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11화. 불스 백작과 담판을 짓다.>
1.
불스 백작의 성은 거대했다.
‘장난 아니네.’
이제르트 자작가의 성도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제르트 자작의 성이 거대한 이유는 테블스 산의 몬스터를 막기 위해 성벽을 최대한 크고, 높게 짓다보니 그런 거였기에 웅장하단 느낌은 들지 않았다.
반면 불스 백작의 성은 딱 봐도 성 자체를 설계 때부터 웅장하게 지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하긴, 기가스를 8대나 보유했는데 그거 관리하려면 이것도 좀 작게 느껴지긴 하겠네.’
불스 백작의 성에 도착한 이후 문수르와 피조는 헤어졌다. 피조는 불스 백작을 만나기 전 물량을 점검하느라 미리 예약한 여관에 자리를 잡았고, 문수르는 곧장 불스 백작을 만나러 이동했다.
불스 백작을 만나러 가는 길은 평탄했다. 딱히 제지는 없었다. 병사들이 신분 검사를 했지만, 불스 백작이 보내준 편지와 그 편지에 찍힌 인장은 완전히 프리패스나 마찬가지였다. 몸을 수색하는 경우도 없었다.
통과, 통과, 통과.
불스 백작가의 경비는 제법 두터웠지만, 그 과정에서 조금의 트러블도 없었다.
이윽고 몇 번의 경비를 지나, 내성으로 들어갔을 때, 이미 앞선 경비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는지 말끔하게 집사복을 입은 인물이 문수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작님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의 안내를 받아 곧장 불스 백작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면서 문수르는 이곳저곳을 살폈다.
‘여기서 보면 안 보이는군.’
그가 시선을 보낸 곳은 다름 아니라 불스 백작이 기가스를 보관하는 장소였다. 하늘에서 보면 당연히 보이지만, 반대로 이렇게 거리를 걸으면서 보면 결코 그 장소가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숨긴 게 맞아.’
기가스를 보관하는 장소, 정비실을 지을 때부터 외부에 쉽게 들키지 않도록 설계를 했다는 의미다.
‘기가스의 보유 숫자를 숨기고 싶다는 거겠지.’
애매했던 불스 백작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발톱을 날카롭게 갈면서 동시에 그걸 숨기려 하는 중이다.’
필로스 왕과 왕태자의 전쟁 속에서도 중립을 선언한 채 조용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던 불스 백작.
그는 이제까지 이룩한 모든 것을 비수마냥 날카롭게 다듬으며 그것을 숨기고 왔다.
‘과연 어떻게 될까?’
적어도 취미로 발톱을 다듬고, 숨기진 않았을 터. 때가 되면 크게 터뜨리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시기가 언제일까?
‘사실 지금이 딱 좋긴 하지.’
필로스 왕이 정권을 잡은 이후로 잠잠하다가 이제 다시 친왕파 내부적으로 새로이 파벌이 생기고 있다. 모든 이들이 친왕파에 들어오고 싶어서 연줄을 대는 와중에, 그 연줄을 기점으로 새로운 파벌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타이밍을 잘만 잡으면 오히려 나중에 중립파 귀족의 몸값이 오르는 경우도 생길 터.
그 타이밍이 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어쩌면 불스 백작은 그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문수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어느새 불스 백작이 머무는 집무실 문 앞까지 도착했다.
문은 닫혀있었다. 누구도 그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문수르는 직접 스스로 문고리를 잡고 문을 밀었다.
“자네가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온 사람인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습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문수르라 합니다.”
“문수르? 내가 알기로 이제르트 자작 휘하에 그런 기사는 없던데?”
“기사가 아닙니다. 용병입니다.”
대화가 순식간에 오고 갔다. 짧은 대화였지만, 마치 기사들이 검을 들고 결투를 하듯, 치고 박고 싸우는 느낌이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하듯, 서로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 번의 공방이 끝이 난 것이다.
그 둘은 한 번 숨을 돌렸다.
그리고 불스 백작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용병이라? 그럼 더 이상 할 말이 없군. 나가라.”
2.
불스 백작의 축객령이 떨어졌을 때, 문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은 문수르의 등 뒤로 슬그머니 접근했다. 만약 문수르가 백작의 명을 따르지 않을 경우 힘을 써서 강제로라도 끌고 나오려는 심보였다.
그러나 문수르는 불스 백작에게 가볍게 그러나 우아하게 인사를 한 번 하고는.
“불스 백작님을 만나 뵙게 되서 영광이었습니다.”
요즘의 예의도 놓치지 않은 채 자기 발로 직접 불스 백작의 집무실에서 걸어 나왔다.
끼릭!
이윽고 문이 닫혔을 때, 불스 백작의 굳었던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놈이군. 용병이라고?”
“조사해볼까요?”
기사 한 명이 질문했다. 불스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됐다. 여기서 굳이 용병이란 걸 말한다고 득을 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 놈 말이 맞을 터.”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대표로 용병을 보내다니…… 사정이 좋지 못한 모양입니다.”
기사 한 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기가스가 담보로 잡힌 상황에서 교섭 대리인으로 용병을 보내다니? 그냥 기가스를 포기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빚을 갚을 만큼의 돈이 있다는 건가?
“글쎄…….”
보통 경우라면 후자의 확률이 높을 것이다. 일단 백작의 체면을 위해서 사람을 보내고, 교섭이 결렬되더라도 돈만 갚으면 채무 관계는 바로 청산이 될 테니까.
그러나 불스 백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르트 자작은 무능한 자가 아니다. 누구보다 귀족다운 자지. 자신이 섬긴 주군을 끝까지 믿고 따라가는 자. 그 대쪽 같은 정신은 이곳저곳 박쥐마냥 날아다니는 귀족들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제르트 자작.
세간은 그를 무능한 귀족으로 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는 해를 태양으로 섬긴 자에게 내일이 있을 수 없다. 이제르트 자작은 끝까지 지는 해를 태양으로 섬겼다. 대세가 확실함에도 그는 무능하게, 멍청하게 파멸을 향해 걸어갔다.
결국 그 결과가 무엇인가?
그나마 노후를 보낼 만한 돈조차 테블스 산의 몬스터들과 싸우느라 탕진하고 있다.
노후도 없다. 남은 건 이름뿐인 가문이다.
이 얼마나 무능한 작자인가?
……라는 건 배에 기름이 출렁거리는 돼지 같은 귀족들, 마음 내키는 대로 해를 골라 품는 자들의 헛소리다.
이제르트 자작이 무능하다고?
그럼 어디 유능한 귀족이 이제르트 자작령을 대신 운영해보지? 장담하건데 1년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고작 1세대 기가스 한 대, 몇 안 되는 병사, 그걸 가지고 이제르트 자작은 그 지옥 같은 땅에서 10년을 버텼다.
이 정도면 유능한 정도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제르트 자작을 측근으로 만들고 싶었다.’
만약 세간의 눈이 아니었다면, 불스 백작은 이제르트 자작을 우군으로 만들고, 그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을 것이다.
왜?
이제르트 자작가와 불스 백작가의 거리는 그렇게까지 먼 편이 아니다. 이웃 영주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만약 이제르트 자작가가 몰락하면 테블스 산의 그 험악한 몬스터들이 어디로 향하겠는가?
불스 백작령이다.
최근에도 이미 조짐이 보이고 있다. 생긴 건 똑같은데 보통 몬스터보다 훨씬 강한 몬스터들이 불스 백작령에서도 출몰하고 있다. 이제르트 자작가의 힘이 부족해면서, 테블스 산의 몬스터들이 이제르트 자작령을 벗어나 활개 치는 것이다.
불스 백작 입장에서 딱히 좋은 일은 아니다.
사실 그래서 몰래 기가스를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줬다. 남들 모르게, 세상 모르게.
‘도와주려고 한 거지.’
말 그대로 도와주려고 그랬다.
돈 좀 쥐어줘서, 이제르트 자작이 좀 더 테블스 산의 몬스터들을 막아주길 원했다.
세상은 믿지 못하겠지만 정말 호의로 한 일이었다.
만약 이제르트 자작이 직접 서찰을 보내지 않았다면 평생 없던 일로 하려고 했다.
‘우습게 됐군.’
그런데 오히려 이제르트 자작이 잠자는 용의 콧털을 건드린 셈이다.
이제르트 자작이 그 사실을 거론한 이상 불스 백작도 잠자코 있을 수는 없다.
의도를 보여줘야 한다.
호의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누구에게?
‘역시 주변의 눈이 문제야. 주변의 눈이.’
친왕파의 귀족들!
이제르트 자작이라면 이를 가는 족속들!
‘자기들 이익이라면 나라도 팔아먹을 수 있는 놈들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다니? 우습군.’
그들의 적의를 사지 않기 위해, 눈총을 사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든 그럴싸한 결과물을 보여준다.
필요하다면 이제르트 자작가를 불스 백작이 직접 마무리 할 생각도 있었다. 이제르트 자작이 테블스 산을 막아주는 우방 역할인 건 고맙지만, 그렇다고 불스 백작이 희생을 감수하고 이제르트 자작을 살려둘 필요는 없으니까.
이제르트 자작이 몰락한다면, 결국 다른 어느 몰락 귀족이 억지로 이제르트 자작령의 새로운 주인이 될 것이고, 그때 가서 불스 백작은 다시 계산을 하면 된다.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어떻게 할까?’
이런 불스 백작에게 놓인 선택지는 두 가지다.
선택지 하나, 이제르트 자작가를 돕는 것. 단, 돕더라도 대놓고 도우면 안 된다. 몰래 도와야 한다.
선택지 둘, 이제르트 자작가를 불스 백작이 직접 몰락시키는 것! 조금 속 쓰리지만, 만약 이렇게 할 경우에 친왕파의 귀족들로부터 매우 우호적인 시선을 끌어낼 수 있다.
‘일단…….’
과연 불스 백작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불스 백작이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놈이 만약 나와 면담 요청을 하면 받아주도록.”
그가 내린 결정은 ‘결단 보류’였다.
3.
불스 백작의 축객령을 들은 문수르의 표정은 평온했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초조한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역시 불스 백작. 용의주도해.’
- 매뉴얼 B대로 움직이는군요.
‘그렇지. 딱 매뉴얼 B야.’
문수르는 이미 작금의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 예측도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문수르는 불스 백작에 대한 어느 정도 조사를 하는 한편, 그가 어떻게 나올지, 그리고 그렇게 나오면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매뉴얼을 작성했었다. 물론 문수르가 혼자 작성한 건 아니었다.
로이드, 이 유능한 놈이 온갖 매뉴얼을 만들었다. 매뉴얼은 무려 52가지가 됐다.
매뉴얼 A부터 매뉴얼 Z까지.
그리고 다시 매뉴얼 a부터 매뉴얼 z까지!
사실 더 있기는 하는데, 그 이상은 있으나 마나한 경우였다. 솔직히 매뉴얼 z의 경우에는…….
- 개인적으로는 매뉴얼 z를 기대했습니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
- 주인님도 조금 기대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미쳤나?’
다름 아니라 불스 백작이 다짜고짜 문수르를 겁탈하려고 한다! 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정말 이런 경우까지 염두에 두고 매뉴얼을 만들었던 문수르다. 웬만한 상황에는 미소를 지으며 대응할 수 있다.
더군다나 매뉴얼 B의 반응이라는 건, 예상 상황 중에서 두 번째로 확률이 높은 경우라는 거다.
매뉴얼 A의 경우에는 사실 곧바로 그 자리에서 대금 상환에 대한 계산과 논의를 하는 거였다. 사실 이게 가장 일반적인 경우니까.
‘다행이군.’
그리고 문수르는 오히려 매뉴얼 A의 경우가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교섭의 여지는 있다.’
이렇게 시간을 끈다는 건, 어쨌거나 타협, 교섭의 여지가 있다는 것.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조만간 다시 기회가 올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기회를 확실하게 잡아야 한다.
“그럼 나도 슬슬 준비를 해야지.”
그리고 그 기회를 잡기 위한 방법은 매뉴얼에 얼마든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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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전부 연재가 아니어서 죄송합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