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6.
“대화는 잘 나누셨습니까?”
김자운의 물음에 문수는 표정을 구겼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대화자체가 안 되더군요.”
“예?”
“솔직히 말하죠. 주정희 감독, 이 사람은 보통 꼴통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야구계에서 왕따를 당하는 게 납득이 갑니다. 말이 통하고 자시고, 과연 친구라도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 정도였습니까?”
“심각한 수준입니다.”
그 말에 김자운 역시 문수의 말 따라 심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상 박문수가 싫다고 하면, 제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포기해야 된다. 그런데 문수가 저렇게까지 악평을 하면…… 이쯤 되면 문수 스스로가 먼저 다른 방향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차라리 다른 감독을 선임할까?’
솔직히 한국 야구계가 아무리 좁고, 작다고 해도 감독이 될 만한 인물이 주정희 한 명은 절대 아니다.
뒤져보면 나름 명장 소리 듣는 감독은 얼마든지 있다. 승부의 귀재, 리빌딩의 귀재부터 시작해서 아부의 귀재까지! 아이스크림만큼이나 다양한 종류의 감독들이 야인으로 활동 중이다.
더군다나 야구단 창단하는 건 문수가 거의 취미 삼아 시작한 일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런 일을 가지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안 하니만 못한 결과물이 될 터.
“다른 감독을 알아볼까요?”
김자운 역시 문수와 생각이 비슷했다. 사실상 문수 좋으라고 하는 일인데, 문수의 심기가 뒤틀리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 순간 문수는 한 번 더 고민했다. 정말 다른 감독을 찾는 게 나은 방법일까?
이내 문수의 시선이 김자운을 향했다.
‘왜 이 사람은 내게 가장 먼저 주정희란 인물을 소개시켜준 걸까?’
김자운, 그는 유능한 자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다. 그런 그가 가장 먼저 소개시켜준 감독 후보가 바로 주정희다.
왜?
왜 김자운은 그 많은 감독 후보들 중 대뜸, 가장 먼저 주정희라는 인물을 소개시켜준 걸까? 어느 정도 그가 꼴통이란 정보를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자운 씨.”
“예?”
“왜 저한테 가장 먼저 주정희, 그분을 소개시켜준 겁니까?”
“그야…….”
잠시 뜸을 들이던 김자운이 대답해줬다.
“한국에서 야구 구단을 만드신다면 최소한 플레이오프 정도는 나가길 원하실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주정희, 그 사람이면 신생 구단도 플레이오프로 데려갈 수 있다, 이겁니까?”
“물론입니다. 만약 박 부회장님이 작심하고 지원을 해준다면 3년 안에 우승도 가능할 겁니다.”
말을 뱉는 김자운의 눈은 확신이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문수는 여기서 생각했다.
‘솔직히 케르빈 월드 일만으로도 스트레스를 팍팍 받는데…….’
케르빈 월드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보통이 아니다. 정신적 스트레스는 물론 육체적 스트레스까지! 때문에 어스 월드에서만큼은 휴식을 취하고 싶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
‘어차피 케르빈 월드에서도 스트레스 받으면서 살아가는데, 좀 더 스트레스 받는다고 달라지겠어?’
여기서 골치 아픈 일 한두 개 더 생긴다고 딱히 큰 문제가 될 것 같진 않다. 오히려 어설프게 뒤처리를 했다가 나중에 가서 후회하게 되면, 그게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올 터.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확신이 있습니까?”
“예?”
“주정희, 그 사람을 신생 구단에 감독으로 앉히면 3년 만에 우승시킨다는 것에 확신이 있습니까?”
그 말에 김자운은 당황하기보다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확신합니다. 만약 이게 도박이었으면, 저는 제 모든 재산을 배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 사람으로 영입합시다.”
청호고.
정말 전국에 있는 인문계열 고등학교 중에서는 최하위권에 위치한 학교나 다름없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공부와는 담을 쌓은 양아치 같은 놈들이지만, 그렇다고 학교 자체가 맛이 간 건 아니었다.
오히려 상위권에 있는 학생들은 나름 학업에 충실하며, 열심히 공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소위 내신을 위해서, 학교장 추천 등의 학교 내부적 경쟁에서 유리하기 위해 일부러 청호고에 온 학생들도 있었다.
이런 청호고가 학교 이미지 재건을 위해 2년 전에 한 가지 작업을 한 게 있으니, 바로 청호고 야구부 신설이다. 나름 리틀 야구단이나 중학교 야부구 출신 등에서 자질을 보인 학생들을 데려와 명장으로 이름난 주정희란 명감독의 조련 하에 단련시켜, 프로로 진출시키면 학교 이미지가 매우 좋아질 것이라 생각 한 거다.
‘장담하건데, 이 계획을 짠 인간은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인간이 분명해.’
보고서를 읽던 문수는 콧방귀를 뀌었다.
야구계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양반이었다면, 주정희 감독을 야구부 감독으로 앉힐 경우 한국야구계에서 어떤 취급을 당할 지 짐작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청호고는 연습상대조차 구하지 못할 정도로 한국 야구계에서 왕따를 당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청호고가 주정희를 야구부 감독으로 선임한 건, 이름값에 비해서 몸값이 저렴했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가 끝나면 3년 차. 올 시즌에 야구부원 중에서 졸업생이 나온다는 건데…… 여기서 드래프트에서 지명 받는 선수가 안 나오면 청호고 야구부 생명도 그다지 길진 않겠군.’
더불어 청호고는 야구부를 신설하면서, 당연히 막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아이들만 받았다. 어느 정도 재능이 있으면서 다른 학교 야구부에서 뛰던 학생이 미쳤다고 막 만들어진 청호고 야구부로 올 이유가 없으니까.
“응?”
그러나 딱 한 명.
“얘는 군산상고 출신인 놈이 왜 청호고로 온 거야?”
고교야구계의 최고 명문 중 하나라고 불리는 군산상고. 그런 군산상고에서 청호고 야구부 신설 제안을 받아들이고, 청호고로 전학을 온 학생이 있었다.
“강철운?”
이름은 강철운.
“아, 얘가 주장이군.”
기억이 났다. 주정희 감독의 극한훈련 속에서도 의지를 불태우며 눈빛이 번쩍이던 녀석. 마지막까지 아이들을 이끌고 마무리 훈련을 마친 녀석이다.
“싹수는 보이던 놈인데…….”
어떻게든 주정희 감독의 가르침을 흡수하려고 노력하던 모습이 보였다. 그런 놈이라면 몸이 망가지지 않는 이상, 어느 분야에서든 충분히 성공할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놈이 청호고 따위에 온 거야?”
더불어 그런 근성과 노력이라면, 나름 명문이라 불리는 군산상고에서도 충분히 제 몫을 할 터.
그럼 상식적으로 군산상고에 붙어있는 게 정답 아닌가?
“아하, 장학생이군.”
순간 문수는 강철운의 보고서 중 항목 한 가지를 발견했다.
청호고 장학생이며, 청호고가 뒷돈을 주며 데려왔다는 항목이었다.
뒷돈을 주고 선수를 빼오는 건 결코 칭찬 받을 일은 아니고, 비난 받을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교야구계에서 아예 없는 일은 아니다. 중학교를 막 졸업한 재목들 중에서 정말 특출 난 재능을 가진 경우에는 야구부를 가진 고등학교에서 어떻게든 데려가려고 하며,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거래가 생기고는 한다.
단지…….
“그래도 군산상고 같은 명문에서 다니던 도중에 온 거면…… 돈이 급하긴 급했단 거네.”
그런 보이지 않는 거래에도 어느 정도의 선은 있다.
적어도 이미 다른 학교에 들어가서, 멀쩡히 야구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애를 돈 주고 빼오는 건 선을 넘는 행위다.
“이 녀석도 고생 꽤나 하겠군.”
당연한 말이지만, 선을 넘은 이에게는 제재가 가해진다.
장담할 수 있다.
강철운, 녀석은 드래프트에서 절대 지명 받지 못할 것이다.
‘타이틀이 장난 아니네?’
본래 팀을 배신하고 나온 배신자란 타이틀에 고교야구대회에서 성적조차 없으며, 여기에 한국 야구계의 왕따나 다름없는 주정희의 제자. 이 정도 타이틀이면, 신고선수로 프로 구단 문을 두드리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녀석도 이 사실을 모르진 않을 터.
“이 녀석을 한 번 만나봐야겠군.”
놈에게는 이유가 있다.
나름 탄탄대로라 할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청호고로 온 이유가 말이다.
해가 질 때까지 주정희 감독 밑에서 훈련을 받았던 강철운. 마무리 런닝까지 끝냈을 때 주정희 감독은 강철운을 불렀다.
“아까 타격폼이 틀어졌다. 지금 너는 타격폼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남아라.”
보통 경우라면 주정희 감독의 그 말에 어떤 변명을 해서라도 빠져나가려 했을 터.
하지만 강철운은 달랐다.
“예.”
그는 군말 없이 주정희 감독이 보는 앞에서 배트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주정희 감독의 입에서 좋다, 라는 말이 떨어진 건, 두 시간이란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배트를 내려놓는 강철운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주정희 감독은 그런 강철운에게 말했다.
“괜히 밤에 놀지 말고, 가서 마무리 스트레칭 후에 식사를 하고 곧바로 휴식을 취해라.”
“예.”
그것으로 강철운의 훈련이 끝났다. 강철운은 곧장 자신의 장비를 챙기고 청호고 정문을 빠져나왔다.
그 무렵이었다.
“여.”
보기에도 너무 고급스럽기 짝이 없는 자동차. 그런 자동차 안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강철운, 맞지?”
“……맞습니다.”
강철운은 그 차 안에서 자신을 부르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를 리가 없다.
‘박문수 부회장.’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핫이슈 중 한 명 아닌가? 훗날 세계 최고의 대부호가 될 자.
‘저번에 우리 감독님을 찾아왔었지.’
더불어 이틀 전에 본 적이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새로이 야구단을 창단하면서 그 감독직에 주정희 감독을 앉히려 한다고 했다. 청호고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지만 주정희 감독이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결국 교감이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죄송합니다. 지금 막 훈련이 끝나서…… 당장 집에 가서 스트레칭 후에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그래? 그럼 집까지 태워다주지.”
“괜찮습니다. 집까지 뛰면서 갈 생각입니다.”
“그럼 같이 뛰면서 갈까?”
말과 함께 차에서 내리는 박문수. 그런 그의 모습에 강철운은 몇 가지 고민을 하다 이내 자신의 마음을 직접 말로 표현했다.
“죄송합니다.”
문수의 의도가 어찌 됐건, 강철운은 어떠한 일에도 연관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지금 그에게는 야구가 전부였으니까.
그런 강철운의 모습에 문수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 내가 새로운 야구단을 만든다는 건 들었지?”
들은 정도가 아니다.
이미 뉴스로 나왔다. 세계 제일의 대부호인 한석균 회장의 후계자, 박문수 부회장이 프로야구 10구단 창설을 기획 중이며, KBO는 아주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그리고 한국 야구계는 그 사실에 열렬한 환영을 보내고 있었다. 선수협은 10구단 창단을 반겼고, 온갖 지역 관계자들이 새롭게 신설될 야구단 유치를 위해 러브콜을 보내는 중이었다.
적어도 야구로 밥을 벌어먹는 사람들에게 박문수의 존재는, 태풍 그 이상이었다.
“예, 들었습니다.”
“너도 나름 생각이 있어서 군산상고에서 청호고로 왔을 테니,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조만간 열릴 드래프트에서 지명 받을 자신 있어?”
드래프트…… 일명 신인지명회의.
프로에 들어가기 위한 등용문.
“그게 아니면 어느 대학에서 오퍼라도 왔어?”
대부분 고교 졸업 후 프로에서 선택 받지 못하면 고르는 다음 선택지는 대학이다. 혹은 자신의 기대치보다 지명순위가 낮을 경우 대학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적어도 여기까지나 최소한의 기준이다. 만약 프로에도, 대학에도 가지 못할 경우 두드릴 수 있는 문은 하나다.
신고선수.
언제 1군 무대를 밟을 수 있는지, 그것조차 불확실한 신분. 성공한 자보다 실패한 자가 더 많은 세계.
그러나 강철운에게 그 세계는 현실이었다.
“……없습니다.”
“자기 처지는 잘 아는군. 그래서 말인데…… 뭐하면 내가 널 지명해줄 수도 있어.”
그 순간 문수의 말에 강철운의 눈빛이 흔들렸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돈이 제법 많거든. 그리고 알다시피 구단을 새롭게 만들면 지명회의에서도 지명권이 엄청나지. 머릿수야 거의 마음 내키는 대로 채울 수 있거든. 너 하나 정도 데려가는 건 별 거 아니야. 저기 보이는 자동차 중고로 팔아도 가능해.”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결국 강철운은 더 이상 문수의 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런 강철운을 향해 문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대화 좀 나눠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