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5.
오러 나이트는 기사들 중에서도 아주 귀중한 존재들이다. 대체적으로 기사 열 명 중 한 명 정도가 오러 나이트니까, 대부분의 영지에서는 오러 나이트는 기사단장급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기사단장이란 건 보통 기사와 의미가 다르다. 기사단이라는 막강한 무력부대를 자신의 의지로 다룰 수 있는 존재다. 더욱이 오러 나이트는 대부분 기가스 파일럿으로도 활약할 수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영주보다 오러 나이트를 더 우대해주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상인에게 있어 오러 나이트는 어디에 있건, 어디 소속이건, 어떤 놈이건 상관없이 최소한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기사와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거다.
“문수르 경, 감사하오.”
피조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용병출신의 기사 아니던가?
‘잘못했으면 크게 혼이 날 뻔했군.’
상대가 이제르트 자작가의 사람이건, 아니건 그건 중요치 않다. 사실 기사라는 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다른 영주를 섬길 수도 있다. 까놓고 어디 가서 이름 바꾼 다음에 제법 힘 있는 귀족 밑에서 기사 서약을 하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혹여 걸리더라도 비슷한 사람이라고 거짓말을 해도 되는 거다.
때문에 피조는 어떻게든 문수르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일단 다짜고짜 그에게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곧바로 금전적인 문제를 거론했다.
“내 지금 당장은 힘들고, 이번 거래가 끝나는 즉시 오늘 일은 사례해드리겠소.”
돈!
이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말한다. 뇌물을 싫어하는 대쪽 같은 사람은 뭐냐? 말 그대로다. 그들은 뇌물을 싫어하는 거지, 돈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정당한 이유로 주는 돈을 마다한 인간은 없다. 하다못해 돈은 안 받더라도 그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피조는 그렇게 생각했다.
“딱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사실 문수르도 돈이 싫진 않았다. 아니, 솔직한 심정으로는 주는 돈을 마다할 생각이 없었다.
‘돈이 급하긴 해.’
지금 이제르트 자작의 영지 사정이 말이 아니다. 그뿐인가? 이제르트 자작가의 사정 이전에 문수르 역시 수중에 그렇게 돈이 많지가 않다.
애초에 거의 무일푼으로 케르빈 월드에 왔다. 그렇다고 그동안 무슨 돈벌이를 한 것도 아니다. 용병이 된 건 이제르트 자작가에 의심 없이 들어오기 위해서였고, 실제로 용병으로 활동한 시기는 극히 짧다.
그렇다고 문수르가 정식 기사도 아니고, 당연히 봉급 같은 걸 받을 리가 없다. 그저 잠잘 곳, 먹을 것 정도만 받는 수준이다.
이번에도 수중에 푼돈만 가진 채 여행길에 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이제르트 자작에게 용돈이라도 좀 타내고 싶었지만…….
‘그런 분위기에서 돈 좀 달라고 말하는 건…… 차라리 굶어 죽으면 죽었지 절대 못해.’
그럼에도 피조의 제안을 거절한 건, 있어 보이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당장 돈을 받는 건 좀 그렇지.’
- 너무 저렴해 보일 것 같습니다.
‘그래, 확실히 저렴해 보이긴 해.’
체면이란 게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아주 중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특히 상인과의 거래는 더더욱 그렇다. 어느 정도 체면이 있어야 나름 동등한 거래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여기가 어디인가?
케르빈 월드라는 세계다. 지구가 아니다. 여긴 소비자보호원도 없고, 법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영주가 상황에 따라 법을 다루긴 하지만, 영주마다 천차만별일 뿐더러, 어스 월드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상당히 불합리한 부분이 많다.
이런 곳에서 불공정한 계약을 했다고 해도, 그 하소연을 들어줄 인간은 없다.
체면, 겉치레가 그래서 중요하다.
이 세계에서 허세는 매우 중요한 무기다. 체면은 그런 허세를 만들어주는 부분 중 하나고.
“아니외다. 공과 사는 분명히 해야 하는 법. 문수르 경이 아니었다면 탈보 상단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오.”
“아닙니다. 어차피 같은 콩탄 왕국의 국민 아닙니까? 도와드리는 게 당연한 일이지요.”
“허…….”
피조는 이런 문수르의 모습에 감탄했다.
물론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돈으로 계산하는 게 제일 편한데.’
사실 상인 입장에서는 정이라니, 은혜라느니, 이런 것만큼 귀찮은 게 없다. 이런 건 계산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은혜를 갚겠습니다, 라고 말했는데 그게 빌미가 되서 나중에 큰 거래에서 손해를 본다거나, 그런 경우도 아예 없지 않다.
오히려 상인들은 신용이 생명이라,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상단이라는 이미지가 찍히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손해를 입게 된다.
그러니까 돈으로 계산할 수 있을 때 계산하는 게 낫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문수르에게 돈을 준다고 해도 사실 그 액수는 크지 않다. 개인에게는 제법 두둑한 돈일지 몰라도, 상단의 수익금 등과 비교했을 때는 그렇게 크지 않다.
분명한 건 이번 일에서 문수르의 도움이 없었다면 탈보 상단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 거래의 상대는 불스 백작으로, 거래 품목은 그 무엇도 아닌 무기였으니까.
‘위장으로 껴둔 화물들만 피해를 입었다.’
무기 거래.
사실 콩탄 왕국은 무기 거래를 법으로 금지하지 않고 있다. 무기 거래를 불법화 시킨다고 해서 반역죄 따위의 범죄를 저지를 놈들이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 무기가 없으니까 반란은 못 일으키겠네? 이 정도 정신 상태인 놈이면 애초에 반란을 일으키지 조차 못한다는 거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합법화해서 세금이나 얻어내는 게 낫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무기 거래라고 신고는 했지만, 그 무기의 수량을 속였다.
이건 걸리면 문제될 여지가 있다. 세금을 탈세하려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보통 상인들은 이런 거래에 손을 대지 않는다. 자신의 처지가 아주 위험하지 않은 이상은 말이다.
‘이번 거래는 꼭 성공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탈보 상단은 그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탈보 남작이 병상에 누운 이후로 탈보 상단의 수익률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몇 번 거래가 어영부영 소득 없이 끝나자 수익률 대신 손해가 커지기 시작했다. 상인으로써 뛰어난 능력을 가진 탈보 남작의 공백은 생각보다 훨씬 컸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불스 백작에게서 제안이 왔다.
무기를 구매하고 싶다. 단, 왕국에 신고하는 것보다 많은 양의 무기를 구매하고 싶다.
물론 불스 백작은 그 대가로 적지 않은 값을 제안했다. 하지만 정작 탈보 상단이 그 거래를 받아들인 이유는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었다.
‘상계에서의 입지는 한 번 줄어들면 쉽게 회복하기 힘들다. 이럴 때에는 나름 힘 있는 귀족과의 거래를 통해 배경을 다지는 게 최선이다.’
불스 백작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 상계에서 많은 도움이 된다.
더군다나 이번 무기 거래를 통해 약점이 생기는 건 탈보 상단뿐만이 아니다. 불스 백작가 역시 왕국 몰래 무기 거래를 했다는 약점이 생기는 거다. 이 약점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친밀하게 지내는 수밖에 없다.
“후우, 내 어떻게든 보답을 하겠소.”
“정말 괜찮습니다. 그렇게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목적지가 어떻게 되시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최대한 드리고 싶소.”
“감사합니다.”
부드럽게 진행되는 대화.
“제 목적지는 불스 백작가입니다.”
“뭐, 뭣이라?”
그러나 대화는 돌뿌리에 걸린 듯 갑작스럽게 요동쳤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피조가 다시금 표정을 바꾸었다.
“험험.”
헛기침을 두어 번 하는 것으로 마음을 다진 후에.
“불스 백작가라니…….”
“혹시 그쪽 목적지도 불스 백작가입니까?”
“크흠.”
여기서 피조는 고민했다. 과연 사실을 말해주는 게 좋을까 거짓말을 하는 게 좋을까?
‘사실을 말하자.’
어차피 상대의 목적지가 불스 백작가라면, 거기서 만나게 될 터. 괜히 거짓말을 했다가 그때 안색을 붉히는 것보단 여기서 사실을 말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맞소. 우리 상단의 목적지도 불스 백작가이외다.”
“목적지가 같군요. 잘 됐습니다.”
“그, 그렇구려.”
말과 함께 미소를 짓는 문수르의 모습에 피조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코가 꿰인 느낌이군.’
문수르의 합류 이후 탈보 상단의 상행은 매우 편해졌다. 웬만한 몬스터는 문수르가 알아서 처치해줬다.
용병들은 기뻐했다.
“그 문수르 경이라는 자 실력이 어마어마한데?”
“오러 나이트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인 느낌이야. 대체 어디서 저런 기사가 등장했지?”
“개인적으론 조용하고, 나대지 않는 성격인 게 마음에 들더라. 기사들은 솔직히 그런 게 있잖아. 이거 시키고, 저거 시키고…… 가끔 우리를 무슨 벌레보듯 보고. 그런데 문수르 경이란 사람은 그런 건 없더라.”
“심지어 설거지까지 같이 했지. 그걸 보면 오히려 이래도 되는가, 싶을 정도더군.”
용병들만이 아니었다. 탈보 상단의 일꾼들 역시 문수르를 좋게 봤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는 손찌검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호의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문수르는 그들이 위험에 빠지면 도와줬고, 가끔 화물에 문제가 생기면 직접 나섰다.
특히나 무기가 실린 수레 같은 경우는 무기의 무게가 무거운 탓에 문제가 생길 경우 일꾼들조차 힘에 겨워 어찌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생겼는데, 그럴 때마다 문수르가 나서서 그들의 일을 대신해줬다.
일꾼들 입장에서 문수르를 욕할 이유는 티끌 만큼도 없었다.
탈보 상단 내에서 문수르의 인기는 정말 절정이었다.
단 한 명, 오직 단 한 명만이 그런 문수르를 좋지 않게 봤다.
‘끄응…… 이런 건 별로 안 좋은데…….’
피조.
현재 무리의 리더인 그런 문수르의 인기가 탐탁지 않았다. 문수르라는 인간 자체가 싫은 게 아니다.
단지 그가 상단과 가까워질수록, 그가 상단에 입히는 은혜가 많아질수록, 그의 이미지가 좋아질수록, 나중에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성심성의로 상단을 도와준 인물을 대충 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정말 이러다가 이제르트 자작가랑 거래라도 하게 되는 거 아니야?’
잘못하면 이제르트 자작가랑 도박이나 다름 없는 거래를 하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야. 그것 만큼은 내가 허락 못 해.’
피조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자마자 고개를 흔들며 그 상황을 어떻게든 부정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위치한 문수르는 과연 어떨까?
‘흠…… 평판은 좋아지고 있고.’
사실 문수르, 그는 사람이 좋아서 탈보 상단을 도와준 게 결코 아니었다.
몬스터를 처치한다? 그냥 하던 대로 했을 뿐이다.
그 이외의 경우는 전부 문수르가 의도한 바였다. 용병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한 건, 용병들이 소문의 근원지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탈보 상단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용병들이 증명해줄 것이다.’
상단에 속한 일꾼은 어떻게 됐건 상단 사람이지만, 용병은 조금 다르다. 계약이 끝나면 남남이 되는 거다. 결과적으로 지금 상황에서 그나마 객관적으로 판단을 해줄 수 있는 건 용병들이다. 그런 용병들에게 좋은 이미지가 되서 나쁠 건 없다.
일꾼을 도와준 건?
‘무기 거래라…… 화물 상당수가 무기였다. 불스 백작가가 무기를 거래한다는 건가?’
그건 바로 화물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였다. 도와준다는 걸 빌미로 화물의 정체가 무기라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그 후에는 도와줄 때마다 무기의 수량을 파악했다. 보다 확실하게 수량을 파악하기 위해 더 열심히 도와줬다. 일꾼들 입장에서는 정말 성심성의껏 도와주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대놓고 상단의 화물을 조사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그렇고 이제 얼마 안남았군.’
문수르가 고개를 들었다. 사실 고개를 든다고 해서 뭐가 보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로이드가 있었다.
- 불스 백작령에 들어왔습니다. 불스 백작의 성까지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6일 정도로 예상됩니다.
‘이제 승부를 볼 때가 왔군.’
로이드를 통해 불스 백작가와의 거리를 통보 받은 문수르.
그가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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