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5.
질병의 존재는 언제나 무섭다.
어스 월드만 해도 그렇다. 케르빈 월드의 문명과 비슷한 시기였던 어스 월드의 중세 시대에서 병은 신벌(神罰)이라 불릴 정도로, 감히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중세 시대를 휩쓸었던 흑사병의 위력은 참혹할 정도였다.
심지어 현대 의학이 극도로 발전한 어스 월드의 현재에서도, 불치병이 존재했으며, 치료법이 있음에도 많은 이들이 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한다.
때문에 한석균은 많은 것을 준비했지만 개중에서 질병에 대한 준비는 다른 것들에 비해 훨씬 철저하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케르빈 월드에서는 제 아무리 막강한 군대도 강력한 전염병 앞에서는 시체가 되어버리고 말지.”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도 질병 앞에선 무기력해지니까.
‘준비는 진즉부터 했다.’
때문에 문수르는 어스 월드와 케르빈 월드를 오고 가면서, 전염병을 비롯해 케르빈 월드의 온갖 질병에 대한 치료법과 대처법을 계속해서 만드는 중이었다.
로이드 역시 GPS 시스템 등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수집했으며, 미지의 질병이라도 곧바로 연구가 가능한 설비 역시 갖추었다.
그러나 이렇게 준비를 했다고 해도, 정말 강력한 전염병이 퍼지면 많은 이들이 죽는 건 어쩔 수 없다.
문수르의 표정이 심각해진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만약 정말 지금 펠 마을에 전염병이 퍼진 거라면,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그건 악재가 될 테니까.
문수르는 이런 자신의 의견을 이제르트 자작에게 말했다.
“전염병이 퍼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전염병?”
“일단 확실하게 하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전염병인지, 아니면 다른 사고가 있던 건지…….”
이제르트 자작은 문수르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펠 마을에 이상조짐이 있는 건 분명했으니까.
이제르트 자작은 곧바로 펠 마을의 촌장을 다시 불렀다.
“루커 촌장.”
이제 막 이제르트 자작의 방문을 축하하며, 준비했던 요리를 가져오려던 루커 촌장은 이제르트 자작의 부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 말씀 하시지요, 자작님…….”
무언가 켕기는 게 있는 모양이다. 말이 덜덜 떨리는 걸 보니 말이다.
이제르트 자작 역시 그 조짐을 느낀 듯, 분위기를 좀 더 무겁게 잡으며 말했다.
“지금 마을에 전염병이 퍼져 있나?”
“예?”
그 순간 루커 촌장의 얼굴 위로 경악스러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이었지만, 이후 새하얗게 질린 루커 촌장의 표정을 보면, 확실히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게 바로 보인다.
이제르트 자작의 표정이 굳어지다 못해 조금씩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런 자작의 표정에 루커 촌장이 기겁하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우리 마을에는 전염병이 퍼지지 않았습니다.”
전염병을 숨기는 건 중죄다.
실제로 대부분의 영지에는 전염병이 발견되었을 때는 무조건 영주에게 그 사실을 알리라는 법을 만들어둔다.
반대로 전염병의 사실을 숨기거나, 은폐할 경우에는 심하면 사형을 내리는 것도 있다.
고작 전염병을 숨겼다고 사형을 준다고? 살벌한 이야기지만, 케르빈 월드의 사정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전염병을 초기에 잡지 못했다가 영지 하나가 궤멸됐다는 이야기는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니까. 국가가 전염병에 흔들리는 경우도 아주 드물지만 가끔 일어난다. 역사가 증명해준다.
그럼에도 전염병 사실을 숨기는 이들은 적지 않다. 그게 사형에 해당할 정도로 중죄인 걸 알면서도 말이다.
왜 숨기는 걸까?
그건 바로 전염병이 발견되었을 때의 대책 때문이다. 케르빈 월드의 대부분의 국가에선 전염병이 일어나면, 일단 병자들을 무조건 격리한다. 심할 경우 병자들을 죽이는 경우도 있다.
그 다음에는 전염병이 생긴 지역을 불태운다. 집 한 채, 가구 하나 남기지 않고 싹 태워버리는 거다.
더 심한 경우에는 그냥 병자와 함께 마을을 태우는 경우도 있다. 병에 걸린 사람은 저주 받은 사람이라 믿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저주 받은 이들을 불에 태워 죽여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심지어 종교인들이란 작자들이 사람들을 태워 죽이는 걸 성스러운 일이라 지껄이는 경우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전염병이 아닌 경우임에도 의심만 간다는 이유로 그런 방법이 쓰이는 경우도 있다는 거다.
평민들 입장에서는 잘못했다간 불에 타 죽을지도 모르는 거다. 그런 상황에서 무조건 전염병의 사실을 알리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펠 마을의 촌장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하지만 만약 정말 마을에 전염병이 퍼졌는데 촌장이 그걸 숨기는 거라면, 그건 이제르트 자작을 기만하는 행위다.
영주가 착하든, 나쁘든, 영주는 기만당해서는 안 된다. 영주가 기만당한 영지는 더 이상 영지라고 부를 수 없으니까.
이제르트 자작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마치 취조하듯, 두 눈을 날카롭게 뜨며 루커 촌장을 노려봤다.
“평소보다 사람 수가 적군. 예전에 방문했을 때는 이보다 서른 명 정도는 더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펠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어나간 건가?”
“그, 그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루커 촌장.
그러자 이제르트 자작의 기세는 험해지다 못해 살벌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르트 자작령은 보통 영지와 사정이 다른 상황이다. 단순히 테블스 산 앞에 영지가 있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이제트르 자작령이 탄생한 건 고작 10년 밖에 안 된다. 그전에 이제르트 자작가가 머물던 영지는 다른 이에게 빼앗겼고, 그 후 조용히 지내려뎐 이제르트 자작가는 왕에게 밉보인 죄로 벌이나 다름없이 테블스 산의 영주가 된 것이다.
역사가 짧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곳저곳에서 잡음이 자주 일어났다.
병사들만 해도 그렇다. 사실 보통 영주가 사병을 운영할 때, 가족 관련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병사들의 가족들이 성 내에서 거주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홀아비로 지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이제르트 자작령의 경우에는 급하게 병사를 고용했다. 거의 강제로 이산가족이 된 경우도 있다.
동시에 이제르트 자작이 오기 전부터 마을을 꾸리고 살아왔던 이들 중에서는 이제르트 자작에 반기를 들었던 경우도 있었다. 이제르트 자작은 그런 그들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아무리 영지민이 필요하다고 해도, 기강이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지는 법이다.
이제르트 자작은 그런 문제에 있어서는 칼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이제르트 자작의 성정을 이제르트 자작의 성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펠 마을의 촌장인 루커가 모를 리 만무하다.
결국 촌장이 바닥에 납딱 엎드렸다.
“저, 전염병이 아닙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상한 병에 걸린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전염병이 아닌데, 병에 걸린 이들이 늘어났다?
이제르트 자작은 이를 갈았다.
“지금 네가 나를 상대로 장난을 치는 것이냐?”
전염병이 무엇인가? 아무런 이유 없이 병에 걸린 이들이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모순이다.
이제르트 자작은 루커 촌장이 자신 앞에서 옹졸한 변명을 지껄인다고 생각했다.
더더욱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다.
일벌백계.
지금은 그 단호한 칼을 뽑을 때다. 이제르트 자작은 허리춤에 달린 검 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츠츠.
병사들이 그런 이제르트 자작의 움직임에 반응했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면 마을 주민들이 어떤 일을 저지를 지 모른다.
그걸 막는 거 병사들의 역할이다.
분위기는 삽시간에 험악하게 변해갔다.
그 순간 문수르가 나섰다. 문수르는 조심스럽게 이제르트 자작의 뒤편에 가서 말했다.
“자작님, 일단 상황을 보다 확실하게 살피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검은…… 잠시 동안은 검집에 넣어두시지요.”
아무도 말리지 못할 것 같았던 분위기. 그러나 문수르가 나서자 이제르트 자작의 분위이가 가라앉았다.
문수르의 존재감은 그 정도로 절대적인 것이었다.
“문수르 경…….”
“촌장이 거짓말을 했든, 자작님을 기만하려고 했든, 그건 모든 걸 보고 난 뒤에 결정을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펠 마을에 병이 퍼지긴 했지만, 촌장의 말대로 사람과의 접촉을 통해 퍼지는 전염병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람과의 접촉을 통해 퍼지는 전염병이 아니다? 문수르 경, 그게 무슨 말인가?‘
그 순간 이야기를 듣던 헤인 경의 눈이 반짝였다.
케르빈 월드의 사람들은 병균이란 개념을 모른다. 병은 그냥 신이 주신 벌 혹은 누군가는 신의 시험이라고 말한다. 악마의 저주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당연한 일이다.
병균이란 건 아무리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그 개념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케르빈 월드에도 그런 병균의 존재를 잘 아는 인물이 있었다.
그게 바로 헤인 경이다.
물론 그도 얼마 전까지는 병균이란 개념에 무지했다. 하지만 문수르 밑에서 공부를 하면서, 그리고 직접 병균에 의해 생기는 과정들을 지켜보고, 사례들을 경험하면서, 그는 이제 충분히 병균이란 세계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
“문수르 경, 제가 도와드리지요.”
병균이란 개념을 알게 되고, 그에 맞는 치료법을 알게 되었을 때.
헤인은 기적을 봤다.
불치병이라 불리던 병이 너무나도 쉽게, 너무나도 허무하게 치료되는 과정을 말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지몽매했는지, 세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리고 문수르가 얼마나 위대한 인간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문수르의 의중이 어떠한지도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문수르 역시 헤인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윽고 문수르의 명령에 펠 마을에 이상한 병에 걸린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 누구도 허튼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병사들이 두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 어머니……!”
병사들 중 한 명인 베드릭, 그의 눈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모이는 병자들 사이에는 그의 어머니가 있었다. 10년 만이었지만, 베드릭은 어머니의 얼굴을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이를 드신 어머니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했고, 무엇보다 초췌했으며, 온몸에은 멍이 든 것마냥 푸른 빛을 내고 있었다.
‘대, 대체 무슨 일이지!’
베드릭은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 않냐고!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지려고 했다.
그 순간!
덥썩!
마우로우가 베드릭의 어깨를 잡았다. 마우로우는 굳은 표정을 지은 채 울먹이는 베드릭에게 말했다.
“여기서 네가 나서면 일만 꼬여.”
“하, 하지만, 어, 어머, 어머니가…….”
말조차 더듬는 베드릭. 그런 베드릭의 모습에 마우로우는 베드릭의 뺨을 거세게 후려쳤다.
짜악!
베드릭의 볼짝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마우로우는 그런 베드릭에게 말했다.
“여기서 네 녀석이 허튼 짓을 하면, 네 어머니의 목숨이 더 위험해진다. 하물며 문수르 경이 계시다. 네놈이 나서는 것보다 문수르 경을 위해 기도하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