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5.
문수르의 등장.
그러나 막상 이제르트 자작가에 큰 변화가 온 건 아니었다. 문수르는 일단 탐색부터 시작했다.
“여기가 농지입니까?”
“아무래도 바로 앞에 테블스 산맥을 두고 있어서 그런지, 농지확보가 가장 힘드네.”
이제르트 자작가가 가진 농지의 크기는 이제르트 자작령의 크기에 비하면 꽤나 적었다. 하지만 의외로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한 해 소모되는 식량의 양은 많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지민이 적었기 때문이다.
“우습지만, 영지민이 적어서 이제까지라도 버틸 수 있었지.”
이제르트 자작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문수르는 그런 이제르트 자작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흙을 만져봤다.
‘로이드. 토질은 어때?’
- 괜찮습니다. 다른 지역의 토질보다 훨씬 우수합니다. 몇 가지 농법만 추가로 한다면, 기름진 땅이 될 듯합니다.
‘그럼 성 내부의 스캔이 끝나는 대로 테블스 산 근처도 스캔 좀 해봐. 농지로 쓸만한 지역이 있으면 체크해두고.’
- 알겠습니다.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제르트 자작령이 보유한 농지는 적었지만 반대로 토질 자체는 매우 우수했다.
‘종자를 가져오긴 했지만…….’
일단 영지 부흥을 위해 문수르는 적지만, 종자와 씨앗 몇 개를 가져왔다.
어스 월드의 엄청난 과학기술력을 이용해 만든 것들로, 케르빈 월드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우수한 것들이었다. 케르빈 월드에서 똑같은 땅에서 1을 수확한다면, 아마 문수르가 가져온 것들을 이용해 수확을 시작하면 5를 수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한 번에 가져올 수 있는 물품이 한정된 만큼, 종자나 씨앗도 한계가 있었다.
천천히, 오랜 시간을 들여 종자를 키우고 점진적으로 수확량을 늘려가야 할 것이다.
‘이건 시간이 해결해줄 테고.’
작물이 자라는 시간이나 수확시기를 인위적으로 줄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농지 확보도 시급해.’
그러나 수확량이 좋아진다고 해서, 농지 확보를 나중으로 미루는 건 미련한 짓이다.
‘테블스 산맥을 개간해야 한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어떻게든 농지 확보를 위해선 테블스 산맥을 개간할 필요가 있었다.
‘기왕이면 광산도 개발하고. 숲을 개간하면서 불로 태우기보다는 목재 확보도 염두에 두어야겠지.’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긴 하지만 문수르는 계획을 세울 때마다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계획은 장대한데 현실은 시궁창이군.’
테블스 산맥을 개간한다? 말이 쉽지, 그 대단한 페스로 제국의 기가스 파일럿도 학을 때는 곳이 테블스 산맥이다. 여길 개간하려면 진짜 콩탄 왕국을 합친 것만큼의 전력이 필요하다.
‘천천히 해야지.’
한편 이제르트 자작은 영지 내부를 돌아보며, 모든 것을 문수르에게 조목조목 설명해줬다.
그런 모든 설명을 들었을 때 문수르는 일단 가장 최우선으로 해야 할 목표를 잡을 수 있었다.
“기사분들을 모아주십시오.”
“기사단을 소집하란 건가?”
“예.”
“왜 갑자기…….”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까지 대화와는 동떨어진 듯한 문수르의 부탁. 이제르트 자작은 의구심이 들었으나.
“알겠네.”
이미 문수르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한 상황이었다. 이제르트 자작은 조금의 반문이나, 질문 없기 곧바로 성으로 돌아간 다음에 기사단을 소집했다.
각자의 일로 분주하던 일곱 명의 기사들이 재빠르게 이제르트 자작 앞에 모였다.
그들이 모인 장소는 내성에 위치한 연무장이었다. 허름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관리한 흔적이 보이는 연무장에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고, 이제르트 자작이 그 앞에 섰다.
그렇다면 문수르는?
휘익휘익!
연무장 위에서 창을 휘두르는 인물. 그가 바로 문수르였다. 창을 몇 번 휘두르던 문수르는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이제 오러에 익숙해진다. 체내에 오러가 축적되는 속도도 만족스럽고.’
이미 진즉에 마나 호흡법을 익히고 있던 문수르의 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속도로 단전에 마나가 쌓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나를 오러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에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윽고 자신의 몸 상태 점검을 끝낸 문수르가 입을 열었다.
“이중에서 오러를 쓸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문수르의 질문에 기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이제르트 자작을 바라봤다.
대답을 할까요?
눈빛으로 이제르트 자작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고.
끄덕끄떡.
이제르트 자작 역시 말 대신 행동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젊은 기사가 나섰다.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나이에, 금발 머리칼을 스포츠머리처럼 바짝 짜른 사내.
젊지만, 이제르트 자작가에서 가장 강력한 실력자이며 기가스의 파일럿이기도 한 엘렉 포비어였다.
“이제르트 자작가 내에서 오러를 쓸 줄 아는 건 저뿐입니다. 애초에 기가스 파일럿의 최소 조건이 바로 오러 나이트가 되는 것입니다.”
오러 나이트.
오러를 쓸 줄 알며, 오러 블레이드를 날릴 수 있는 자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를 오러 마스터라고 부른다.
오러 마스터란, 오러를 자유자재로 쓸 뿐더러, 오러 소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실력자로, 대륙 전체를 뒤쳐도 오러 마스터의 숫자는 고작 12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오러 마스터 위에는 한 가지 단계가 더 있다.
바로 그랜드 마스터!
오러에 통달한 이들은 현재 대륙에 단 두 명만이 존재한다. 참고로 대륙 역사상 동시대에 두 명 이상의 그랜드 마스터가 존재했던 적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본래는 한 세대에 그랜드 마스터가 한 명 등장하는 것조차 드물었을 정도였으니까.
참고로 오러 나이트도 귀중한 전력이다. 거신병기 기가스를 조종하려면 최소한의 조건이 오러 나이트여야 하는데, 이런 오러 나이트는 백작가 정도 되는 명문가 휘하에도 많아봐야 세 명을 넘지 못한다. 보통 남작가나 자작가는 어설픈 오러 나이트 한 명을 보유하는 것조차 힘들어 한다. 애초에 오러 나이트쯤 되면, 기사 작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작위…… 자작이나 남작 작위도 충분히 받을 수 있으니까. 굳이 귀족 아래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필요가 없는 거다.
이제르트 자작가가 오러 나이트 엘렉 포비어를 보유할 수 있었던 건 정말 하늘이 준 천금 같은 기회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포비어 경과 문수르의 시선이 마주쳤다.
문수르는 씨익 웃었다.
“기사든, 뭐든 일단 힘 쓰는 부류들이 무리를 지을 때 가장 필요하게 뭐라고 생각합니까?”
문수르의 질문에 포비어는 묵묵히 대답했다.
“서열입니다.”
“잘 아시는군요.”
까닥까닥!
문수르가 손짓을 했다.
“올라오십시오.”
“……저와 대련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무리 이제르트 자작님이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셔도, 마음으로 납득하는 거랑 몸으로 따르는 건 엄연히 다르지 않습니까? 저도 그냥 허투루 당신들 머리 위에 군림할 생각이 없습니다.”
문수르의 말에 기사들 몇몇이 뜨끔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렇다.
기사들은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라면 어느 정도 고개를 숙이고, 수긍하고, 따른다.
하지만 고작 태어난 배경이 좋다는 이유로 자신들 위에 군림하는 이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고역이나 다름없다.
물론 인간적으로 혹은 성품에 반해서 고개를 숙이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사실 귀족들 중에는 그런 부류의 인물들보다는 대부분 제멋대로에다가 욕심 많고, 그런 주제에 자기 능력이나 분수를 모른 채 남들 위에만 군림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자유기사 같은 게 생기는 거다.
하물며 그런 귀족들을 상대로 아첨 할 수 있고 고개 숙일 정도의 비위를 가진 기사라면 이제르트 자작을 섬길 이유가 없다. 허울에 빠진 다른 귀족들을 섬기는 게 훨씬 낫다.
포비어는 이제르트 자작을 바라봤다. 이제르트 자작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츠릉!
이제르트 자작의 허락에 포비어 경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실력을 들었습니다. 제 아래가 아니라 여기고, 전력을 다해 공격하겠습니다.”
쉬익!
포비어 경은 말과 함께 자신의 몸을 화살처럼 쏘았다. 포비어 경의 움직임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이윽고 포비어 경의 검이 문수르의 목젖을 찌르기 위해 날라왔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흔들림도 없는 그 공격은 찌르기의 진수라고 해도 될 정도로 대단했다.
카앙!
문수르는 창을 회전시키며 포비어의 검을 튕겨냈다.
쉬익, 쉬익!
하지만 포비어는 곧바로 자세를 잡은 채 계속해서 공세를 퍼붇기 시작했다.
베기, 찌르기.
두 가지를 절묘하게 섞은 포비어의 공격은 마치 나비와 벌 수십 마리가 동시에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 포비어의 공격에 대한 문수르의 대처법은 단순했다.
후웅, 후웅!
그저 무식하게 창을 휘두르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나비와 벌을 내쫓았다.
단순했지만, 그래서 위력적이었다.
카앙, 카앙!
문수르는 포비어의 모든 공격을 튕겨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포비어의 움직임에서 허점을 찾았다.
물론 문수르 개인의 능력 덕분만은 아니었다.
- 다음 공격은 왼쪽에서 옵니다.
- 옆구리를 조심하십시오.
- 오른쪽 공격은 가짜입니다. 왼쪽 공격도 가짜. 다음 공격은 진짜로 사료됩니다.
‘오케이!’
현재 문수르는 로이드와 함께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전투에서 로이드의 도움은 결정적이다 못해 사기에 가까웠다.
상대방의 근육을, 호흡을, 움직임을 포착한 다음 내놓는 로이드의 판단은 그 적중률이 99퍼센트를 넘어갔다.
쉽게 말해서 문수르는 포비어가 어떻게 공격할지 이미 알고 대처를 하는 셈이었다.
“큭!”
그러나 그걸 알 리가 없는 포비어는 전부 막히는 자신의 공격에 이를 물었다.
솔직히 이기고 지는 건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포비어가 승부수를 던졌다.
“오러를 사용하겠습니다.”
짤막한 경고를 내던진 포비어의 검에서 푸르스름한 오러가 맺히기 시작했다.
“오오!”
“포비어 경이 직접 오러를 쓰는 건 오랜만에 보는군.”
기사들은 이 박진감 넘치는 전투를 보고 흥분했다. 기사들의 싸움을 보는 것만으로도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