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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맨-48화 (48/293)

48화

“자, 여기까지.”

문수르는 미친 듯이 고구마를 캐느라 정신이 없던 병사들에게 그만하라는 말을 했다.

털썩, 풀썩!

그 말에 병사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마치 쓰러지듯 땅 바닥 위에 주저앉았다.

허억, 허억, 하악, 하악.

바닥에 주저앉은 병사들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거친 숨이 튀어나왔다. 병사들이 내뱉는 하얀 입김이 마치 구름처럼 보일 정도였다. 심지어 이 추운 날씨에 땀범벅이 된 병사들의 몸과 머리 끝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으아…… 죽을 뻔했네.”

“이제 다 끝난 건가?”

“끝난 거겠지…… 이제 하라고 해도 못할 것 같아.”

지친 병사들이 저마다 푸념을 뱉을 무렵. 머리에서는 김이 피어올랐지만, 누군가는 오돌오돌 떨기 시작했다. 아무리 땀범벅이 되었다고 해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니, 몸이 빠르게 식기 시작했다. 아니, 땀범벅이 됐기에 몸이 더 빠르게 식는 것이겠지.

“땀 흘리고 그대로 있으면 감기 걸립니다. 불이나 쬐십시오.”

그런 그들을 위해 문수르는 어느새 모닥불을 피워놓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병사들 중 일부가 저체온증에 빠질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기력도 없는데 체온도 내려가면 어?! 하는 사이에 꼴까닥 죽어버릴 수도 있다. 고구마 캐다가 죽었다는 건 너무 슬프지 않은가?

병사들은 잽싸게 문수르가 피워놓은 모닥불에 둘러앉았다. 모닥불은 한 개가 아니었다.

“넌 그쪽으로 가라.”

“으으, 따뜻하다…….”

문수르가 피어놓은 모닥불은 여덟 개였다. 애초에 고구마 수확을 위해 차출한 병사가 수십여 명이다. 모닥불 한두 개로 그들의 몸을 녹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모두가 모닥불 근처에서 몸을 녹이기 시작했을 때.

문수르는 그들 무리의 중심에서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별 다른 사심이 없는…… 말 그대로 고맙다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그런 문수르의 모습에 두 눈을 크게 뜨며 기겁하기 시작했다.

“아,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점차 커지는 병사들의 목소리.

“정말 괜찮습니다아아아악!”

나중에는 악을 쓰며 괜찮다고 말하는 이까지 나왔다.

씨익!

문수르는 그런 그들을 보며 순간 묘한 미소를 지었다. 누가 보면 참으로 음흉하게 보일 미소였다.

“그럼 일 좀 더 해도 되겠습니까?”

“그, 그건!”

기세 좋던 병사들의 목소리가 단숨에 죽어가기 시작했다. 정말 이번에 고구마를 캐는 과정에서 병사들은 평소 훈련 때보다 더 열심히 했다. 어떻게든 문수르 앞에서 흠 잡히지 않기 위해서, 잘 보이기 위해서 말이다.

이제 죽을 힘도 없을 정도다.

“장난입니다.”

“하하, 하하하…….”

“문수르 경께서는 농담도 참 잘하십니다. 하하하…….”

울려 펴지는 어색한 웃음소리. 문수르는 그런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갑작스레 피어오르는 그 감정.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건 다름 아니라 연민의 감정이었다.

웃고 떠들며, 세상 좋게 살아가는 자들. 이렇게 보면 어스 월드의 사람들과 다를 거 없어 보인다.

사람 자체가 다를 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처한 환경은 다르다.

이들은 당장 내일의 삶을 보장 받지 못한다. 어스 월드에서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지만, 케르빈 월드에 비하면 그곳은 천국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때문에 문수르는 병사들이 안쓰러웠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지.’

저들 목숨이 문수르의 손에 달려 있다. 물론 사사로운 감정을 품는 것으로 대사를 망치려는 건 아니다.

단지 도와줄 수 있을 때, 여력이 될 때는 최대한 도와주고 싶었다.

“그건 그렇고 다들 식사는 하셨습니까?”

문수르가 물었을 때.

꼬르륵!

대답 대신에 들려온 건 뱃속의 아귀가 절규를 내뱉는 소리였다. 비단 어느 한 명의 소리가 아니었다.

꼬르륵, 꾸르륵!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이곳저곳에서 배고픔의 증거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배가 고프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가뜩이나 겨울이 시작되면서 식량소모를 줄이기 위해 먹는 양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그뿐인가? 언제나 훈련을 받고, 방금 전에도 온힘을 다해 일을 했던 병사들이다. 소 한 마리쯤은 우습게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사내들인데 먹지도 못하고 훈련만 하니, 언제나 배고픈 게 그들이다.

“괘,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끄떡없습니다.”

물론 병사들 중에서는 제 입으로 배고프다는 소리를 하는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문수르는 선물을 주기로 했다.

“모닥불을 살펴보면 무언가가 있을 겁니다.”

문수르의 말에 병사들이 허겁지겁 모닥불 이곳저곳을 장작으로 쑤셔 보았다. 확실히 장작 외에 무언가가 있었다.

문수르 역시 자신의 앞에 있는 모닥불에서 그 무언가를 콕 집은 후에 끄집어냈다.

문수르가 꺼낸 것은 다름 아니라…….

“이게 오늘 여러 분들이 수확한 고구마란 겁니다.”

“예?”

고구마였다. 문수르는 수확한 고구마의 일부를 모닥불에 같이 넣어두었던 것이다.

고구마는 잘 익었다. 탄 부분도 없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탐스럽게 보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 그걸 보고 침을 삼키는 이들은 없었다. 고구마가 뭔지도 모르는 자들이다. 뭔가 노르스름한 게 있긴 한데 이게 먹는 건지 바르는 건지 구분도 못할 것이다.

문수르는 그들 앞에서 시범을 보였다.

“먹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껍질을 벗긴 다음에 그 안에 익은 속살을 먹으면 됩니다. 이렇게요.”

덥석!

고구마를 한 입 무는 문수르.

사실상 문수르 역시 케르빈 월드에서 처음으로 고구마를 먹어보는 순간이었다.

‘우아.’

그리고 문수르는 감탄했다.

‘끝내주네?’

맛있다.

허기가 반찬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이번에 재배된 고구마는 정말 맛이 끝내줬다. 오히려 어스 월드의 고구마가 가소롭게 보일 정도로, 단맛과 고구마 특유의 맛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조합을 이루었다.

그런 문수르의 반응에 병사 몇 명이 잽싸게 고구마를 꺼낸 후에 조심스럽게 껍질을 벗겼다.

“아, 뜨거!”

“으어어…….”

누군가는 뜨거운 고구마에 놀랐고, 누군가는 다짜고짜 고구마를 입에 넣었다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우걱우걱우걱!

대화는 없었다. 감탄사? 그딴 게 있을 리가 없다. 모두가 미친 듯이 고구마를 먹기 시작했다.

혹여 덜 먹을까봐 혹은 옆에 있는 놈이 다 먹을까봐, 맛을 음미할 시간도 없이 장작 속에 고구마를 어떻게든 끄집어낸 다음에 껍질이 달라붙은 고구마를 입에 넣었다.

문수르는 그들을 말없이 지켜만 봤다. 그러나 그 누구도 문수르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사실 케르빈 월드에서는 단 것을 맛보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주식으로 먹는 스프나 빵 따위는 맛으로 먹는다기보다는 그냥 배고프니까 먹는 수준이다. 과일 정도가 단 음식의 정도인데, 사실 그 과일이란 것도 어스 월드에 비하면 풋내가 절로 나는 것들이다. 문수르는 정말 입에 넣지도 못할 정도의 것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문수르가 놀랄 정도의 맛을 지닌 고구마는 신의 음식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화학조미료 때와는 이야기가 다르다. 인공적으로 사람의 혀를 유린시키는 맛과 순수하게 자연에서 만들어진 맛의 차이점은 혀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으니까.

문수르는 제법 많은 고구마를 장작불에 넣어두었지만, 그런 고구마들은 금방 자취를 감추었다.

몇 명은 그 사실도 모른 채 장작을 고구마인줄 알고 먹으려고 했다가 기겁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났을 때.

“야야, 정신 차려 인마.”

“야! 문수르 경 앞이야!”

그제야 병사들은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 자리가 단순히 자기들이 먹고 떠드는 자리가 아니라, 영지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라 할 수 있는 문수르의 앞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지금 문수르 앞에서 먹을 것에 눈이 팔려 예의는커녕 그 어떤 질서도 없이 처먹기만 했다.

침묵이 깔리기 시작했다.

꿀꺽!

누군가는 긴장감에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문수르는 그런 그들을 조용히 보며 말했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조금은 가라앉은 문수르의 어조에 병사들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린 죽었다…….’

“모두들 잘 드셨습니까?”

그런 그들에게 문수르의 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아냥거림처럼 들렸다.

그래, 이 돼지 새끼들아 나 같은 건 무시하고 잘들 처먹었냐?

이렇게 들렸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문수르는 그런 병사들을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잘 먹었으면 이제 고구마나 옮깁시다. 다들 배부르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지요?”

그 순간 병사들이 목숨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할 수 있습니다!”

이제르트 자작령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4.

수확한 고구마를 미리 마련해둔 창고로 옮긴 후에 그중 몇 개를 구운 문수르는 그것들을 이제르트 자작에게 가져다주었다. 이제르트 자작은 처음 보는 노르스름한 뭉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문수르 경, 이게 무언가?”

“고구마란 겁니다. 제가 최근 수확하던 것이죠.”

“음.”

문수르가 이미 이제르트 자작령 곳곳에서 무언가를 재배한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다. 직접 일을 돕기 위해 이제르트 자작 휘하의 농노들을 보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무엇을 재배하는지는 정확히 몰랐다.

오늘 그 정체를 알 수 있는 날이다.

“문수르 경의 세계에서는 이런 걸 먹나보지?”

“뭐, 이거 말고도 이것저것 많이 먹습니다.”

이제르트 자작은 긴 말 대신 일단 한 번 먹어봤다. 그리고 고구마를 한 입 먹자마자 이제르트 자작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고구마의 맛은 상상 이상이었다.

“괴, 굉장히 맛있군.”

이런 음식은 처음이다.

“이렇게 맛있는 걸 보면, 매우 고급스런 음식인가보군. 귀한 음식을 줘서 감사하네.”

“아닙니다. 그렇게 귀한 음식은 아닙니다.”

“음?”

“조만간 이제르트 자작령의 주요 재배 작물이 될 겁니다. 어쩌면 주력 작물이 될지도 모르지요.”

문수르는 일단 밀을 주력 작물로 재배하려고 했지만 고구마의 성장 속도가 워낙 빠르고, 대단해서 고구마를 주력 작물로 재배할까, 하며, 진지하게 고민 중이었다.

이제르트 자작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주력 작물이라면 내 영지에서는 모두가 이걸 먹는다는 소리인가?”

“그렇지요.”

“허!”

귀족이지만 영지 사정으로 먹을 것에 조금의 사치도 부리지 못하는 이제르트 자작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걸 매일 당연하게 먹는다고?

“사실 생각보다 금방 물립니다. 때문에 여러 가지 요리법을 만들어 영지민들에게 알려주면 큰 반발은 없을 겁니다.”

사실 문수르가 걱정하는 부분은 고구마만 먹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부분이었다. 때문에 어떻게든 고구마를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도록 요리법을 보급하는 것 역시 주요 과제로 삼고 있었다.

“그럴 일은 없네. 만날 먹으라고 하면, 평생 먹을 수도 있을 것 같네. 나라고 해도 말일세.”

“그렇습니까?”

“물론일세. 음…… 그건 그렇고 정말 맛있군.”

이제르트 자작은 대화를 하면서도 연신 고구마를 입에 넣었다.

‘달달한 게 많이 땡기시나 보네?’

문수르는 그런 이제르트 자작을 보며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그 시각 이제르트 자작가에는 엄청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장난이 아니었다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천상의 맛이라고 해야 할까?”

“난 그걸 먹을 수 있다면 당자 오크 열 마리랑 싸우라고 해도 싸울 수 있을 것 같아.”

“진짜 거기에 맥주 한 잔 곁들이면 난 당장 죽어도 후회가 없을 것 같다. 진짜 만약 내가 죽어 가면 다른 건 필요 없고 내 입에 그걸 넣어주면 내가 죽어서도 도와준다.”

병사들의 그런 말에 다른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니, 대체 그게 뭔데?

“대체 너희들이 먹은 게 뭐야?”

그 말에 병사들은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대답했다.

“고구마.”

이제르트 자작가의 겨울을 지배할 고구마 전설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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