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3.
영지 순회단이 꾸려졌다.
일단 가장 중요한 인물은 둘이었다. 이제르트 자작과 문수르. 여기에 기사지만, 기사 겸 의사가 되어버린 헤인 경이 포함됐다. 이들을 호위하기 위한 병력으로는 병사 서른 명이 차출됐다. 여기에 그들을 도울 일꾼으로 열 명이 추가됐다.
그리고 영지 순회를 떠나기 바로 전 날,새로운 인물이 추가됐다.
“이리아 아가씨께서 순회에 참가하신다고요?”
“그렇다네.”
이리아 이제르트.
그녀가 갑작스레 영지 순회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녀가 영지 순회에 참가하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녀는 엄연히 이제르트 자작가의 사람으로, 현재 아카데미에서 공부 중인 그녀의 남동생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이제르트 자작가는 그녀가 계승하게 되니까.
문수르와 같은 이유로, 그녀 역시 영지민들에게 얼굴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영지 순회에 참가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몸이 너무 안 좋았다. 하녀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조차 불가능했다. 그런 그녀가 나름 체력을 요구하는 영지 순회라니? 어림도 없는 일이다.
만약 혹여 영지 순회가 가능했더라고 하더라고,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영지 순회보다는 어느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문수르는 한 가지 걱정이 됐다.
“이리아 아가씨의 몸은 괜찮으십니까?”
“물론일세. 많이 좋아졌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네.”
이리아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제르트 자작의 표정에는 기쁨이란 감정이 넘쳐났다.
이제르트 자작령에 온 이후로 언제나 수심 가득했던 그가, 이제는 언제든지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기쁨은 바로 문수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때문에 문수르를 바라보는 이제르트 자작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만약 죽어서 신 앞에 선다면, 나는 문수르 경을 내게 보내준 신에게 감사부터 할 것이다.’
이제르트 자작이 문수르를 바라볼 무렵.
문수르는 놀랐다.
‘이 세계의 마나가 회복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건 알았지만, 이리아의 회복속도가 그렇게 빠를 줄이야.’
가슴을 여는 수술이었다. 쉽지 않은 수술이었고, 환자에게도 부담이 많이 되는 수술이었다. 솔직히 재수가 없었다면 수술 후에 죽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이리아의 회복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단순히 상처가 아무는 속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사실 상처 회복 이전에 문수르는 워낙 오랜 기간 동안 제대로 된 일상생활도 하지 못한 이리아를 위해 재활 프로그램을 짰다. 그 재활 프로그램에 따르면 이리아가 뜀박질을 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최소한 겨울이 지나고, 봄 끝무렵에 도달할 때쯤이다.
이건 그 누구도 아닌 로이드가 내놓은 예상이었다. 신뢰도는 거의 백퍼센트에 가깝다.
하지만 로이드의 예상과 다르게 이리아의 회복속도는 엄청나고, 심지어 이제 어느 정도의 일상생활도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이게 다 힐링 마법 덕분인가?’
로이드의 예상이 빗나간 가장 큰 원인은 힐링 치료 때문이었다.
사실 문수르나, 로이드는 힐링 마법을 어디까지나 상처를 빠르게 회복시켜주는 정도로만 여겼다.
그러나 케르빈 월드에서 힐링 마법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었다. 사실 케르빈 월드는 힐링 마법 때문에 의학의 발전이 매우 더뎠지만 반대로 힐링 마법이 주류를 이루는 만큼, 힐링 마법에 대한 연구와 발전을 그 어떤 마법보다 빨랐다.
단순히 상처를 치료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상처 치료가 아니라 건강해지는 힐링 마법, 관절이 좋아지는 힐링 마법까지 있었다.
‘인간은 인간이군.’
마법 때문에 다른 것들이 발달하지 못했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마법이 발달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아예 힐링 마법사란 타이틀을 따로 분류해, 다른 직업으로 취급할 정도였다.
‘정말 언젠가 날 잡고 힐링 마법에 대해서 연구 좀 해야겠어.’
마법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많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강력한 공격 마법보다는 힐링 마법에 더 관심이 끌렸다.
‘그러고 보니, 영지에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힐링 마법사가 있었지.’
이리아를 비롯해서, 영지의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해 이제르트 자작령에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힐링 마법사가 있었다.
보통 힐링 마법사의 몸값은 비싸다.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이제르트 자작 입장에서 힐링 마법사를 자주 부르는 건 부담스럽다.
하지만 그 힐링 마법사는 과거 이제르트 자작과의 인연 때문에 거의 봉사 수준으로 수고비만 받고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자주 영지에 온다는 건데, 가만 보니까 그 힐링 마법사를 만나본 적이 없네?’
그러나 문수르는 어째서인지 그 마법사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를 피하는 건 아니겠지.’
문수르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문수르도 나름 바쁜 몸이었으니까.
그리고 다음 날, 영지 순회단이 영지 순회를 시작했다.
영지 순회를 위해 차출된 병사들은 대부분 두 부류였다. 나이가 많은 고참과 나이가 적은 신참들.
‘나쁘지 않아.’
문수르는 이 배치에서 기사들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이가 많은 고참 병사는 그동안 영지에 충성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나이가 적은 신참 병사는 가장 힘든 시기인 지금 충성심을 고양시키기 위해서 고른 거겠지.’
적절한 조합이었다.
이렇게 되면 나름 중견급 병사들이 푸대접을 받는 느낌이기도 하겠지만, 그들 역시 나이를 더 먹고 고참이 되면 기회가 온다는 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주기적으로 영지 순회를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좀 더 이런 기회를 자주 가지면서, 병사들에게 보다 많이 고향 마을을 방문할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 그들의 충성심이 높아질 테고, 동시에 이제르트 자작령이 죽음의 땅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땅이라는 걸 영지민 전부가 인지하게 될 것이다.
그건 곧 영지의 활력으로 이어진다.
물론 여기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문제는 전력의 공백이다.
‘역시 힘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병사들 사기 올린다고 병력 공백을 그대로 놔두는 건 더 위험한 일이다.
‘역시 그 계획을 해야 하나…….’
사실 사병의 숫자를 늘리는 일은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일단 영주가 보유할 수 있는 사병의 숫자에는 제한이 있다. 그 이상 보유하는 걸 허락하게 되면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는 만큼, 왕실은 영주가 보유한 사병 숫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게 아니더라도 사병의 숫자는 결국 영지의 재정, 궁극적으로는 영지민의 숫자에 따라 달라진다. 생산성은 거의 전무한 병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니까. 더불어 이제르트 자작령은 영지민의 숫자에 비해 과다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용병대까지 운영하고 있으니, 자금 사정이 만날 좋지 못할 수밖에.
결과적으로 보다 많은 병력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영지민을 늘려야 한다. 아무리 좋은 재배 작물이 있고, 땅이 있다고 해도 농사를 지을 사람은 필요하니까.
그러나 어떤 미친놈이 이제르트 자작령의 영지민이 되려고 할까?
‘영지전 뿐이다.’
여기서 문수르는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고, 그 중에서 문수르가 선택한 선택지는 강공이었다.
바로 영지전을 통해 영지를 흡수하는 것! 무리한 일이지만, 지금 이제르트 자작의 사정상 그게 아니면 솔직히 영지민의 숫자를 늘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더불어 지금 이제르트 자작가를 고깝게 보는 영지들이 가끔 시비를 걸곤 한다. 그놈들을 그대로 놔두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다.
‘결국 또 드워프야.’
그런데 요즘 영지전은 무조건 기가스 맞짱이다. 각자 보유한 기가스로 승부를 가리는 것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 이제르트 자작령은 최악이다. 보유한 기가스의 질이나, 수준이 최악이니까.
결국 영지전을 치르기 위해서는 문수르가 원하는 스펙의 기가스를 만들어야하고, 그걸 만들어줄 만한 실력자는 드워프 장인 밖에 없다.
‘젠장, 어디 하늘에서 드워프 장인이 뚝하고 안 떨어지려나.’
이쯤 되자 문수르도 천운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복권 당첨을 기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진짜 내가 작가할 때는 이럴 때 운 좋게 드워프 일족 같은 거 발견해서 뚝딱 한 챕터에 이야기 끝내고 그랬는데.’
소설 쓸 때가 그리워졌다.
그땐 솔직히 정 아니다 싶으면 개연성 무시하고 뭐든 끼워 넣으면 해결이 됐으니까. 물론 그 보답은 출판 부수로 이어졌다. 이딴 게 책이냐고, 개연성은 밥에 말아먹었냐는 비평과 함께 말이다.
“후우, 뭐 일단 어떻게든 되겠지.”
문수르는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그를 위로하듯, 로이드가 한 마디 건네줬다.
- 주인님,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오랜만에 자신을 위로해주는 로이드의 모습에 문수르는 조금은 감격했다.
아, 드디어 이 녀석이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구나!
- 이럴 때일수록 열심히 하셔서 잡생각을 떨치는 게 좋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터 트레이닝 매뉴얼의 강도를 평상시의 2배로 잡겠습니다. 트레이닝 과정은 전부 기록되는 거 아시죠?
“……는 개뿔. 이 빌어먹을 자식!”
영지 순회로 처음 방문하게 될 마을은 펠 마을이란 곳이었다.
영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마을이었기에, 펠 마을의 촌장은 몇 번 이제르트 자작령을 방문했었다. 문수르 역시 그 촌장을 만나본 적이 두 차례나 있었다.
가는 길은 평탄했다. 몬스터의 습격이나, 예상치 못한 일은 없었다.
문수르 역시 평상시보다는 조금 긴장을 풀었다. 병사들 역시 긴장의 끈을 너무 바짝 조이지 않았다. 적당하게 긴장한 그들의 모습에 문수르는 미소를 지었다.
‘훈련이 참 잘됐어.’
이제르트 자작가의 병사들은 일급이란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뛰어났다. 비단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이제르트 자작가에는 기사들을 비롯해 대부분이 어느 정도 인격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멀쩡했다.
멀쩡한 게 무슨 대단한 일이냐, 라고 묻겠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특히 이제르트 자작령은 막장에 다다른 영지나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도 막장에 도달하게 되면 미쳐버리거나나, 자포자기 심정으로 주변에 온갖 해악을 끼치고는 한다.
그런데 이제르트 자작령은 그런 게 없다.
‘너무 혹독하기 때문이겠지.’
오히려 혹독한 환경이 적당한 병신들은 알아서 걸러주는 채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덕분에 나름 진국 같은 사람들만 모였다.
‘응?’
그 순간 문수르의 눈에 병사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보다 긴장하고, 들뜬 기색이 역력한 병사였다.
‘어린데?’
얼굴을 보니, 그렇게 나이가 많아보이진 않는다. 아니, 솔직히 어스 월드에서 살아가던 문수르 입장에서는 풋풋한 나이다. 어스 월드였다면 지금 고등학교나 다녔을 나이로 보인다.
‘왜 이렇게 긴장했지?’
그런데 긴장해도 너무 긴장을 했다. 문수르는 천천히 말을 움직여 그 병사 근처로 갔다.
문수르가 오자 병사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리를 마련해줬다. 그중 한 명이 대표로 물었다.
“문수르 경, 내리실 명령이라도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그보다 저기 저 병사.”
문수르가 말 위에서 병사 한 명을 지목했다.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던 어린 병사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저 병사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베드릭이라고 합니다. 베드릭! 이리 와라!”
병사는 곧바로 베드릭을 물렀다. 하얗게 질린 베드릭이 거의 본능적으로 문수르 앞에 왔다.
문수르는 병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눈빛에 베드릭은 크게 소리쳤다.
“병사 베드릭입니다!”
이 와중에도 관등성명을 하는 걸 보면 군기는 확실히 제대로 다져진 모양이다.
“어디 몸이 안 좋습니까?”
“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긴장했습니까?”
병사들 사이에서 문수르는 착한 악마라고 불린다. 그렇게 불리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문수르의 말투 때문이다.
문수르는 반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게 병사들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다. 언제나 기사들이나 고참에게 욕설이나, 반말을 듣던 그들이다. 그런 상황에서 문수르와 대화를 나누게 되면…… 솔직히 당연한 대답도 그냥 내뱉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걸까? 말투를 바꿔야 하나? 혹시 지금 날 가지고 장난하는 건가?’
온갖 생각이 들다 보니, 말이 제대로 안 나오는 것이다.
물론 평소대로 하면 된다. 딱히 문수르가 어려운 질문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그럼에도 문수르의 차분하면서도 나름 상대를 존중하는 듯한 어조를 듣게 되면 머릿속에 떠오르던 대답도 사르르 녹아 사라진다.
베드릭도 마찬가지였다.
“그, 그건……!”
베드릭이 당황했다. 문수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문수르 입장에서는 혹시 몸이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미에서 나온 행동이었지만 병사들이 받아들이는 느낌은 달랐다.
문수르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병사들은 알고 있다. 전장에서 문수르가 보여주는 모습은 악마, 그 이상이라는 것을 말이다.
더군다나 문수르는 이미 피를 한 번 본적이 있다. 비리를 저지르던 하급 관리들을 조금의 용서도 없이 죽여 버렸다. 피를 볼 때는 볼 줄 아는 인물, 그게 바로 문수르였다.
때문에 병사들은 지금 문수르의 표정을 아주 기분이 고까운 상태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눈치 빠른 병사가 나섰다.
“병사 마우로우!”
나름 고참 병사인 마우로우가 나섰다. 문수르가 그런 마우로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해도 좋다는 의미였다.
“베드릭은 현재 처음으로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라 매우 긴장한 상태입니다. 문수르 경의 깊은 아량과 도의로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선처?’
문수르는 순간 선처라는 단어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벌이라도 준다고 생각한 건가?’
문수르가 아무리 좋게 나간다고 해도, 병사들에게 문수르는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상관이다.
‘내 팔자인 거지.’
그러나 문수르는 순간 의문이 들었다.
“처음으로 마을로 돌아간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게…….”
그때부터 마우로우가 베드릭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