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4.
임시방편으로 약을 처방했다. 그제야 로이드는 문수르의 말을 듣고 따라주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인공지능.”
- 욕은 자제해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뛰어난 인공지능이면 좀 융통성 있게 판단해야지.”
문수르가 갑작스레 이리아의 치료에 나선 건, 그저 자신이 원해서 한 건 아니었다.
사실 이제르트 자작 슬하에는 자식이 둘이다. 그리고 둘 중 한 명은 남자아이다. 상식적으로 남아라면 가문을 이어야 하니까 중요하지만, 여아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물론 살릴 수 있으면 살리는 게 좋겠지만, 문수르의 반응은 단순히 치료를 한다, 수준을 넘어서 호들갑에 가까운 것이었다.
문수르의 이런 반응은 로이드 때문이었다.
‘로이드가 도움은 많이 되지만…… 반대로 이래저래 거슬리는 부분도 있군.’
- 저는 거슬리는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네 존재 자체가 거슬리거든?”
- 이해할 수 없군요. 제 시스템으로 인해 얻으시는 이익이 엄청난 것으로 판단됩니다만.
“그래, 그런 네놈 때문에 내 행동에 제약이 생기지.”
로이드 시스템은 케르빈 월드 내에서의 문수르의 활동을 크게 도와주는 역할도 하지만, 이런 로이드 시스템에는 최우선으로 여겨지는 원칙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이제르트 가문의 문제를 최우선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만약 이제르트 자작이 위엄에 빠진 상황에서 문수르는 이제르트 자작을 구하기 위한 행동에서만 로이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 상황에서 다른 걸 하려고 해도, 로이드는 결코 문수르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이다.
한석균 입장에서는 혹시 모를 박문수의 배신에 대비하기 위해 무리해서 넣은 원칙이었다.
그리고 만약 계속해서 문수르가 이제르트 자작가의 위험에 대해서 외면할 경우에 로이드는 자신이 관여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시스템을 정지시키고, 망가뜨려 버린다.
쉽게 말해 로이드 시스템은 양날의 검이다. 이제부터 지원될 대부분의 시스템을 보다 쉽고 효율적으로 쓸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동시에 최우선의 과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단숨에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양날의 검!
“그건 그렇고 성 내부는 스캔 해봤어?”
- 다시 프로그램 작동 중입니다.
“젠장, 이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문수르가 잽싸게 움직인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러한 경우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제르트 자작이 부탁하기 전에, 문수르는 로이드에게 명령을 내렸다.
GPS시스템을 이용해 성을 스캔하라고.
하지만 아리아 이제르트의 상황을 파악하는 순간, 문수르가 앞서 내렸던 모든 명령은 후순위로 밀려났다.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심각해.’
지금이야 별 거 아니라고 쳐도, 만약 정말 중요한 작전 또는 계획을 실행하던 중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치열한 전쟁 속에서 GPS 시스템이 먹통이 된다면?
‘족쇄야, 족쇄.’
최악이다.
기껏 준비했던 전쟁을 한 번에 말아먹을 수도 모른다. 그렇다고 로이드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것도 쉽지 않다. 그게 싫어도 해야 한다. 로이드 시스템이 완성된 이후 한석균은 대부분의 지원품들을 로이드 시스템과 공조해야만 사용가능하도록 바꿨으니까.
사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어떻게든 이제르트 자작가의 식솔들을 지키라는 소리겠지.’
전쟁을 할 땐 하더라도 이제르트 자작가의 핏줄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안전을 보장하란 의미다. 그들의 목숨을 가지고 흥정을 하거나, 도박을 하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엇을 하든 일단 이제르트 자작가의 안정을 꾀한 다음에 진행해야 하다.
‘골치 아프군.’
문수르에게 좋을 거 하나 없는 사실이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일단 빨리 성부터 스캔 해.”
- 알겠습니다.
이제르트 자작은 일곱 명의 기사들을 불러다 말했다.
“문수르, 그는 내가 따로 특별하게 고용한 인물일세. 현재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 용병으로 왔으나, 단순한 용병이 아니네. 그러니 되도록 그분 앞에선 예의를 갖추고, 그분의 말을 내 말처럼 들어주길 바라네.”
기사들은 이제르트 자작의 말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기사들이라면 항변을 하거나, 질문을 했을 터.
하지만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사들은 대부분 보통의 기사들과는 조금은…… 아니, 많이 다른 편이었다.
일단 애초에 배경이 멀쩡한 이들이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사가 될 이유가 없다. 상식적으로 배경 멀쩡하고 실력 좋으면 다른 좋은 명문가의 귀족을 찾아가 기사가 되지, 죽을 위험이 높을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사가 될 이유가 없다.
이런 이유로 이제르트 자작가에 기사가 된 이들은 대부분 가문에서 버림받았거나, 배경이 볼품없는 자들이었다. 기사 밑에서 견습기사로 노예처럼 일했으나 배경이 없어 버림받거나 혹은 나름 번듯한 기사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서출이라 제대로 대접도 못 받고 버림받듯 가문에서 나온 이들. 이제르트 자작에게 고개를 숙일 만한 기사들은 그들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르트 자작은 자신을 찾아온 기사들을 사랑과 정성 그리고 열정으로 다스렸다.
봉급은 많지 못했지만, 이제르트 자작은 주군으로 모시기에는 너무나도 훌륭한 인물이었고, 그런 그의 인품에 반한 기사들은 이제르트 자작의 말에 딱히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문수르가 보여준 실력이었다.
수백 마리의 오크를 홀로 처지한 그의 능력은 솔직히 용병 따위의 것과 비교대상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제르트 자작이 이렇게 말하니 이해가 됐다.
‘그런 실력자가 용병이라니, 그럴 리가 없지.’
‘필시 비범한 능력자일 터. 하지만 아무래도 콩탄 왕국에서 눈 밖에 난 이제르트 자작가에 정당한 신분을 밝히고 오기는 힘들었겠지.’
‘그래도 다행이군. 그런 실력자가 자작님을 돕는다고 해서 손해볼 일은 없으니 말이다.’
어느 정도 앞뒤가 맞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 문수르는 내성에 위치한 저택 하나를 배정 받았다. 보통 크기의 저택으로, 한동안 사람이 쓰지 않은 탓에 이래저래 수리해야 할 곳이 꽤나 많았다.
“이것도 청소하려면 일주일 내내 고생해야겠군.”
저택을 살피던 문수르는 더러워진 내부를 이곳저곳 둘러봤다. 사실 청소를 그가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을 시키던, 하다 못해 청소기 로봇을 가져와서 시키던지 하겠지.
지금 문수르가 보는 건, 저택에 위치한 방의 개수, 방의 크기 등과 같은 정보들이었다.
“이곳엔 전략실 설치하고, 여기엔 서고 하나 넣고…….”
앞으로 주기적으로 케르빈 월드와 어스 월드를 오고가며 여러 물품들을 가져올 예정이다. 각각의 목적이 있는 만큼, 사전에 미리 목표를 잡아두고 기기들을 설치하는 게 효율적이다.
“문제는 기가스인데…….”
문제가 되는 건 기가스다.
현재 기가스를 본 적도 없지만, 괜히 거신병기가 아닐 터. 아마도 그 신장이 5미터 이상은 될 것이다.
기가스는 필요하다.
‘내가 아무리 강해져도 그런 거신병기를 상대로 이길 순 없겠지.’
언제가는 기가스를 보유해야한다는 건데, 그냥 만든다고 끝이 아닐 것이다. 주기적인 관리, 정비, 수리 등이 필요할 터.
‘여긴 힘들겠지?’
이 저택 내부에서 그런 기가스를 관리하는 게 가능할 리 만무하다.
아마도 기가스를 위해 따로 장소를 더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으챠.”
어느 정도 저택 조사를 끝낸 문수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먼지가 튀어올랐지만 개의치 않았다.
‘일단 뭐부터 해야 할까?’
이제르트 자작은 문수르를 받아줬다. 그렇다면 이제 보답을 할 차례다.
많은 계획을 준비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 모든 계획을 동시에 진행시키고 싶다.
하지만 준비해온 물품은 제한적이고, 물품 보급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가장 필요한 걸 찾아야 한다.
‘역시 가장 필요한 건 이리아 이제르트의 치료다.’
임시방편으로 이리아 이제르트를 치료했지만, 말 그대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언제 다시 건강이 나빠질지 모른다.
솔직히 그냥 나빠지는 거면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그녀의 목숨이 경각에 다다르면, 로이드가 문제를 일으킨다.
즉, 그녀를 치료해두지 않으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시한폭탄을 안고 하는 셈이 된다.
‘하지만 그녀의 치료를 위해서 노크 클락을 사용하는 건 좀 그래.’
가장 좋은 건 당장 노크 클락을 이용해 어스 월드로 이동해서 맞는 치료 물품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나 노크 클락을 사용하는 데에는 여러 제약이 있다. 일단 충전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리고 만약 어스 월드로 넘어가 있는 상황에서 이제르트 자작가에 문제가 생기면?
이번만 해도 그렇다.
오크가 땅굴을 파고 올줄 누가 알았겠나? 문수르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그의 등장이 아니었다면, 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제르트 자작가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혹시 모르는 거다.
특히 테블스 산을 앞둔 이제르트 자작가에게는 매일매일이 긴장의 연속이고 전쟁의 연장이다.
솔직히 그런 상황에서 고작 이리아의 치료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노크 클락을 쓰는 건 좀 그렇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는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지만, 지금까지 잘 버텼다. 아마도 힐링 마법 덕분이겠지.’
그리고 케르빈 월드의 의학은 의학이라고 부르기에도 뭐한 수준이지만, 힐링 마법이라는 엄청난 것이 있다.
웬만한 부상이나, 병은 힐링 마법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물론 안 되는 것도 있지만, 힐링 마법의 효능은 어느 부분에서는 어스 월드의 의학보다 훨씬 대단하다.
그렇게 되면 다른 방법을 이용하면 이리아의 치료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노크 클락을 쓰는 건 일단 미뤄두자.’
노크 클락을 써야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는 게 좋을 터.
무엇보다 지금 문수르에게 가장 시급한 건 하나였다.
‘무엇보다 어스 월드로 넘어가기 전에 기가스에 대한 정보를 닥치는 대로 수집해야 돼.’
거신병기 기가스.
이 새로운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든 정보를 얻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번 프로젝트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