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4.
발표식은 담담하게 진행됐다. 그룹 TH 공연은 없었다. 한석균과 그의 후계자 눈 밖에 났는데 담담하게 공연을 할 정도의 프로 정신을 가진 놈들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조차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문수는 한석균 옆에 앉았다.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그 둘은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게 힘들 정도였다.
그 외에 문수가 기억하는 건 별로 없었다. 몇 가지 발표가 더 있었을 뿐이었다.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석균이 문수에게 권력이양을 한다는 것. 그리고 문수로 하여금 후계자 수업을 받게 하겠다는 것. 법적인 부분은 이미 검토가 끝난 뒤였다.
발표식이 끝나고, 세상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을 때.
반대로 그 소란의 장본인인 한석균과 문수는 담담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로이드에게 보고는 받았네.”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죽을 위기는 별로 없었더군.”
“직접 가보시면 그런 이야기는 안 나오실 겁니다.”
문수는 말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정말 목숨이 위협 받을 정도의 위기는 없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정말 죽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제르트 자작가는 전쟁이 계속됐고, 자작가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문수가 직접 전장에서 뛰었다.
전투가 끝나면, 곧바로 포비어와 기가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후에는 로이드와 대화를 통해 얻은 정보를 분석했다. 거기에 일단 시험 삼아 문수가 가져갔던 종자와 씨앗을 이용한 농작물 재배도 들어갔다. 여기에 틈이 나면 이제르트 자작과의 대화를 통해 영지의 제도 등을 바꾸기 위한 토론까지.
몸이 백 개라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를 보며 한석균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거기서 태어난 사람일세. 나보고 거길 직접 가보라고?”
“아, 죄송합니다.”
실수다.
한석균은 그렇게 돌아가고 싶어 했던 고향 땅을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는 꼴이라니? 비아냥거림하고 뭐가 다르단 말인가?
“죄송할 것까지야. 사실 나도 고향 땅이 그리운 건 사실이지만, 거기 가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네.”
“예?”
“나라고 자네랑 다르겠나? 살려면 여기가 제일이다. 더군다나 난 여기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야. 이제 명줄도 얼마 안 남은 내가 중세 시대에서 사는 게 편하겠나, 아니면 지금 여기서 사는 게 편하겠나?”
“그야 당연히 여기가 낫긴 하죠.”
“나은 정도가 아니라, 천국이지. 내가 걱정하는 건, 단지 내 가문이 몰락하는 것뿐이네. 그것만 해결된다면 굳이 내가 직접 케르빈 월드로 넘어가서 고생할 이유가 없지.”
“그렇습니까?”
“그보다 영지 사정은 어떤가? 로이드로부터 이야기는 들었지만, 솔직히 너무 갑작스러워서 감이 안 잡히는군.”
한석균이 본론으로 돌아왔다. 문수도 자세를 고쳐 잡았다.
“문제는 기가스 같습니다.”
“흐흐흐…….”
기가스란 말에 한석균은 일단 웃고 봤다.
“설마 그 놈이 완성되었을 줄이야.”
“……알고 계셨습니까?”
“그런 작품이 설마 툭, 하고 등장했겠나? 예전부터 어느 정도 구상 정도는 잡혀있었지. 내가 대마법사로 활약했을 땐 개발구상 단계쯤이었지. 그런데 설마 이 정도까지 완성도를 지닐 줄이야.”
“어떻게 방법이 있겠습니까?”
“마음 같아선 골조부터 장갑까지 전부 여기서 제작한 후에 투입시키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할 터. 여기서 만들 수 있는 건 아마도 마나동력 장치 정도뿐이네.”
기가스를 움직이는 힘의 근원, 마나동력.
사실상 기가스의 전력 중 절반은 마나동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기가스 개발자들이 가장 핵심적으로 연구를 하는 것보다 보다 많은 마나를 생성하고, 출력이 가능한 마나동력을 만드는 거니까.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고 자시고, 지금 자네는 케르빈 월드에서는 꿈도 못 꿀 마나 관련 기술력의 결정체를 차고 있지 않은가?”
차고 있다?
문수가 저도 모르게 노크 클락을 찬 손목을 들었다.
“이거 말입니까?”
“차원이동마법이 애들 장난 같나? 차원이동 한 번 할 때 이동되는 마력의 양이면, 1세대 기가스를 3년은 작동시킬 수 있을 걸세. 3세대 기가스라면 1년 내내 작동이 가능하지.”
어느 정도 기가스에 대해서 알게 된 문수는 놀라움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당장 기술 개발에 들어가면, 한 달 아내에 6배 급 출력에 한 번 충전으로 최소 반년은 가동 가능한 마나동력원을 만들 수 있네.”
“대, 대단하군요.”
페스로 제국은 3세대 급, 즉 3배 급 기가스로 전장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정도다.
그런데 6배 급 기가스라고? 그럼 상대가 안 된다. 더군다나 한 번 충전에 6개월 가동이면, 전장에서는 절대무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사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마나동력원이 아니네. 자네도 공부 좀 했으니 알 거 아닌가?”
“그렇죠.”
그러나 문제가 있다. 마나동력원은 소형화시켜서 직접 들고 케르빈 월드로 이동시킬 수 있지만, 다른 부품은 그게 아니다.
“골조와 장갑. 이 부분은 케르빈 월드 내에서 구하는 수밖에 없네. 더군다나 어설프게 만들면 오히려 과다한 출력에 부품 수명만 줄어들 뿐이지.”
출력이 좋다고 모든 자동차가 스포츠카가 될 수 있는가?
당연히 아니다.
그 출력을 동력으로 바꾸고, 버텨줄 본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5미터가 넘어가는 기가스를 직접 만든 후에 차원 이동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게 가능하면 차라리 미사일을 운반하는 게 더 좋을 것이다.
“그래도 케르빈 월드에서 제조 가능한 몇 가지 합금이 있네. 그걸 이용하면 장갑의 방어력을 극상승할 터. 그 외에 다른 제조 방법 정도는 충분히 가져갈 수 있지. 문제는 그걸 소화해줄 개발자야.”
“그렇다면…….”
“뛰어난 개발자, 즉 마법사와 드워프를 섭외해야지. 다음번에 자네가 해야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네.”
“알겠습니다.”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문수는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는 노크 센터로 향하고 있었다.
한석균의 후계자로 공식발표가 난 이후에 문수는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일단 후계자 수업이 가장 중요했다.
“자네가 그냥 허울뿐인 후계자로 남고 심다면 만류는 안하겠네. 하지만 이 세상은 그리 가소롭지 않아. 내가 죽고 난 후에도 자네가 허울뿐인 후계자라면 금방 하이에나에게 뜯긴 시체 꼴이 될 걸세.”
사실 문수도 나름 꿈이 있었다. 아니, 문수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강한 권력을 가지고, 대단한 위치에 올라, 세상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그렇게 될 수 있는 확실한 기회가 생겼는데, 귀찮다고, 피곤하다고 그걸 피할 정도로 문수는 게으른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열정을 다해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후계자 수업을 받음과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온 유명한 기업인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매체에서만 볼법한 재벌 총수들이 앞 다투어 문수 앞에 섰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직접 보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그들이, 문수와 먼저 악수하기 위해 몸싸움을 할 정도였다.
“하하, 내 딸이 좀 더 어렸으면 자네에게 시집을 보냈을 걸세.”
“한 회장님이 드디어 후계자를 점지하셨군. 그래, 한 회장님 안목이라면 확실하시겠지.”
“곤란한 일이 있을 땐 언제라도 연락하게. 도와줄 수 있다면 뭐든지 도와주겠네.”
거기서 문수는 한석균이 이룩한 명성과 권력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 수 있었다.
‘세계도 그렇지만, 대한민국 땅은 한 회장님이 지배하는 거나 다름없구나.’
정치, 경제, 문화.
한석균의 입지는 그 전반에 걸쳐 강력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잘만 하면 이게 내 것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한석균이 이룩한 위대한 결과물을 이어 받을 기회가 왔다. 제2의 한석균이 될 수 있는 찬스가 온 것이다.
‘정신 차리자.’
일생일대?
그런 게 아니다. 수천 년에 단 한 번, 딱 한 명만이 이룰 수 있는 수준의 기회다.
그런 기회를 놓치면 그건 게으름뱅이 따위가 아니라 그냥 병신이나 다름없겠지.
한편 공식적인 자리 외에도 비공식적인 자리로도 접근시도가 이루어졌다. 특히 연예계 쪽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박문수의 존재는 매력적인 존재, 그 이상이었다.
한석균 회장의 후계자이며, 나름 훤칠한 키. 거기에 젊은 나이! 여기에 미혼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누구든 문수의 원나잇 상대라도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런 그들의 유혹에 넘어갈 정도로 문수가 어수룩했다면 후계자 자체도 되지 않았을 터.
문수는 대동하고 다니던 비서들에게 말했다.
“앞으로 나한테 공식적인 방법이 아니라,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한 번 만나보자, 이런 스팸 문자 같은 거 보내는 인간들은 확실하게 응징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대처, 대응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응징. 이 두 글자 그대로 하라는 겁니다.”
강하게 나가야 한다. 어설픈 모습을 보였다가는 그 상황에서 바로 무너질 테니까.
그 경고 후에 며칠이 지나자, 더 이상 그런 시끄러운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한석균의 연락이 왔다.
- 노크 센터로 오게.
노크 센터에서 한석균은 몇 가지 설명을 했다.
“마나동력원 개발은 3주 후네. 그 직후 케르빈 월드로 이동하도록 하겠네. 동시에 자네가 가져가야 할 게 있네.”
한석균이 말과 함께 꺼낸 건 의료키트였다. 물론 보통 수준의 의료키트가 아니었다. 보기엔 등에 짊어질 만한 가방 크기지만, 이 가방 안에 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개흉수술도 가능했다.
물론 보통 병원의 수술실보다는 설비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 의료키트를 다루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있다.
“이리아, 그 아이를 치료해줘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자네가 의술을 제대로 배워야 하네.”
문수는 어느 정도 이런 미션을 짐작하고 있었다.
문수가 가져간 약과 힐링 마법으로 인해 이리아는 아직 죽을 걱정을 할 때는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목숨만 부지하는 수준이었다. 건강해지기 위해선 수술이 필요했다.
특히 심장 수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로이드의 진단에 따르면 심장에 여러 문제가 생겨, 복잡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심장만 고칠 수 있다면, 그 후에는 내과진료를 통해서 충분히 건강해질 수 있다고 검진했다.
그러나 심장 수술이 애들 장난인가?
“3주 만에 심장 수술이 될 정도의 공부가 가능하겠습니까?”
“그건 중요치 않지.”
“예?”
“중요한 건, 어떻게든 자네가 3주 만에 배운 걸 가지고 이리아의 심장을 고쳐줘야 한다는 거지. 안 될까, 이런 의문은 필요 없네. 자네가 가져야 하는 건, 안 되면 되게 하라, 이런 각오네.”
부담감을 팍팍 안겨주는 말이다.
하지만 문수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당장 시작하죠.”
문수.
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나 이미 많은 성장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