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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맨-33화 (33/293)

33화

7.

수술이 끝난 직후 문수르는 곧바로 로이드에게 명령을 내렸다.

“GPS시스템으로 불스 백작령을 조사해.”

- 그렇게 되면 테블스 산맥에 대한 조사가 더뎌집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어. 그리고 헤인 경의 재활 매뉴얼과 앞으로 있을 의학수업 매뉴얼도 좀 만들어 놔.”

- 알겠습니다.

“현재 작황 상태는?”

-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어쩌면 보다 빠른 결과를 보실 수도 있으실 듯합니다.

“몬스터들의 상황은?”

- 현재 이제르트 자작령 주변에서 큰 움직임은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스캔 가능한 범위가 넓지 않은 탓에 확실한 정보 제공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불스 백작가로 떠나기 전 마지막 정비를 시작한 문수르. 그는 곧바로 이제르트 자작을 만나서,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일단 불스 백작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우선일 듯합니다. 자작님이 친필 서신으로 빚의 대금상환 연장이 가능한지, 그것부터 보내주십시오.”

“음…… 그건 딱히 문제될 게 없지만, 불스 백작 입장에서는 다짜고짜 대금상환 날짜를 연장해달라고 하면 오히려 기분이 상할 듯싶은데…… 딱히 그자와 깊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필요한 건 확실한 적아의 구분입니다. 불스 백작이 이제르트 자작가에 적의를 가졌는지, 아니면 호의를 가졌는지, 그걸 구분하는 게 최선입니다. 어쨌거나 빚이 있고, 증거가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렇기도 하군.”

불스 백작이 중립귀족이라고는 하지만 무조건 친왕파에 들어가려고만 할 이유는 없다.

사실 왕과 귀족은 물과 기름 같은 존재다. 세상에 물과 기름은 당연히 필요하고, 그 둘이 필요에 따라서 어느 정도 섞인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섞일 수 없는 존재다.

왕의 힘이 강해지면 귀족의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고, 반대로 귀족의 힘이 강해지면 왕의 힘은 약해진다. 이것은 당연한 논리다.

친왕파 역시 다르지 않다. 필요에 따라 왕의 곁에 서는 것이지만, 잠시뿐이다.

무엇보다 친왕파 귀족이라고 해서 왕이 하는 모든 걸 허락해주고, 지원해주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왕이 어느 귀족 한 명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귀족의 작위를 박탈하고 영지를 빼앗으려 한다고 치자. 그 귀족이 반역죄를 저질렀다면 모를까, 별로 죄를 지은 것도 없는 귀족인데 왕의 심기를 뒤틀렸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 경우, 친왕파 귀족들도 이런 왕의 결정을 지지하지 않는다.

왕의 힘이 너무 강해지면 훗날 왕의 그 무시무시한 칼끝이 친왕파 귀족에게도 향할 수 있으니까.

즉, 중립파 귀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벌벌 떨 필요는 없다. 큰 죄를 저지른 게 아니면 그냥 적당히 자세를 낮추기만 해도 된다. 오히려 어설프게 친왕파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치이는 것보단 조용히 있는 게 나은 판단이기도 하다.

하물며 백작은 상급 귀족이다. 자작이나 남작과는 차원이 다른 귀족이다. 가진 영지의 크기, 보유하고 있는 사병의 숫자 그리고 오랜 세월 쌓아온 부와 명성. 이것들은 하루아침에 쉬이 무너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불스 백작 정도면 한 세대 정도는 그냥 자세를 낮춘 채 충분히 버틸 수 있다.

그렇기에 이제까지 중립을 표방해왔던 불스 백작이 굳이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낮추면서 친왕파게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만약 그 이유가 있다면 보통 이유가 아닐 터. 친왕파에 들어가기 위해 이제르트 자작가를 노린 거라면 적어도 일반적인 교섭으로는 담판을 지을 수 없다.

반대로 그게 아니라면? 교섭의 여지가 있다.

이걸 확실하게 파악해야 한다.

만약 친왕파에 들어가기 위해 이제르트 자작가를 노린 거라면, 대금상환 연장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할 터.

“바로 편지를 보내겠네.”

이제르트 자작 역시 정치를 아는 귀족이기에 문수르의 의중을 금방 파악했다.

불스 백작.

콩탄 왕국의 명문가 중 하나로, 콩탄 왕국의 개국공신 가문 중 한 곳으로 콩탄 왕국의 역사와 함께했다.

역사 그리고 전통을 가진 명문가란 의미다. 드넓은 땅을 영지로 소유하고 있으며, 강력한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기가스의 시대가 온 이후로, 불스 백작가는 압도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꾸준히 기가스와 파일럿을 고용했고, 차세대 기가스를 구매했다.

때문에 현재 1세대 기가스 4대와 2세대 기가스 3대, 그리고 2세대 기가스를 개조한 2.4배 급 기가스 1대를 보유했다. 그리고 이 전력을 유지하기 위한 마법사과 정비공들 역시 다수 보유한…… 정말 막강한 전력을 가진 귀족이지만 세간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특별히 없다.

명문가이긴 하지만, 단지 그뿐인 가문.

저력은 있지만, 단지 그뿐인 가문.

불스 백작가가 이런 평가를 받는 이유는 최근 있어서 콩탄 왕국의 가장 큰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필로스 왕과 카스트로 왕태자 간의 왕위다툼에서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은 채 중립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이란 게 최근 일을 중심으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불스 백작은 최근까지 특별한 행보를 보이지 않은 조용한 귀족이었다.

그렇다면 세상이 잘 모르는 불스 백작은 어떤 인물일까?

“이제르트 자작, 재미있는 자군.”

올해로 마흔셋. 콧수염을 멋지게 길렀으며, 갈색 머리를 뒤로 전부 넘긴 중후한 외모의 미중년.

불스 백작은 겉보기에는 젊었을 적 여자 꽤나 울렸을 남자, 그렇게만 보일 따름이었다.

그런 불스 백작의 곁에는 험악한 외모를 가진 기사 한 명이 서있었다.

기사의 이름은 브라스.

콩탄 제국 최강의 자유기사라 불리며, 모든 귀족들이 품고 싶어 하는 그 기사가 지금 불스 백작의 곁에 있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브라스 경의 물음에 불스 백작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본래 대로라면 그냥 지켜만 볼 생각이었지. 딱히 뭐가 되던 나는 그때 필요한 선택을 하면 되니까. 무엇보다 이제르트 자작이 이 사실을 파악할 줄은 몰랐지.”

“이제르트 자작가에 어떠한 변화가 있다는 의미이겠군요.”

“그렇지.”

“어찌 하시겠습니까? 사람을 시켜 이제르트 자작가를 조사할까요?”

“아니, 됐네. 차라리 잘 됐어. 언제까지 선택을 미뤄둘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

“그럼 드디어……?”

“그래, 맞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불스 백작.

“이제 다시 한 번 왕국이 재편될 때가 오긴 했지.”

불스 백작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이제르트 자작은 그 답장을 개봉하지도 않은 채로 문수르에게 건네줬다.

문수르는 이제르트 자작으로부터 불스 백작의 답장을 받으며 고민했다.

‘이거…… 답변이 너무 빠르군.’

생각했던 것보다 답변이 빨리 왔다.

케르빈 월드에 무슨 우체국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찰이 오고 가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있는데…… 지금은 너무 빠르다. 서찰을 보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답장을 줬다.

핵심은 그거다.

‘기다렸다는 건가?’

마치 불스 백작은 이제르트 자작의 이런 편지를, 부탁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다.

‘적어도 그냥 돈을 빌려준 건 아니라는 거군.’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불스 백작이 선의든, 악의든 적어도 아무런 이유없이 이제르트 자작가에 돈을 준 건 아니다.

의도가 있다.

“여기서 읽겠습니다.”

문수르는 곧바로 답장을 읽었다. 내용은 별 거 없었다. 처음은 몇 가지 미사여구들…… 이제르트 자작을 칭찬하는 글로 시작했지만 핵심 내용은 간단했다.

“조건을 걸었습니다.”

“조건?”

말과 함께 답장을 이제르트 자작에게 건네주는 문수르.

“직접 백작가로 와서 합의를 이루면 대금상환기간을 얼마든지 연장해줄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직접 가야 하는가?”

“그런 내용은 없었습니다.”

“이상하군.”

그러나 너무 내용이 간단한 게 문제였다.

귀족들이 서로 주고받는 서찰들 중에는 별 거 아닌 경우도 있지만, 만약 거래나 약속 같은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따라서 얼마든지 해석이 달라지고 혹여 문장이나, 단어 선정에서 실수를 하게 되면 나중에 꼬투리가 잡혀 손해를 보는 경우도 생긴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보통 경우라면 불스 백작은 이제르트 자작을 직접 거론하며 그가 자신의 영지로 오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서찰 내용엔 그게 없었다. 그저 불스 백작령에서 대화를 나눈다, 그런 내용만 있을 뿐이다.

‘무언가 있다.’

그냥 불스 백작의 실수쯤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문수르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실수가 아니다.

‘불스 백작이란 자, 단순한 이유로 이제르트 자작가를 건드린 게 아니야.’

명백한 의도를 품은 채 계획을 세운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대체 그 계획이 뭘까?

‘어떻게 하지?’

그 순간 문수르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GPS시스템이었다. GPS시스템을 통해 불스 백작가의 동태를 살핀다면 보다 많은 정보를 토대로 보다 나은 판단을 할 수 있을 터.

그러나 이 부분에서 불스 백작은 오히려 확실하게 집고 넘어갔다.

“기간이 명시되어 있군.”

“예.”

사람은 명시하지 않았지만 날짜는 명시한 것이다.

상대에게 누굴 보낼 지, 그걸 생각할 기회는 주겠지만 생각할 틈을 주긴 싫다는 거다.

‘이렇게 빨리 반응할 줄은 몰랐어.’

문수르는 설마 상황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 줄 꿈에도 몰랐다. 때문에 조금은 여유를 가진 채 움직였다.

그런데 그 여유가 오히려 독이 되다니?

생각지도 못한 경우다. 언젠가 봉변을 당하는 날이 올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나는…….’

주사위는 던져졌다. 결국 문수르가 작금의 상황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 가지 않는다..

둘, 가긴 가되, 다른 사람을 보낸다.

셋, 가긴 가되, 직접 간다.

‘첫 번째는 고를 수 없다.’

가지 않으면 대금상환을 명시된 날짜에 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르트 자작가 사정으로는 불가능한 상황. 결국 담보로 잡힌 기가스를 넘겨줘야 하고, 그건 이제르트 자작가의 패망을 뜻하는 거다.

가긴 가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누가 가느냐, 바로 그 점이다.

‘이제르트 자작을 보낼까?’

보통이라면 영지의 운명이 걸린 일에 이제르트 자작을 보내는 게 정답일 터.

하지만 상대가 이제르트 자작에 대한 악의를 가지고 있다면 조금 달리 봐야 한다. 이제르트 자작의 안위를 생각해서, 그 휘하의 기사를 보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문수르, 자신이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지.

‘정보가 너무 없어.’

뭐를 고르든 지금 상황에서 결과를 추측하기란 힘들다. 수중에 있는 정보가 너무 적으니까.

결국 감이다.

감을 믿고, 선택지를 골라야 한다.

‘아니…… 감을 믿을 바에는 차라리 순간순간 바로 대처가 가능한 사람이 가는 게 낫지.’

그러나 여기서 좀 더 앞선 생각을 하는 문수르.

변수가 많은 일에서 가장 대처를 잘할 사람은 누구일까? 동시에 기가스를 배제했을 경우 가장 전투능력이 강력한 사람은?

결국 답은 이미 나온 셈이다.

“제가 가겠습니다.”

문수르, 불스 백작과 대화를 나눌 사람은 결국 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위험하지 않겠나? 혹여 불스 백작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이제르트 자작은 걱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백작이다. 반면 문수르는? 이제르트 자작가 내에선 경이라 불리지만, 정식 기사 작위를 받은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작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평민이란 소리!

귀족이 평민을 해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평민 한둘쯤은 죽여도 무마할 권력이 있다.

상대가 백작이라면야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지.

만약 불스 백작이 문수르를 죽이려고 한다면, 문수르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스 백작이 적의를 가진 것 같진 않습니다.”

“사람 마음은 모르는 법이네.”

“예. 사람 마음은 모르는 법이죠.”

그러나 문수르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원하는 건 다 비슷한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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