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팔을 자르는 복수에 성공한 기가스의 움직임은 그 이후부터 전과 전혀 달라졌다.
슈욱!
육중한 몸뚱이가 부드럽게 움직이며, 오우거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 부드러운 움직임에 오우거는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반응이 느린 오우거의 몸뚱이는 허점투성이가 됐고.
쉬익!
기가스는 그 허점을 놓치지 않고.
촤악!
검으로 베어버렸다.
“크아아!”
등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가 난 오우거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딸각딸각!
기가스 안에 탑승한 포비어가 손가락을 움직이며 기가스를 조종했다. 그런 그의 전신은 땀으로 젖어있었다.
기가스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인간 이상의 힘을 내야 한다. 그런 힘을 낼 수 있는 건 세상천지에 단 한 명, 바로 오러 나이트뿐이다.
즉, 기가스를 움직일 때 파일럿은 수시로 오러를 사용해야 한다. 뛰어난 출력과 성능을 자랑하는 기가스는 적은 힘으로도 강력한 힘을 내뿜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아무리 힘을 줘도, 원하는 만큼의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포비어의 경우는 당연히 후자였다.
빠득!
이가 갈릴 정도로 힘을 줘야 그나마 제 성능을 발휘한다. 그렇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싶은 건 아니다.
‘움직여라.’
포비어는 오히려 이런 기가스라도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리고 그 감사의 대가로 그가 할 수 있는 건, 바로 눈앞의 사악한 몬스터를 처치하는 것뿐!
슈웅!
포비어의 명령을 받은 기가스가 팔을 휘둘렀다. 이윽고 기가스의 검이 드러난 오우거의 등뼈를 내리쳤다.
콰직!
기괴한 소리와 함께 오우거의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크어어오오!”
오우거의 비명소리는 더 높이 솟아올랐다. 하늘을 뚫을 듯한 기세였다.
딸각!
거기서 포비어는 오우거의 등짝에 찔러 넣은 검에 더 힘을 주었다. 뼈를 끓고, 몸통마저 끊을 생각이었다.
푸욱!
하지만 오우거는 가죽만 질긴 게 아니었다. 녀석은 근육부터 뼈까지, 모든 게 질렸고, 기가스의 검은 결국 반쯤 박힐 뿐이었다.
심지어 오우거는 등짝에 검이 깊숙이 박히고도 죽지 않았다. 오히려 더 살벌한 괴성을 토해내며, 기가스를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포비어는 여기서 검을 포기했다.
딸각!
대신에 포비어가 선택한 건 주먹이었다. 여러 장갑 등의 처리를 거친 기가스의 주먹은 검에 버금가는 무기였다. 그 주먹이 오우거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갔다.
퍼억!
막 등을 돌리려던 오우거는 기가스의 주먹에 맞자, 바로 넘어가면서 자빠지고 말았다.
거기서 포비어는 잠시 뒤로 물러났다. 계속되는 연타로 피해를 입은 쪽은 오우거다. 그러나 오우거의 무시무시한 점은 그 끈질긴 생명력이다. 몸이 반으로 잘려도 얼마 동안은 살아남을 정도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마무리 일격을 날린답시고 근접전을 계속 해주는 건, 놈을 도와주는 꼴이다.
지켜본 후에 놈의 반응을 보고 다시 공격한다.
“후우!”
더불어 포비어는 기가스 안에서 숨을 돌렸다. 짧지만 정말 그 어떤 것보다 달콤한 잠시 동안의 휴식. 솔직히 포비어에게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이런 휴식이었다.
여유가 생기자, 포비어의 머릿속에 헤인 경이 떠올랐다.
빠득!
그 생각만으로 이가 갈렸다.
‘헤인 경.’
기사 헤인. 그는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나름 여러 기사들의 연결점이 되어주던 기사였다.
실력도 뛰어났지만, 그는 기사이면서도 의외로 사람들을 굽어 볼 줄 아는 자였다. 때문에 기사나 용병들 사이에서 혹은 영지민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그가 나서서 해결했고, 큰 소란으로 번지는 건 막을 수 있었다.
포비어가 처음 이제르트 자작 휘하에 들어왔을 때도 그랬다. 당시 이미 기사였던 헤인은 임시 기사에 불과했으며 나이도 어린 포비어를 진짜 기사처럼 대했다. 더 나아가 그가 조만간 기가스 파일럿이 될 거란 사실을 알고, 위계질서를 위해 스스로 고개를 숙였다.
‘복수는 내가 한다.’
유난히 포비어가 머리보단 가슴으로 작금의 상황을 판단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포비어는 지금도 머리로 생각할 생각은 없었다.
두근두근!
그는 가슴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5.
전투가 끝났다.
“모두 빨리빨리 움직여!”
“전장을 정비해.”
“혹시 모를 몬스터의 2차 공세에 대비해 전열을 구축한다. 모두 긴장 풀지 마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들 사이로 육중한 몸체의 기가스 역시 정비실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정비실에 도착한 포비어는 기가스에서 내려오며, 기가스의 점검과 수리를 위해 달라붙은 정비공들에게 말했다.
“내부 정비는 나중에 할 테니, 외부 장갑만 일단 정비하도록.”
“알겠습니다.”
내부 정비를 위해선 파일럿인 포비어와 함께 해야 한다. 내부 정비라는 게 결국 탑승자를 위한 정비니까. 포비어의 기호나, 성향, 그의 느낌을 배제한 정비는 의미가 없다. 오히려 독이 되면 독이 됐지.
보통은 포비어는 기가스 운행이 끝난 직후 내부 정비부터 했다. 그런데 이렇게 내부 정비를 먼저 배제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무슨 일이지?”
“헤인 경 때문이겠지.”
정비공들은 그런 포비어의 심중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헤인 경이 팔을 잃었다는 소문은 벌써 성 내의 사람들은 전부 알고 있을 정도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슬퍼했다.
“쯧쯧, 참 좋으신 분인데.”
“재수가 없었지.”
헤인 경의 평판은 어디에서나 좋았다. 기사들은 물론 평민들 사이에서도 말이다.
내부 정비를 뒤로 한 채 포비어는 기사를 찾아갔다. 기사 한 명을 보자마자 붙잡고 물었다.
“헤인 경은 어찌 됐습니까?”
“나도 지금 뵈러 가는 중이네.”
“살아계십니까?”
“다행히도 목숨은 부지하신 모양이야. 문수르 경이 직접 나섰는데……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네.”
“문수르 경이?”
순간 튀어나오는 문수르의 이름에 포비어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의구심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영지 내 그 어느 기사들보다 문수르와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포비어는 문수르가 충분히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그에게는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실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근본적으로 이 세상의 사람과는 다른 느낌. 그래, 그런 느낌이 문수르에겐 있었다.
“따라오게.”
이윽고 포비어가 기사와 함께 헤인 경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헤인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몰려오는 통증도 잊은 채 자신의 잘려나간 팔의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힘을 줄 때마다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지만, 헤인은 오히려 그 통증이 너무 감사했다. 자신의 팔에서 느끼는 통증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그런 헤인의 팔을 보던 문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입니다. 앞으로 감염을 비롯해서 재활까지, 제대로 팔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주의와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문수르 경…… 솔직히 보고도 믿지 못하겠소. 내 팔이 정말 멀쩡한 것이오?”
“멀쩡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앞으로 차차 나아질 겁니다.”
“그렇습니까?”
거기서 헤인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목을 차고 오르는 벅찬 감동에 말이 나오질 않았다.
포비어가 온 건 그 무렵이었다.
“헤인 경!”
포비어는 일단 살아 있는 헤인을 보며 감사했다. 목숨이 붙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축복 받을 만한 상황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나, 나는…….”
말문이 막혔던 헤인은 포비어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문수르는 그런 그들의 광경을 보고, 슬며시 몸을 뺐다. 솔직히 이제 더 이상 자신이 할 건 없다. 앞으로 중요한 건 관리다. 아마도 재수술은 필요 없을 것이다.
‘수술은 완벽했다.’
로이드의 지도 아래에 이루어진 접합수술은 문수르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완벽했다.
사실 문수르는 자신의 실력에 대해 의구심이 있었다 열심히 기술을 연마했다고는 하지만 2주에 불과하다. 보통 의사 한 명이 제 몫을 하려면 10년이 걸린다고 한다. 당장 한국만 봐도 그렇다. 의대 졸업 후에 인턴과 레지던트 생활. 막상 제대로 된 의사 소리를 듣는 건 10년 후다.
하물며 2주에 불과한 기술로 뭘 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실력이 있다.’
그러나 이번 헤인의 접합수술을 통해 문수르는 스스로에게 품고 있던 의구심을 벗을 수 있었다.
확신이 생겼다.
‘이리아의 수술도 곧바로 진행한다.’
사실 개흉 수술이라는 부담감을 제외하면, 이리아가 받아야 할 수술 자체의 난이도는 헤인의 접할 수술보다 수준이 낮았다.
즉, 지금 문수르에게는 이리아의 수술을 성공적으로 해낼 실력이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동시에 문수르는 한 가지 걱정을 했다.
‘앞으로 위기는 더 많이 닥칠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수술을 위해서 케르빈 월드에 온 게 아니다.’
조만간 또 다시 부상자가 생길 것이고, 영지가 거대해질수록 그 숫자는 늘어날 것이다.
더군다나 문수르는 앞으로 전 방위에 걸쳐 움직여야 할 터. 그때가면 그들을 누가 치료해준단 말인가?
‘이건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의사를 양성해야할지도 모르겠군.’
훗날 대륙의 의학을 180도 바꾸어놓을 신의(神醫) 헤인 경의 탄생의 시발점은 바로 지금이었다.
============================ 작품 후기 ============================
이번 편은 지루하고, 분량도 적었습니다. 다음 편부터는 최소 1화당 10k 이상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