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3.
큐브 빌딩에 문수가 도착했을 때 이미 한석균이 수행원들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행원들의 모습에 문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대놓고 저를 마중 나오셔도 되는 겁니까?”
“그보다 자네 꼴이 더 웃기군. 어제 비가 제법 오긴 했지만 오늘은 날씨가 맑은 걸로 아는데.”
한석균은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문수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문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좋은 사정은 아닙니다. 그보다 무슨 일입니까, 대체?”
“별 거 아닐세.”
“아, 제가 보낸 보고서는…….”
“일단 여기선 그것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말지. 보는 눈도, 귀도 많으니까. 무엇보다 지금 자네는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네.”
해야 할 일이란 말에 문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뭡니까?”
문수가 의문을 가질 무렵, 한석균 뒤에서 사람 무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마치 기사가 병사를 이끌고 전쟁에 나가듯, 몇몇 사람이 선두에 섰고 그 뒤로 무수히 많은 이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문수는 선두에 선 이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다름 아니라 한석균이 소유한 기업의 사장 또는 그에 버금가는 직책을 가진 자들이었으니까.
문수는 거기서 어렴풋이 직감했다.
‘나를 소개하려는 거구나.’
현재 문수의 직책은 한석균의 후계자다. 그러나 아직 세상 그 누구도 모르는 직책이다. 한석균의 측근들 중 극소수의 인물들만 알고 있는 사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맞네. 오늘 자네를 내 후계자로 정식 소개할 생각이네.”
“세상에 말입니까?”
“이 정도로 알리면,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는 법이지.”
“그런데 왜 이렇게 갑자기…….”
문수는 모르겠지만, 지금 여의도로는 세계 모든 이들의 관심이 집중된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 최고의 재벌이자,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한석균 회장의 후계자 발표라니! 한석균 회장이 이룩한 엄청난 경제적 권력을 계승할 자가 등장하는 거다.
“자네에게 말은 안했지만 원래부터 계획을 잡고 있었네. 자네가 돌아오면 공식으로 후계자임을 알리겠다고.”
“꼭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나는 이 자리에 올라오면서 한 가지는 분명히 했네. 그게 뭔지 알고 있나?”
한석균이 웃으며 말했다.
“논공행상. 공을 세운 자에겐 상을 줘야지.”
그 말을 들은 문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와는 다르게 문수의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나를 완전히 엮을 모양이군.’
한석균 입장에서는 문수가 배신하지 못할 만한 떡밥을 물려주는 것이다. 문수는 좋게 생각했다.
‘대가를 받는다고 치자.’
굳이 한석균을 배신하고픈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군말 없이 받아들이는 게 좋을 터.
‘그보다 부모님이 이걸 아시려나 모르겠네.’
한편으로는 뉴스로 자식을 보게 될 부모님이 걱정되기도 했다.
‘아니, 그전에 날 알아보실 수나 있으시려나?’
문수는 긴장했다.
지금 문수는 예전과 전혀 달라졌다. 키도 컸고, 몸매도 달라졌다. 거기에 느낌 자체도 예전과 매우 달랐다. 솔직히 옷만 바꿔 입어도 달라지는 게 사람 인상인데, 문수 같은 경우는 성형 이상으로 느낌이 달라졌다.
그냥 이름만 같은 인간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뭐 그냥 후계자라고 발표만 하면 끝입니까?”
“음? 그건 모르겠군. 뭐 나야 후계자 발표만 한다고 부하 직원들에게 말했으니까. 준비는 그들이 하지. 가만 보니까 가수도 불러서 화려하게 한다고 하더군.”
“가수요?”
“이름은 나도 모르네.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쓸 정도로 한가한 몸은 아니잖은가? 그러는 자네가 아는 가수가 있는가? 있으면 그 가수를 부르도록 하지. 적어도 자네를 위한 날이기도 하니까.”
원하는 가수라…….
예전에 글을 쓸 때부터 노래를 즐겨 듣는 타입이긴 하지만 솔직히 요즘 아이돌이라 불리는 가수들은 싫다. 그들 노래는 집중력만 방해한다. 때문에 문수가 즐기는 음악들은 오래 된 팝송이나 클래식 계열. 물론 요즘 가수들 중에서 좋아하는 가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전부 해외에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이들이다.
한석균이 부른다면야 못 부를 이유도 없지만, 지금 당장 부른다고 올 수 있는 상화잉 아니라는 거다.
“됐습니다. 지금 이 꼴로는 노래를 듣는 것 자체가 우습겠습니다.”
“쯧쯧. 그 양복이 얼마나 비싼 건데.”
“비싼 겁니까? 딱히 상표도 없어서 적당한 놈인 줄 알고 가져 왔는데…….”
“상표가 없을 수밖에. 그걸 만드는 장인이 상표 따윌 부착하는 걸 용납하질 않거든.”
“그런 장인도 있습니까?”
“간단한 거네. 자네가 최고의 요리사라고 생각해보게. 그런 자네의 요리에 전 세계적으로 많이 보급된 유명 패밀리 레스토랑의 타이틀을 붙이고 싶나? 세상에서 소위 명품이라고 쓰는 것들은 명품도 아니지. 상식적으로 장인이란 개념 자체가 상대적인 건데, 세계 최고의 장인이라고 친다면 10명도 안 될 터. 그런 그들이 혼신을 다해 제품을 만든다 치면 1년에 그 제품이 몇 개나 나오겠나? 100개?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적어도 세상에 수천, 수만 개 팔린 걸 명품이라고 부르진 못하겠지.”
“대단한 정장이었군요.”
“아무렴. 참고로 그 장인은 내 주문만 들어주네. 어디 석유 재벌 애들도 그 장인에겐 오퍼를 못 내지.”
그 순간 문수는 살짝 화가 났다.
‘그 새끼들, 번호판 외웠으니까 두고 보자.’
이런 장인의 예술품에 물을 끼얹고, 세탁비는 커녕 사과조차 하지 않고 병신이라고 욕까지 한 놈들에 대한 분노.
“갈아입겠나?”
“그야 당연히…….”
그때였다.
큐브 빌딩 내에 위치한 여러 개의 홀 중 한 곳. 한석균 회장의 후계자 발표식이 진행될 그 무대 위가 시끌벅적했다.
쿵쿵!
신나는 비트 음악과 함께 가수들과 백댄서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이번 발표식에 초대된 가수인 모양이다.
문수는 그들을 보며 두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때 그들이 한석균과 그 일행의 등장에 리허설을 그만뒀다. 인사라도 하려는 걸까? 땀을 닦고, 단정한 자세를 취한 그들이 마치 왕을 접하는 노예의 자세마냥 저 자제를 취한 채 한석균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인사라도 하려는 걸까?
그때 어미 오리를 쫓아오는 새끼오리마냥 한석균을 따라오던 이들 중 한 명이 한석균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요즘 한국에서 제일 인기가 좋은 가수 그룹 TH입니다.”
“정 사장. 내가 그걸 일일이 알아야겠나?”
무뚝뚝한 한석균의 반응.
“다름 아니라, 하진성 전무의 아들이 저 그룹에 속해있습니다.”
“아아, 하진성 전무. 저번 이라크 수주에서 아주 큰 역할을 했지. 실력이 좋은 친구야. 이번 이라크 수주 프로젝트가 큰 건 아니었지만, 차차 좀 더 큰일을 맡겨도 될 만한 친구지.”
“명심해두겠습니다.”
대화를 듣던 문수는 조금은 기가 찼다.
‘그러니까 아버지 인맥으로 내 발표식에 나와서 공연을 한다는 건가? 뭐, 후계자 발표식이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을 테니, 얼굴 팔아야 하는 가수 입장에서는 최고의 무대긴 하겠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솔직히 아버지 배경을 이용해서 유명세를 타든 말든, 한석균이 뭐라고 안 하는데 문수 자신이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지 않은가? 더군다나 딱히 신경 쓸 이유도 없다.
저들이 문수에게 돌을 던진 것도 아니고.
“안녕하십니까!”
이윽고 5인조 그룹 TH가 한석균 회장 앞에 섰다. 그들은 연습이라도 한 듯 동시에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였다.
한석균은 그런 그들을 보며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들 중 한 명이 허리를 들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진성의 아들 하서윤이라고 합니다.”
정말 귀여운 외모를 가진 남자. 목소리도 사글사글하다. 가수할 만한 목소리다.
그런 하서윤이 한석균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라도 하자는 건가?
“아.”
그때 갑작스레 문수가 입을 열었다. 좌중의 시선이 문수로 향했다. 문수는 그런 주변의 시선을 보지 못한 듯,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아까 그 목소리네. 신호위반하고, 나한테 물 튀긴 다음에 병신이라고 지껄였던 목소리. 그게 당신이었나?”
문수의 그 말에 좌중의 분위이가 가라앉았다.
놀란 하서윤이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너, 너 누구야? 누, 누군데 헛소리야?”
“나?”
씨익!
그 순간 문수가 세상에서 가장 비열하고, 야비하고, 치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분 후계자.”
문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 사장.”
한석균이 방금 자신에게 말을 건넸던 정 사장이란 인물을 불렀다. 정 사장이란 인물은 얼굴이 사색이 된 채, 일단 하서윤을 한 번 강렬하게 노려본 후에 기세를 누그러뜨리며 한석균 앞에 고개를 숙였다.
“예.”
“공과 사는 분명히 할 것. 이번 일로 괜히 하진성 전무에게 불이익이 가지지 않도록 처리하게.”
“명심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 사장이란 인물은 기필코 하진성 전무를 불러다 조인트라도 깔 것이다.
자식 교육 제대로 하라는 소리와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