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8화. 신의.>
1.
문수르가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곧장 이제르트 자작을 찾아갔다. 이제르트 자작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눴고, 그 대화 마지막에 문수르는 이제르트 자작에게 편지 한 장을 주었다.
“이게 무언가?”
“할루이 이제르트, 그분의 편지입니다.”
“그, 그게 정말인가?”
한석균은 자신의 후손에게 적어도 편지로라도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사실 문수르는 그 편지를 가져가며 많은 걱정을 했다.
‘나에 대한 이야기, 혹시 내 약점이나 그런 것을 써놓진 않았을까?’
한석균은 문수르를 어떻게든 견제하려고 한다. 로이드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과연 안심할까?
물론 한석균이 문수르를 믿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는 문수르를 믿는다. 하지만 세상에는 사람을 배신할 때 꼭 자기 의지로만 배신하게 되는 건 아니다.
타인에 의해서 혹은 자신도 모르는 실수에 의해서. 원치 않는 배신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인간이니까.
인간이라면 언제 무슨 실수를 하고, 문제가 생겨도 이상할 게 없다. 때문에 한석균은 어떻게든 문수르의 일탈을, 탈선을 막기 위한 대책을 보다 많이 만들려고 했다.
‘알고 있지만.’
문수르는 그런 한석균의 마음을 이해한다. 특히 그의 밑에서 후계자 수업을 배우면서, 한석균의 심정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한석균, 그는 정말 자신의 세대 만에 인류 최고의 부를 쌓은 자였다. 그런 그가 겪은 세상은 일반인들이 겪은 세상보다 더 크고, 더 깊고, 더 방대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그가 보는 인간이란 허점이 너무 많다. 문수르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만약 문수르가 한석균 입장이었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어쩌면 더 심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문수르는 한석균이 아니라는 것.
‘나도 나만의 생각이 있다.’
- 저랑 같이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사료됩니다.
순간 로이드가 문수르의 생각을 읽고 곧장 경고 비슷한 소리를 했다. 문수르가 이죽거리듯 말했다.
‘그래, 그래서 내가 순순히 따르는 거야.’
사실 편지를 몰래 개봉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로이드 때문이었다. 몰래 한다고 해도 문수르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로이드가 그 사실을 전부 알아차려버리니까.
‘그건 그렇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얼마나 진행됐어?’
- 원활하게 진행 중입니다.
‘결과물은 언제쯤 나올까?’
- 현재 이제르트 자작가는 여름에 접어듭니다. 올해부터 충분히 결과물을 보실 수 있으실 듯합니다.
현재 문수르가 가장 열중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역시 식량 프로젝트였다.
문수르는 이제르트 자작령 내에서 핵심적으로 기를 작물로 세 가지를 선택했다.
밀, 옥수수, 감자.
다른 것들도 혹시 몰라 많이 준비했지만, 주력 작물로 삼기에는 부적격한 것들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문수르가 재배하려는 이 세 가지 작물들은 보통 것들이 아니다.
앞에 ‘슈퍼’라는 타이틀조차도 오히려 미안해서 붙이기 힘들 정도다. 엄청난 개량과 유전자 조합을 통해 만들어낸 작물로, 현재 케르빈 월드에 존재하는 밀, 옥수수, 감자에 비해 생산성 자체가 5배 이상은 된다.
사실 너무 강력한 탓에 이 작물들은 케르빈 월드의 생태계에 영향을 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한석균의 판단은 단호했다.
“난 자연보호자가 아니야. 물론 자연보호를 할 수 있으면 하지. 하지만 그걸 위해서 중요한 걸 포기할 정도의 위인은 아니네.”
가문을 위해서라면 환경 따윈 알게 뭔가!
뭐 문수르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사실 문수르가 본래 사는 어스 월드는 환경파괴 따위는 아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세계 아니었던가? 거기에 비하면 이 정도는 환경파괴 축에도 못 든다.
어쨌거나 재배가 시작되면 이제르트 자작가는 엄청난 양의 식량확보가 가능할 것이다.
식량은 곧 재산이다. 식량확보만 가능하다면, 영지가 강해지는 건 문제도 아니다.
물론 동시에 진행할 일이 있다.
‘세금 개편은 조만간 실시할 테고.’
조세제도 개편을 통해 농민들이 보다 열정과 의욕을 가지고 농사에 나서야 한다.
선진농법 전수도 필요하다. 솔직히 지금 케르빈 월드의 농법은 너무 무식해서, 들이는 노력에 비해 나오는 결과물은 최악이다. 노력이 10이라면 결과물은 1인 느낌.
‘역시 사람이 필요해.’
결국 이 모든 걸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전문가 육성이 필수다.
‘아카데미라는 곳을 조만간 방문해야겠어.’
지식인을 배출하는 아카데미. 그곳에서 인재들을 모아야 한다.
그러나 그건 나중의 일이다. 지금 아카데미에 갈 정도로 시간이 넘치는 게 아니니까.
‘작물 재배는 로이드에게 맡기고.’
그리고 지금 과정 자체는 문수르가 나서서 일일이 하기보다는 로이드를 통해 작업을 하는 게 낫다.
어차피 상황만 살피면 된다. 상황에 따라 문제가 생기면 로이드가 즉시 그 사실을 문수르에게 알려주고, 문수르가 다른 사람을 시켜 문제를 처리하면 되니까.
관심만 가지면 된다.
‘그럼 당장 급한 건 이리아의 수술이로군.’
의료키트는 가져왔다. 그리고 어스 월드에서 직접 수술을 하기 위해 엄청나게 훈련했다.
자신은 있다.
하지만 문수르를 가르쳤던 의사는 분명하게 말했다.
“의사가 자신감을 가지는 건 좋지만, 자신감을 가진다고 해서 언제나 수술이 성공하는 건 아니다.”
특히 그는 가장 중요한 충고를 했다.
“그리고 수술이 성공했어도 환자는 죽을 수 있다. 심지어 수술이 성공했기에 환자가 죽는 경우도 있지. 괜히 수술 전에 환자의 데이터를 측정하고, 최상은 아니더라도 최선의 상황에서 수술을 하는 게 아니야.”
수술이란 그런 거다.
아무리 의학이 발전하고, 기술이 발전했다고 해도 똑같은 병, 똑같은 상태의 환자에게 똑같은 수술을 해도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사실상 똑같은 인간이란 없는 법이니까.
이리아의 수술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급하지만 당장은 힘들다.’
수술은 할 것이다.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하는 게 좋다. 하지만 당장할 수가 없다.
모순 같지만, 현실이다.
‘일단 내과적 치료를 통해 건강을 되찾아야 한다.’
해서 문수르가 내놓은 방법. 내과 치료를 통해 일단 몸의 건강을 최고치까지 끌어올린 후에 수술을 하는 것이다.
‘좋아.’
계획을 세운 문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문수르는 몰랐다.
자신이 그 계획을 다진 지 고작 몇 시간 만에 의료키트를 사용하게 될 줄은 꿈에도 말이다.
2.
이제르트 자작가는 조용할 날이 없다.
“습격이다!”
“오우거나! 오우거가 왔다!”
“병사들은 후방으로 빠진다. 기사들과 용병대장만 오우거를 상대한다. 기가스가 오기 전까지 버텨!”
이번에도 습격이 있었다. 그리고 습격한 몬스터의 정체는 다름 아니라 오우거였다.
오우거!
이족보행 몬스터들 중에서 거신병기 기가스와 맞짱을 뜰 수 있는 몇 안 되는 몬스터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반 병사들이 오우거 앞에 나서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의미도 없다. 오히려 피해만 커지지. 때문에 기사들은 병사들의 희생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병사들을 뒤로 물렸고, 전투력이 강한 자신들이 앞장섰다.
하지만 기사들도 오우거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기가스가 오기 전까지 놈의 시선을 끌며, 성벽 등의 피해를 최소화 하는 것뿐이었다.
말이 시선 끌기기, 뛰어난 실력을 가진 기사들에게도 오우거의 시선 끌기는 오크 백 마리를 혼자 상대하는 것보다 더 소름 돋고, 힘든 일이다.
“기가스가 움직인다!”
“조금 더 버텨라!”
여섯 명의 기사들과 세 명의 용병대장들. 그들이 오우거 주변에 포위하 듯 배치된 채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포비어 경이 탑승한 기가스가 빠른 속도로 오우거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얼마 안 남았다.
그리고 지금 오우거의 시선을 끌는 헤인 경은 그 이야기를 듣고 이를 꽉 깨물었다.
‘조금만 더 버티자!’
우어어!
성난 오우거의 공세를 피하기 위해 격렬하게 움직이는 포비어. 그런 포비어를 돕기 위해 다른 기사들이 투척 무기를 던지고, 활을 쏘았다.
그런데 오우거는 헤인 경에게 제대로 꽂혔는지, 주변의 방해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헤인은 투정을 부리거나,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역할에, 본분에 충실했다.
‘피한다.’
후웅!
일단 오우거가 휘두르는 몽둥이를 피했고.
파밧!
재빨리 스텝을 밟으며 오우가 밑으로 지나갔다. 오우거의 덩치는 그 신장만 4미터가 넘어간다. 때문에 움직임의 반경이 클 수밖에 없고, 그 점을 노려서 상대해야 한다.
만약 직선거리를 놓고 달리기 시합을 하듯 상대하면, 몇 걸음 안에 오우가의 발에 밟힐 것이다.
원을 그리듯, 움직이는 게 인간이 오우거를 상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유일한 방법이라고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는 법.
애초에 오우거는 인간이 상대할 수 없는 몬스터다. 그런 몬스터를 인간이 상대하는 건…….
“크윽!”
애초에 무리다.
“젠장! 헤인 경을 도와라!”
“팔이 잡혔군!
순식간이었다.
헤인 경의 움직임에 익숙해진 오우거는 헤인 경이 자신을 스쳐지나가자, 원숭이마냥 긴 팔을 이용해 헤인 경을 잡으려고 했다. 헤인 경은 그걸 피하려고 했지만, 오우거가 좀 더 빨랐다. 오우거가 기어코 헤인 경의 팔을 잡은 것이다.
팔이 잡힌 헤인 경! 오우거는 그 상태로 헤인 경을 입 안으로 넣어 잘근잘근 씹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헤인 경은 그 누구보다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그 누구보다 침착하고, 냉철한 판단을 내렸다.
푸홧!
“헉!”
“헤, 헤인 경!”
헤인 경, 그가 제 검으로 오우거에게 잡힌 자신의 팔을 잘라버렸다. 그리고는 바닥에 착지했다.
푸후후!
잘려나간 팔의 절단면에서는 피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오우거의 입에 먹히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오우거 역시 이번에는 살짝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오우거는 막 입에 넣으려던 헤인 경의 팔을 신경질 난다는 듯 그냥 내던졌다.
쿠웅!
그와 동시에 드디어 기다렸던 것이 등장했다.
번쩍!
“기가스다!”
“포비어 경이 왔다!”
기가스의 등장! 그와 동시에 기사들은 전장에서 빠르게 이탈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들이 시간을 벌 이유가 없다.
퇴각하는 기사들. 그런 그들의 사이에는 헤인 경이 축 늘어진 채 끌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