을 덜어주고자 무움 뿌리라도 캐서…….”
거기까지만 충분했다.
상황을 이해한 문수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경우도 생기는군.’
루커 촌장과 펠 마을 사람들의 의도는 그거였다. 자기들이 무움 뿌리라도 캐먹으면 이제르트 자작이 배급해줄 식량의 양이 줄어드니, 자연스럽게 이제르트 자작의 사정이 그나마 나아질 거라고.
눈물 나는 선의다.
결과가 이렇게 병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문수르는 감히 마을 사람들을 탓할 수가 없었다.
‘이런 영지민이 어디 있나?’
사실 루커 촌장 같은 영지민을 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차라리 그랜드 마스터를 보는 게 더 쉬울 것이다.
당장 내일 먹을 밥이 없어 자식을 팔고, 흙을 파먹는 궁핍한 영지민의 삶에서 이런 배려심을 품는다니?
이제르트 자작의 선정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이제르트 자작령에는 분명 진골 같은 사람들이 모였다. 아니, 혹독하게 살다보니 진골이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래.’
문수르는 여기서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고친다.’
문수르는 고칠 것이다. 이 영지민들의 병을 고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제르트 자작령의 모든 걸 고칠 것이다.
이제르트 자작령을 낙원 아닌 낙원으로 만들 것이다. 이제르트 자작령의 이름은 케르빈 월드의 반석에 올려놓을 것이다.
‘그래, 이곳을 고치기 위해 내가 여기에 왔다.’
다시금 각오를 다지는 문수르.
그가 헤인 경을 보며 말했다.
“헤인 경.”
“예.”
“무움 패혈증입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치료법은 알고 계시지요?”
문수르의 물음에 헤인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이미 성 내에서도 몇 번 비슷한 증상이 있었다.
이제까지는 무움 패혈증에 걸려도 죽거나 혹은 운 좋게 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마땅한 치료법이 없었다. 하지만 문수르가 그걸 파악하고, 치료법을 위해 곰팡이 배양 등을 통한 항생제를 만들었다.
이후 그 항생제를 이용해 사람들을 치료한 건 문수르가 아니라 헤인, 바로 그였다.
그런 헤인이 치료법을 모를 리가 만무하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지식만 있는 문수르보다 나을 지도 모른다.
“여분으로 항생제를 준비해왔습니다.”
헤인의 말에 문수르는 잠깐 놀랐다. 헤인의 준비성이 문수르의 생각 이상으로 철저했으니까.
‘대단한 사람이군. 의사가 천직이었어.’
그렇게 곧바로 치료가 시작됐다. 헤인 경이 나서서 치료를 시작했고, 병사들이 그 일을 돕기 시작했다.
동시에 문수르는 이제르트 자작과 따로 자린을 마련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루커 촌장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야기를 듣기 전 굳어있던 이제르트 자작의 표정은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내 미숙함 때문이네.”
“아닙니다. 어찌 이게 자작님의 미숙함 때문이겠습니까?”
“아닐세. 영주는 영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 하네. 이번 일은 내 책임일세.”
자책하는 이제르트 자작.
“너무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문수르가 그를 위로했다. 물론 문수르는 그저 말로만 위로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됐습니다. 개인적으로 예전부터 이제르트 자작령의 의사소통이 너무 막혀있는 것 같았습니다.”
문수르는 미리 준비했던 제도를 말했다.
“전령병을 따로 육성해 수시로 마을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유지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마을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중요하다. 물론 지금 당장은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선에서 그치겠지만, 조만간 이제르트 자작령이 커지게 된다면 단순히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아니라, 중요한 이야기, 중요한 거래를 주고받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문수르에게 가장 필요한 건 단합이었다.
‘배신자가 등장하는 걸 최대한 막아야 한다.’
영지를 하나로 뭉쳐서, 배신자가 등장하는 걸 막아야 한다. 그래야 이제르트 자작이 도약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빨리 줄어들 테니까.
더군다나 조만간 시간이 더 흐르게 되면, 문수르의 가치가 콩탄 왕국의 가치관에 반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때 만약 이제르트 자작령이 하나로 뭉쳐있지 못하다면, 자중지란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그것만큼은 피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