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4.
영지민의 삶은 어디서나 비슷비슷하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결코 평탄한 삶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영지민의 삶이란 정말 척박하고, 처절하고, 고달픈 것이다.
일단 그들은 언제나 착취의 대상이다. 케르빈 월드에서 배부르게 사는 영지민, 평민은 없다. 일단 그들은 평생을 농사일을 한다. 농사를 하지 않을 때는? 영지의 온갖 잡일에 동원된다. 그러면서 보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악독한 영주를 만나면 정말 노예보다 못한 처우를 받는다. 사실 영주들 중에서 일부는 영지민들보다 노예를 더 값지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노예는 팔면 큰돈이 되지만, 영지민은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영지를 택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그러다가 겨울이 오면, 굶주림과 싸워야 한다. 그 굶주림에서 죽는 이들이 가장 많다. 영지민들은 자기들이 수확한 작물들 중 극히 소량만 품은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영지민들에게 구휼 따위를 위해 자기 식량을 내놓는 영주는 정말 극소수다.
때문에 영지민들의 신분 상승 기회 중 하나가 바로 영주의 사병이 되는 일이었다.
영주의 사병이라고 해서 좋은 건 아니다. 고된 훈련에 동원되고, 죽을지도 모르는 전투에 끌려간다.
그러나 그 외의 처우는 제법 좋다. 일단 배를 곯을 걱정이 없다. 영주는 어떻게든 전력 유지를 위해서 사병의 식사만큼은 챙겨주니까. 겨울 중에도 식량 배급은 계속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병사의 삶이 무조건 평탄한 건 아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들은 공짜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영지민들 이상 가는 행동의 제약을 받는다. 영지민의 경우에는 영지 내에서의 이동이 어느 정도 자유롭지만, 사병들은 성 내에서의 이동조차 철저하게 제약 받는다.
외부로의 이동?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탈영이 걱정이라서? 탈영도 물론 문제가 되지만, 사실 그보다 더 걱정되는 건 그렇게 해서 탈영한 놈이 영지 내부의 정보를 외부로 빼돌릴 경우의 일이다.
언제 영지전이 일어날지 모르고,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땅이다. 그런데 영지 내의 정보가 외부로 새어나가면, 싸워보기도 전에 이미 지고 들어가는 셈이다.
때문에 보통 탈영이나, 근무지 이탈 등에 대한 처벌이 매우 심하다. 탈영은 잡히면 무조건 사형! 근무지 이탈도 거의 반병신으로 만들어주는 영지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이유로 영주의 병사가 된 이후로 평생 동안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늙어 죽겄나, 전쟁에서 까마귀밥이 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전 일곱 살 때 영주님의 성에 들어왔습니다.”
베드릭.
펠 마을 출신의 이 청년이 이제르트 자작의 성에 들어온 건 일곱 살 때의 일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병사가 되기 위해 성에 들어온 게 아니었다. 당시 성에는 시동이 필요했고, 가장 가까웠던 펠 마을의 어린 소년이었던 베드릭이 온 것이다.
“사실 가지 않아도 됐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집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물론 타의로 온 건 아니다. 사실 성의 시동이 된다는 건 꽤나 좋은 기회다. 운이 좋으면 성의 하인이 될 수도 있다. 하인이란 게 무슨 대개 나쁜 것처럼 들리지만, 병사들도 부러워하는 게 하인이다.
영지에서 제일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영주의 성에서 잘 걱정,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사들에게조차 부러운 일이니까.
“보통은 지원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닐 텐데?”
“아버지가 병사셨습니다. 그러다가 전투에서…….”
베드릭이 시동이 될 수 있었던 건 그의 아버지가 사병으로 활약하다 전사했기 때문이다.
전사자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던 셈이다.
그러나 베드릭은 이후 병사가 됐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사정이 좋지 못한 탓이다. 힘 세고, 체격 좋은 하인보단 병사가 필요하던 때였으니까. 그렇게 병사가 된지 3년 째.
“성에 온 이후로 어머니와는 편지로만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래봐야 이제 열여덟 살. 그러나 그는 10년 넘게 가족을,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
언제 볼 수 있을지, 그것보다 가늠되지 않았다. 과연 살아생전 볼 수는 있을까?
그런데 그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더불어 기사들과 다른 고참 병사들 역시 그런 베드릭의 사정을 모르는 게 아니었기에, 영지 순회단에 그의 이름을 넣은 것이다. 더불어 다른 병사들 역시 베드릭이 차출된 것에 기뻐해줬다.
‘긴장할 수밖에 없겠군.’
10년 만에 만나는 어머니.
이야기를 듣던 문수르는 찔끔 눈물이 나올 뻔했다.
‘슬픈 이야기군.’
감동적인 스토리가 아니다. 너무나도 슬픈 이야기다.
일곱 살 소년이 십 년 넘게 어머니를 보지 못한 것이다. 그것도 사별이란 만날 수 없는 절대적 이유 때문이 아니다.
하루, 고작 하루 걸으면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어머니가 있음에도 자신의 처지 때문에 보지 못한 것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힘든 수준이 아니겠지.’
문수르는 솔직히 짐작하지 못한다. 정신적인 고통이란 건, 그 정도가 없는 법이니까.
때문에 문수르는 결심을 다졌다.
‘휴가 제도를 도입해야겠어.’
휴가 제도.
이미 예전에 만들어준 제도지만, 이제까지 문수르는 그 휴가 제도를 보류해왔었다.
나름 어스 월드의 대한민국 남아로 태어난 덕분에 군대도 갔다와본 문수르가 휴가의 소중함을 모를 리 만무하다. 자신 역시 2년 동안 군복무를 할 때, 고작 며칠의 휴가가 얼마나 소중했었다. 심지어 외박조차 감격스러웠다. 뭐, 그냥 그 지겨운 자대를 잠시라도 떠난다는 사실이 기뻤지만.
하물며 2년은커녕, 10년, 20년…… 혹은 평생 동안 병사로 지내면서 휴가 한 번 없는 인생은 어떤 인생일까?
‘죽을 맛이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런데 그 끔찍한 일이 지금 케르빈 월드에서는 당연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나라도 바꿔야지.’
물론 문수르는 휴가 제도를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도입하고 싶었다.
그러나 문수르는 바보가 아니다. 케르빈 월드에는 그 나름의 가치관과 기준이 있는 것이다.
오히려 무리하게 휴가 제도를 쓴다고 해서, 그게 잘 먹힐 거란 보장은?
그게 탈영의 기회로 변질된다면? 혹은 자작가의 정보가 외부로 유출된다면? 가뜩이나 적이 많은 이제르트 자작가인가?
병력의 공백은 또 어떻게 봐야 할까? 탈영이 한 번 시작되면 가속도가 붙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탈영병이 늘어나면 사기 역시 저하될 수밖에 없다. 그 책임은 누가 지지?
그래서 보류했다.
안타깝지만, 영지 사정이 좀 더 안정된 후에 점진적으로 제도를 도입할 생각이었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은 강하고, 올바르다.’
그러나 베드릭 같은 경우를 보니, 단순히 보류만 해서 좋을 것 같지는 않다.
과감하게 나가도 될 것 같다.
더군다나 문수르가 보고 경험한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은 뛰어나면서도 믿을 수 있는 이들이다.
‘조만간 시행하자.’
결정을 내렸다. 이제르트 자작가에 휴가 제도를 도입할 것이다. 물론 무조건 주는 건 아니다.
공을 세운 자들 혹은 열심히 한 자들, 노력한 자들.
그들의 노력과 공의 대가로 줄 것이다. 잡음을 없애기 위한 체계적인 조건도 마련해야겠지.
“베드릭.”
한편 베드릭에게 묻고 싶었다.
“병사 베드릭!”
문수르의 부름에 기합을 내지르듯 소리치는 베드릭.
“어머니를 보면 가장 먼저 뭘 할 생각입니까?”
“그건…… 고구마를 드릴 생각입니다.”
“고구마?”
“예!”
문수르는 고구마 수확 이후에 그것을 주기적으로 한두 개씩 병사들에게 지급했다. 빵 대신에 배급을 해준 셈이다. 그 양은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병사들은 그렇게 배급된 고구마를 정말 아껴 먹었다.
그런데 베드릭은 그 고구마를 먹지 않고, 가져온 모양이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문수르는 그런 베드릭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베드릭은 그 미소에 얼굴만 붉힐 뿐이었다.
그 무렵이었다.
“휴우…….”
병사들과 문수르의 대화를 멀찌감치 떨어진 바라보던 여인, 이리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수르를 향한 그녀의 눈빛은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섞여있었다.
그때 그 한숨을 본 헤인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혹시 몸에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이리…….”
만약 문제가 이리아의 주치의이기도 한 헤인이 나서야 한다.
“헤인 경.”
“자작님?”
그 순간 헤인 경의 어깨를 이제르트 자작이 살짝 잡아 당겼다. 이제르트 자작은 묘한 미소를, 아버지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놔두게.”
흐뭇하기 짝이 없는 미소. 그 미소에 헤인 역시 상황을 이해한 듯,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펠 마을에 도착했다. 이미 이제르트 자작이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펠 마을은 모든 사람들이 이제르트 자작을 맞이하기 위해 영지 밖에 나와 도열했다.
“자작님이다!”
“자작님께서 오셨다! 모두들 준비해라!”
이윽고 이제르트 자작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펠 마을 사람들 전부가 바닥에 엎드렸다.
이제르트 자작은 그 광경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이것은 일상이나 다름없는 광경이었다.
반면 문수르는 조금 달랐다.
‘이거 좀 그러네.’
문수르 입장에서 이런 광경은 그렇게 익숙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사람이 오체투지 하는 걸 받아들이는 입장이 되니까 되게 불편하네.’
익숙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다.
- 이제 익숙해지셔야 할 겁니다.
로이드가 한 마디 거들었다.
- 만약 정말 힘드시면 트레이닝 매뉴얼을 높여서…….
‘야,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흐르냐?’
순간 훈련 이야기가 나오자 문수르는 혀를 찼다.
‘너 요즘 내가 뭘 하든 훈련 이야기 꺼내더라? 밥 먹을 때도 훈련 이야기, 다른 일을 할 때도 훈련 이야기. 너 심지어 내가 잘 때도 훈련 이야기로 날 세뇌하려고 하더라? 응?’
최근 들어 로이드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어떻게든 문수르의 훈련의 양을 늘리는 것!
물론 문수르는 로이드의 의도를, 로이드가 어째서 훈련의 양을 늘리려고 하는지 알고 있었다.
마나 때문이다.
사실 로이드는 이미 사전에 문수르의 훈련 프로그램을 짜둔 상황이었다. 훈련과 휴식이 절묘하게 조절된 훈련 프로그램을 말이다.
그런데 케르빈 월드에서 마나가 영향력이 로이드의 예상치보다 훨씬 높았던 것이다.
성장속도도 빠르고, 회복속도도 빠르다.
이후 정보 수집을 통해 로이드가 내놓은 결론은 새로운 훈련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통상의 훈련 프로그램보다 더 힘들다.
당연한 말이지만 문수르는 될 수 있으면 더 힘든 훈련을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강해지는 건 좋다. 그런데 숨 돌릴 틈은 줘야 하지 않겠는가? 문수르라고 놀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이리저리 바쁜데 여기서 훈련 강도가 더 강해지면 진짜 숨조차 돌릴 틈이 없어질 것이다.
훈련을 거부하면 어떠냐고?
그럼 로이드가 그 사실을 기록했다가 보고서로 만들어 한석균 회장에게 미주알고주알 보고하겠지.
결국 문수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저런 변명으로 상황을 잠시잠시 모면하는 것뿐이다.
‘젠장, 이제 이 짓도 힘들군.’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다. 애초에 이런 식의 방법이 먹히는 건, 로이드가 그나마 문수르의 의사를 존중해주기 때문이다.
- 이제 아셨군요.
사실상 로이드가 강제로 훈련 프로그램의 강도를 높여도 문수르는 어떻게 할 말이 없다.
- 그럼 납득하신 걸로 알고, 영지 순회가 끝나는 즉시 트레이닝 매뉴얼을 재편하겠습니다.
‘자, 잠깐? 재편이라고? 보강이 아니라?’
- 운동 루틴 모르십니까? 그동안 똑같은 것만 반복했는데, 이번에는 변화를 줘야지요.
참고로 훈련의 양이 그냥 늘어난 것과 훈련 자체가 바뀌는 것. 힘들고 어려운 건 단연코 후자다.
‘야! 잠깐!’
문수르가 다시금 로이드를 불렀다. 아니, 이건 좀 아니지 않아?
그러나 로이드는 대답이 없었다.
그때였다.
“문수르 경,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예?”
헤인 경이 문수르에게 다가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표정이 굳어지시기에 혹여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로이드와 대화를 하던 도중에 표정변화가 있었나보다. 문수르야 어쩔 수 없는 거라고 해도 남들이 보기엔 착각을 할 수밖에 없을 터. 문수르는 대충 얼버무렸다.
“별 거 아닙니다. 단지 펠 마을이…… 생각보다 사람이 적은 것처럼 보여서 말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마을 내 영지민의 숫자가 팔십여 명 정도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이는 이들은 오십을 간신히 넘기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음!”
문수르는 그저 대충 상황을 얼버무리기 위해 내뱉은 말.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헤인과.
‘어? 가만 진짜 이상하네?’
그 말을 뱉은 문수르 역시 상황이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숫자 차이가 큰데?’
펠 마을에는 팔십여 명의 영지민이 거주한다. 이 수치는 확실한 게 아니다. 오고 가는 사람이 있고, 언제 어느 순간 사람이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세계니까.
그러나 지금 눈에 보이는 건 대략 오십여 명 수준.
- 정확히 56명입니다.
로이드가 빠르게 계산을 해줬다.
그 순간 문수르는 그 누구도 아닌 베드릭을 바라봤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감 때문이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지금 베드릭에게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이윽고 문수르가 베드릭을 보았을 때, 베드릭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째서일까?
문수르는 그 답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나오시지 않았군.’
베드릭의 성격이라면, 영지 순회단의 병사로 차출됐을 때 필시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을 터. 그렇다면 그의 어머니는 이 자리에 나와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없다는 건?
문수르가 말머리를 돌려, 이제르트 자작 쪽으로 갔다.
‘설마…….’
그 순간 문수르의 머릿속에 혹시나 했던 좋지 못한 상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최악이라 할 수 있지만, 언젠가는 마주하고 싸워야 하는 것.
‘전염병 따위는 아니겠지?’
그건 바로 질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