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문수르는 며칠의 기간을 둔 뒤 다시 고구마 수확을 위한 병사 차출을 위해 다시금 연무장을 찾았다.
그런 그가 연무장에 등장했을 때.
‘문수르 경이다.’
‘대체 무슨 일로…… 혹시?’
훈련을 받던 병사들과 그 훈련을 지휘하던 기사들의 눈빛이 문수르를 보자마자 갑작스레 달라졌다. 그들은 문수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문수르는 그런 그들의 시선에 어안이 벙벙했다.
‘뭐지?’
이제르트 자작령에 온 이후로 느껴보는 시선 중 가장 강렬한 시선이었다. 문수르도 긴장할 정도로 말이다.
“무슨 일 있습니까?”
문수르가 이 시선의 배경에 대해서 말을 꺼내자.
“문수르 경, 무슨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기사 중 한 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했다. 문수르는 그 기사의 기세에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뭐야?’
문수르가 주춤할 정도의 기세를 품는 기사의 눈에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불꽃이 철렁였다.
“아, 다름 아니라 오늘도 수확을 위해서 병사들을 좀 차출하려고…….”
이윽고 나온 문수르의 대답.
잠시 침묵이 깔렸다. 문수르는 긴장했다.
‘내가 뭐 잘못했나?’
그 순간……!
“제가 가겠습니다!”
“저를 뽑아주십시오!”
병사들 중 용기 있는 몇 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를 내질렀다. 연무장이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어?’
사실 그건 보통 용기 있는 행위가 아니었다. 기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그렇게 독단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가 운이 나쁘면 군기가 빠졌다는 이유로 크게 혼이 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다행히도 그들의 행동은 용기로 받아들여졌다.
“아, 지원자가 있군요.”
문수르 입장에서는 굳이 그 힘든 일을 나서서 해주겠다는 그걸 막을 이유가 없었다.
“잠깐!”
그때였다.
기사 한 명이 문수르에게 간택당한 병사를 향해 찌릿! 눈빛을 보냈다. 병사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젠장, 나 찍힌 건가?’
병사는 겁을 먹고 갑작스레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분위기는 험악하게 변했다.
그 분위기 속에서 병사를 째려봤던 기사는 문수르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문수르 경.”
분위기가 너무 진지하고, 무거운 탓에 문수르 역시 기사의 그 말을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문수르 역시 귀를 기울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살짝 긴장도 됐다.
이윽고 기사가 입을 열었다.
“내가 가겠소.”
“예?”
“……그러니까 내가 도와드리겠소.”
기사의 갑작스런 말에 문수르는 그저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이게 뭐지?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그러니까 지금 준귀족에 해당하는 기사가 병사들도 꺼려하는 밭일을 직접 나서서 해주겠다고?
“정말이십니까?”
문수르는 재차 물었다. 기사 역시 자신이 하는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인지 아는 듯.
“크흠.”
헛기침 한 번 내뱉은 후에.
“물론 진심이오. 영지를 위해 하는 일인데 일말의 부끄러움은 없다오.”
애써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그런 기사의 뒤에서는 다른 기사들이 비슷한 헛기침을 했다.
“크흠, 영지의 일인데 기사가 모범을 보여지.”
“아무렴. 크흠, 크흠.”
문수르는 그런 기사들의 모습에 머리를 긁적였다.
‘다들 미친 건가?’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오오!”
“정말 대단한 맛이군. 이런 게 이렇게도 많단 말인가?”
“병사들이 한 말대로 맥주 한 모금을 같이 먹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군.”
고구마를 맛본 기사들은 그 맛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기사들에게마저 검증 받은 것이다.
그 광경을 본 문수르는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먹힌다.’
병사들 반응 때와 이제르트 자작의 반응 때도 느낀 거지만, 문수르가 가져온 고구마의 위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 위력은 그 이후에도 나타났다.
문수르는 아예 고구마 수확 계획을 짰고, 그 계획에 맞춰 연무장을 찾았다. 문수르가 연무장에 등장하는 시기는 불규칙했다. 때문에 문수르가 연무장에 등장하는 날, 병사들은 어떻게든 문수르에게 차출되기 위해서 발악을 했다.
심지어 개중 몇몇 병사들은 무례를 무릅쓰고 직접 문수르의 저택을 찾아오기까지 했다.
저택을 찾아온 이유야 뻔했다.
“저기…… 이거 별 거 아닙니다만…….”
“이게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정력에는 최고입니다. 그러니까 내일 밭일을 가실 때 저를…….”
뇌물까지 바치기 시작한 것이다.
문수르는 그 광경이 참으로 우습기도 하면서, 안쓰럽기도 했다.
‘세상에나, 고구마 하나 때문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나올 수도 있는 건가?’
고작 별 거 아닌 고구마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비굴해지다니?
‘쩝…… 차라리 이럴 바에는 불스 백작가에 고구마를 대접할 걸.’
한편으로는 불스 백작가에서 요리랍시고 화학조미료 스프를 줄 바에는 고구마를 주는 게 훨씬 잘 먹혔을 것 같았을 거란 생각이 들자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혹시 모르니까 사람을 시켜서 불스 백작가에 고구마 좀 보내자. 권력자에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잖아?’
그리고는 아예 작정하고 사람을 시켜 불스 백작가에 고구마와 함께 먹는 방법을 적힌 편지도 보냈다. 어쨌거나 5만 골드나 빌려준 양반인데 명절에 큰 선물을 못하더라도 이 정도는 보여줘야지.
물론 그때 문수르는 몰랐다. 그저 잘 보이기만 하면 좋겠구나, 하는 마음에 시작했던 그 일이 문수르의 미래를 바꾸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하튼 문수르의 고구마를 어떻게든 캐기 위해 병사들은 악착 같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개중에서 이미 수확한 고구마를 훔치려고 하는 이들은 없었다. 문수르가 수확한 고구마는 어디까지나 이제르트 자작이 문수르가 준 땅에서 수확한 문수르의 재산이었으니까. 그걸 건드린다는 건 문수르의 재산을 건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그런 짓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고구마를 먹기 위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이제르트 자작령의 다른 영지민들도 그 소문을 듣기 시작했을 때.
‘옳거니!’
문수르는 그것이 절호의 기회임을 직감했다.
‘생각보다 고구마가 잘 먹힌다.’
이 기회를 그냥 보고 즐기기에는 너무 아깝다. 열정이란 건 쉽게 피어오르는 게 아니다.
‘이 고구마는 겨울에도 충분히 수확이 가능하다. 거기에 고구마 순도 이미 따로 수확해뒀다. 지금 당장 이 고구마 순도 처치하지 못하면 그냥 거름만 되는 꼴!’
옛말엔 이런 말이 있다. 고기를 낚아주기보다는 고기를 낚는 방법을 알려주라고 했다.
언젠가는 영지 내 농민들에게 고구마 재배법을 알려줘야 한다. 물론 쉽게 생각하면 전혀 문제될 게 없어 보인다. 맛도 있고, 재배도 쉽고, 겨울에도 재배가 가능한 작물을 재배하지 않을 농민이 있을까?
하지만 사실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고구마 맛의 유무를 떠나서, 농사를 짓는 영지민에게 농사는 곧 삶과 직결된다. 그들은 평생을 보리나 밀 따위의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괴상한 작물을 재배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마음처럼 쉽지 않다. 혹여 농사를 망치기라도 하면, 그것은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가뜩이나 혹독한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그런 모험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터.
할 수 있는 건 영주인 이제르트 자작이 강제로 명령을 내리는 거지만, 솔직히 자발적으로 하는 것과 강제로 하는 것에 차이가 없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영지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들은 궁금해서라도 고구마 재배를 시도할 것이다. 몇 가지 세금적인 정책과 보조를 해준다면, 어쩌면 겨울 내내 고구마 재배만 하느라 겨울이 지나가는 지도 모를 것이다.
문수르는 계획을 세우자마자 곧장 움직였다.
“이제부터 겨울 동안은 고구마란 작물을 주력으로 재배할 겁니다.”
문수르는 자신의 계획을 이제르트 자작에게 설명했다.
“음, 좋은 방법이네.”
이제르트 자작은 문수르의 계획에 반대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겨울 내 작물을 재배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파격이었다. 보통 겨울이나 봄은 배를 굶는 계절이었으니까.
또한 이제르트 자작이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제 아무리 문수르의 명성이 높다고 해도 이제르트 자작령의 주인은 곧 이제르트 자작인 법. 그가 나서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았다.
덕분에 그에 대한 작업은 빠르게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각 마을에서 사람들이 와 고구마 순과 함께 일정량의 고구마와 고구마 재배법을 배우고 돌아갔다.
만약 잘만 된다면 겨울 내 식량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어질지도 몰랐다.
‘이것으로 겨울 내 식량 걱정은 어느 정도 해결됐다.’
가장 큰 문제였던 식량 문제가 해결된 셈이다. 그렇다면 조금도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다.
두 번째로 시급했던 일을 처리할 때가 온 것이다.
“드워프를 찾아야 한다.”
두 번째로 시급한 일.
그건 바로 문수르가 가진 무수히 많은 기술을 현실에 구현해줄 장인인 드워프를 구하는 일이었다.
5.
기가스의 새로운 부품이 도착했다. 포비어는 그 부품이 도착하기 전날 잠도 자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영지 사정이 너무 좋지 못해, 원하는 부품이 있어도 감히 사달라는 소리를 하지 못했으니까. 언제나 기가스 안에 탑승하는 포비어에게 새로운 부품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반가운 것이었다.
그리고 부품 교체 날, 포비어의 곁에는 문수르가 함께 했다. 이제 기가스의 구조에 대해 완벽하게 꿰뚫고 있는 문수르였지만, 지식으로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는 법. 문수르는 어떻게든 기가스에 대한 많은 경험을 쌓고 싶어 했다.
그렇게 포비어와 문수르가 기가스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무렵.
“역시 부품은 드워프제가 제일 좋습니다. 똑같은 부품이라고 해도 드워프가 만든 건 일단 가격이 다르지요. 곱절 이상의 차이가 나는 경우도 다반사니까요.”
“드워프제 부품이 그렇게 비쌉니까?”
“비싼 정도가 아니라, 돈을 주고도 쉽게 구하지 못합니다. 대부분 주문제작으로 이루어지니까요.”
“주문 제작이라…… 그럼 보통 어디에 주문합니까?”
“음…… 일단 드워프제 부품은 두 가지 루트로 나온다고 보시면 됩니다. 공식 루트는 바로 칼란 왕국제입니다.”
칼란 왕국.
대륙에서 유일하게 드워프와 엘프를 자국민으로 인정한 나라였다. 국토 대부분이 험한 산지인 탓에 국가 내에 이미 일찌감치 드워프와 엘프의 숫자가 많았고, 적은 농지로 인한 식량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일찌감치 농업보다는 가공업을 주력으로 삼았다.
“드워프를 국민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당연히 칼란 왕국에서는 공식적으로 드워프제 부품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칼란 왕국의 드워프제 부품을 사는 이들은 10명 중 1명도 안 됩니다.”
“구하기 힘들어서 그런 겁니까?”
“그게 아니라 비싸서 그럽니다. 아무래도 칼란 왕국은 드워프의 권리도 인정해야 하고 이런저런 세금이 붙어서 부품의 가격이 뛸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보통 사람들은 드워프 노예를 이용해 만든 부품을 사용합니다. 이쪽이 훨씬 저렴하니까요.”
“그렇군요.”
그러나 그런 칼란 왕국이 드워프제 부품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애초에 드워프가 칼란 왕국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대륙 곳곳에서 드워프를 노예로 부리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드워프 노예를 통해 만든 드워프제 부품이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여기서 문수르는 궁금증 하나를 물어봤다.
“보통 노예시장에선 드워프의 몸값은 얼마쯤 합니까?”
어떻게든 드워프를 구하고 싶은 문수르 입장에서 가장 드워프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역시 노예시장이다.
문제는 돈이다.
적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질문에 포비어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해줬다.
“아마도 1만 골드쯤은 할 겁니다. 정확한 건 아닙니다.”
“1만 골드?”
문수르는 기겁했다.
이제르트 자작령은 5만 골드만 있어도 1년을 나름 알뜰하게 버틸 수 있는데, 그 돈이 고작 드워프 장인 다섯 명의 몸값이란 말인가?
“그런데 1만 골드라는 몸값도 사실 최저 가격입니다. 요즘 같은 경우에는…… 잘 아시겠지만 기술 유출 등을 이유로 기가스의 부품을 만들 줄 아는 드워프를 노예시장에 내놓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때문에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기가스의 시대가 온 이후로 각국은 보다 발전된 기가스를 보유하기 위해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이 과정에서 드워프의 존재가치도 올라갔다. 마법사들이 만든 기술력을 현실에서 직접 구현할 수 있는 뛰어난 장인들 대부분은 드워프 밖에 없었으니까.
자연스럽게 각국이 숨기고 있는 매우 중요간 기가스 관련 기술을 드워프들이 습득하게 됐고, 이런 드워프들의 유출을 막기 위해 일부 국가에서는 드워프의 노예 거래 자체를 막는 경우까지 생겼다.
때문에 현실적으로 노예시장에서 제대로 된 드워프 장인을 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다.
‘역시 직접 발로 뛰면서 찾는 수밖에 없는 건가?’
직접 찾는 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란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문수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던졌다.
“드워프를 직접 찾는 건 어렵습니까?”
“하하, 그게 쉬웠다면 이 세상에 드워프를 1만 골드나 주고 사는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그래도 뭐, 방법 같은 건 있지 않겠습니까? 드워프를 잡으려면 이러이러해야 한다, 하는 방법 같은 것.”
“음…….”
잠시 고민하던 포비어. 사실 다른 이가 이런 질문을 했다면 그냥 농담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문수르는 다르다. 그가 하는 말은 우스꽝스럽고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들려도, 그가 내놓는 결과는 신비롭고, 경악스러운 것들뿐이다. 때문에 포비어는 어떻게든 진지하게, 어떻게든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포비어는 추측성 대답이 아닌, 대답을 해줄 만한 사람을 말해줬다.
“정확한 이야기는 아마도 용병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용병들에게 있어 드워프는…… 인생을 바꿀 사냥감이니까요.”
============================ 작품 후기 ============================
내일부터는 새로운 챕터가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