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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맨-47화 (47/293)

47화

3.

헤인은 엄청난 속도로 문수르가 가르쳐준 의술을 습득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의 기사경력도 큰 도움이 됐지만, 결정적인 건 문수르의 상상 이상으로 헤인에게는 의술에 대한 재능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아무리 재능이 좋아도 의사의 실력이란 건 결국 다수의 경험, 많은 사례를 통해서 성장하기 마련이다. 재능에 따라 성장할 수 있는 폭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헤인은 의외로 그런 사례를 많이 경험해 본 인물이었다. 성격 좋은 헤인은 다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특히 전장에서 부상병이 생겼을 때 혹은 기사가 다쳤을 때 가장 먼저 나서는 인물이 바로 헤인 경이었다.

자연스럽게 응급치료법을 익히게 되고, 사람이 어떤 상처에 따라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체계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많은 사례를 보고 경험하며 그 느낌을 알게 됐다.

그렇게 해서 축적된 경험. 그러나 헤인이 가진 장점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피 튀기는 전장을 누비면서, 온갖 이들의 시체를 보고 또한 스스로 시체를 만들기도 해봤다. 몬스터만 죽인 게 아니다. 사람도 죽여 봤으며, 사람의 몸뚱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해부는 아니더라도 어디를 찌르면 금방 죽고, 어디를 찌르면 의외로 잘 안 죽는지 그런 것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생긴 신체 구조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여기에 뛰어난 재능과 그 재능조차 압도해버릴 정도의 열정까지 어우러졌으니, 헤인의 의술이 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헤인이 점점 의료키트의 사용법에 능숙해지고, 그 의료키트의 도구들을 이용해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횟수가 쌓이기 시작하자 어느 순간부터는 힐링 마법사를 따로 부를 필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두루뭉술한 힐링 마법사의 치료보다는 헤인의 치료가 더 나을 때도 있었다. 힐링 마법이란 게 만능이 아니라서, 오히려 힐링 마법의 치료 이후 상처는 치료됐는데 신경이 마비되거나 혹은 의문 모를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쯤 되니, 헤인 경은 어느 새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성자 비슷한 취급까지 받기 시작했다.

그런 헤인이 부상자들을 치료할 때마다 언제나 하는 말이 하나 있었다.

“자네가 무사한 건 문수르 경, 그분 덕분이네. 나에게 감사하지 말고 그분에게 감사하게.”

헤인은 모든 공을 문수르에게 돌렸고, 언제나 문수르에게 감사하라는 말을 했다.

그 이후 문수르의 행보는?

불스 백작과 담판을 짓고, 이제르트 자작령에 엄청난 풍요로움을 가져왔다. 병사와 용병들은 문수르 덕분에 밀린 일당과 봉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이전에도 문수르는 이미 나름 전설이었다. 수백 마리의 오크를 단신으로 막은 이야기, 영지 최강의 기사인 포비어 경을 상대로 오히려 실력으로 압도하던 이야기, 그 누구도 고치지 못했던 이리아 아가씨를 단숨에 고쳐낸 이야기까지!

헤인이 성자 대우를 받았다면, 문수르는 그런 헤인을 성자로 만들어주는 신(神) 취급까지 받았다.

‘허, 거참.’

문수르는 자신의 뒤를 마치 어미 오리를 쫓는 새끼 오리마냥 따라오며 눈빛을 빛내는 병사들을 보며 기분이 묘해지는 걸 느꼈다.

‘나야 뭐 내 말 재깍재깍 들어주면 고맙다만, 이러 식으로 일이 처리될 줄은 몰랐는데.’

물론 문수르 입장에선 나쁠 건 없다. 신격화 비슷하게 된다는 건 그들을 다루기 더 쉬워진다는 의미니까.

그래도 이렇게 일이 풀리니 어처구니가 없긴 하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문수르는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어느새 병사들은 문수르의 밭에 도착했다. 밭은 넓었다.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넘치는 게 땅이었으니까.

고구마 밭을 본 병사들의 표정은 어리둥절했다. 그들 입장에서 고구마 밭은 그냥 이상한 풀뿌리가 자라난 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일각에서는 생각했다.

‘우리보고 풀 뽑기라도 시키려는 건가?’

병사들이 어리둥절할 무렵.

“잘 보세요.”

문수르가 병사들을 모으고 말했다. 병사들은 마치 현세에 등장한 신 앞에서 가르침을 받는 경건한 자세로 문수르의 말을 경청했다.

‘이거 관심이 너무 심하네.’

살짝 부담감을 느낀 문수르.

그래도 설명은 계속됐다.

“일단 작업을 할 때 땅 위에 난 풀뿌리를 잘 자르십시오.”

고구마 순은 곧 모종으로 사용된다. 보통 이렇게 추운 겨울이면 모종으로 쓸 바에는 그냥 요리해서 먹는 게 낫겠지만 로이드의 계산에 따르면 겨울 중에도 충분히 수확이 가능하단다. 그 정도로 문수르가 가져온 슈퍼 고구마는 무식하게 강했다. 겨울에 내린 눈을 씹어먹어 자랄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면 고구마 순도 잘 정리해서 다시 모종으로 심는 게 이득일 터.

때문에 문수르는 고구마 수확과 함께 고구마 순 역시 수확하고자 했다.

“이 풀뿌리는 잘 관리하세요. 나중에 이걸 따로 모아서 땅에 심을 겁니다. 일단은 그게 1차 작업입니다.”

문수르가 몇 가지 시범을 보여줬다.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기에 병사들은 금방 익혔다. 낫을 쓰는 데에도 큰 문제는 없었다. 검을 제 몸처럼 쓰는 훈련을 받던 검사들이다. 날붙이를 쓰다가 다칠 정도로 미숙한 이는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버틸 수 없다. 금방 몬스터 밥이 될 테니까.

작업은 빠르게 진행됐다. 하지만 문수르는 하루아침에 밭 전부에서 수확할 생각이 없었다.

‘며칠은 걸리는 일이지.’

심은 고구마의 양이 보통이 아니다. 문수르가 시간이 날 때마다 내키는 대로 땅이 있으면 모종을 심고, 문수르가 없을 때는 다른 농노를 시켜 작업을 진행시켰다. 농노들이야 이게 뭐하는 짓이야, 하는 생각은 했지만 문수르가 시키는 명령 앞에서

“왜 이런 이상한 걸 우리가 해야 되는 겁니까?”

라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농노들은 목숨을 걸고 일을 했다. 문수르의 명성이 점점 높아질수록 농노들은 더 필사적으로 변했다.

‘뭐 잘 됐지. 일단 한 번 수확하고 난 뒤에 겨울에 또 수확하면 식량 걱정은 없을 테니까.’

밭은 너무 넓었다. 병사들이 열심히 해도 밭의 극히 일부만이 적갈색의 흙빛을 드러낼 뿐이었다.

문수르는 거기서 병사들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문수르가 다시 병사를 모았다. 겨울임에도 병사들은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문수르가 시킨 탓에 그들 역시 목숨을 걸고 작업을 한 것이다. 진짜 힘이 다 빠질 정도로.

문수르는 그들에게 따로 주문해서 만든 호미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제는 땅을 파서 이걸 꺼내는 겁니다.”

문수르는 말과 함께 호미로 땅을 적당히 파헤친 후에 땅에서 무언가를 뽑았다.

부왁!

그렇게 문수르가 뽑아낸 것은 당연히 고구마였다.

당연히 고구마였는데…….

“헉!”

뽑은 문수르는 기겁했다.

‘이게 고구마가 맞아? 무슨 고구마가 사람 팔뚝만하냐?’

사람 팔뚝만한 고구가 여러 개가 줄줄이 매달려 있는 광경은 신비롭다 못해 괴기스러울 정도였다.

문수르도 잘 자란다고만 생각했지 설마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놀랐다.

병사들은 더 놀랐다.

‘땅에 저런 게 박혀 있었다니?’

‘뭐지? 새로운 무기인가?’

병사들 중 그 누구도 감히 그걸 먹을 수 있는 것, 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어…… 음…… 이걸 뽑으면 됩니다.”

이내 문수르가 적당히 얼버무리며 상황을 정리했다. 병사들은 그런 문수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명인데 불만을 가질까? 하라면 하고, 까라면 까야지!

하지만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어? 이게 왜 안 뽑히지?”

“땅을 좀 더 파야 뽑힐 거 같은데…….”

“너무 깊이 박혀있어. 그냥 뽑으려고 하면 안 돼. 이건…….”

문수르는 한 손으로 쑥 뽑았던 고구마. 하지만 문수르가 보통 인간인가? 그도 모르는 사이 이미 온몸 곳곳에 마나가 깃들어 이제 오러 나이트 중에서도 최고 경지에 다다른 문수르다. 조만간 깨달음만 얻으면 곧바로 오러 마스터가 될 수 있는 수준!

아무리 열심히 훈련을 받는 병사들이라고 해도, 병사들의 힘이 문수르의 그런 힘에 비교될 리 만무했다.

말 그대로 고구마를 캐는 작업은 극심한 노동이었다.

문수르는 그 광경을 보며 눈빛을 빛냈다.

‘이게 의외로 훈련 되겠는데?’

나름 단련된 병사들이 이렇게까지 고욕을 치르는 걸 보니, 의외로 훈련에 써먹으면 효과가 있을 것 같다.

가만 생각하면 케르빈 월드에는 병사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경우가 없다.

쉽게 말해서 둔전제가 없는 것이다. 물론 성벽이 무너지거나 아주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일시적으로 병사를 투입하기는 하지만, 애초에 농사를 짓는 행위 자체가 하대 받는 행위였다.

반면 병사는 나름 영지에서 대우를 받는 위치다. 귀족은 아니지만, 힘을 가진 위치. 그런 병사들을 농사에 투입한다는 건 일반적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나마 이제르트 자작령은 워낙 상황이 나쁜 탓에 병사들이 수확을 돕거나 반대로 농사만 하던 이들이 병사가 되는 경우가 잦았지만 아예 전문적으로 농사에 투입하는 경우는 없었다.

‘시간이 남아돌 때 팔팔한 병사란 인력을 그냥 놔두는 건 엄청난 손해지.’

훗날 문수르는 케르빈 월드에서 최초로 둔전제란 개념을 제도적으로 사용했고, 이후 병사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처먹게 되지만 어디까지나 미래의 이야기.

“자자, 빨리빨리 합시다.”

힘들다고 어영부영 몸을 사리는 병사들을 보며 문수르는 일부러 그들을 재촉했다.

“아, 알겠습니다.”

“야! 빨리 파! 더 깊게 파라고!”

“젠장, 죽을 힘을 다해 뽑아! 못 뽑으면 그냥 죽어라!”

“이건 오크 목이다. 이건 오크 목이야, 이대로 그냥 뽑아버려!”

문수르의 재촉에 병사들은 기겁하며 악착 같이 힘을 쓰기 시작했다. 문수르는 그들을 보며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본래는 그 역시 작업에 참가하려고 했지만 이 좋은 훈련방법을 굳이 자신이 나서서 축소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 그냥 주인님 편하자고 하는 거 아닙니까?

로이드가 당연히 태클을 걸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 주인님은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나 원래 뻔뻔한 인간이야.’

하지만 이제 나름 뻔뻔해진 문수르.

- 그런 의미에서 훈련 매뉴얼을 새로이 바꾸겠습니다.

‘뭐?’

- 훈련 매뉴얼을 지키지 않을 시에는 그 모든 기록이 한석균 회장님에게 보고됩니다.

‘야!’

그러나 로이드는 그런 문수르보다 한 수 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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