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6화. 거래를 하다>
1.
밤이 깊어질 무렵.
이제르트 자작은 여전히 자신의 집무실에 박혀 있었다. 이제르트 자작을 모시는 집사, 칼루는 그런 이제르트 자작이 걱정이었다. 칼루 집사는 집무실 밖에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자작님 식사도 거르셨는데, 이제 주무시지요.”
“좀 더 있겠네.”
“몸 상하십니다.”
“미안하네. 하지만…… 좀 더 생각하고 싶네.”
이제르트 자작의 그 말에 칼루 집사는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말없이 집무실의 문앞에 선 채 이제르트 자작이 나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이제르트 자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죽기 전이었다. 악마의 동아줄이라도 상관없다. 난 내 믿음과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2.
“저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다른 차원…… 신이 만든 울타리 넘어의 세계에서 온 사람이다.”
문수르는 자신에 대한 모든 사실을 말했다.
“또한 저를 이 세계에 보내신 분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대마법사 할루이 이제르트 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이 사라지고 난 후 몰락했을 가문을 걱정하셨고, 결국 저를 보내 가문의 부흥을 원하셨습니다.”
“자, 잠깐!”
웬만한 이야기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위인이 바로 이제르트 자작이었지만, 문수르의 말은 그런 수준이나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이제르트 자작은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잡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지금 가장 이성적인 판단은 그 무엇도 아니라 문수르가 헛소리를 한다는 거다.
정말 이성적인 자라면 지금 문수르가 거짓말을, 사기를 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르트 자작 역시 충분히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다.
‘이 자가 나를 놀리는 건가?’
하지만 문수르란 자가 자신을 놀리거나, 자신을 속일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대체 왜?’
이제르트 자작, 그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빚도 많고, 그의 영지는 세상 그 누구도 원치 않는 최악의 땅이다. 조만간 그는 몰락할 운명의 소유자였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원한이 있다면, 그저 이 광경을 지켜보는 것으로도 원한을 풀기엔 충분하리라.
굳이 문수르 같은 인물이 이런 헛소리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래, 할루이 이제르트, 그분이시라면 신의 울타리를 넘는 것이 가능하셨겠지.’
또한 대마법사 할루이 이제르트는 9서클에 가장 가까운 마법사들 중 한 명이었다.
9서클이 무슨 의미인가? 신의 섭리, 이치에 간섭할 수 있다는 자격이고, 증거였다.
‘그래!’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건 문수르를 다짜고짜 내쫓거나, 하는 일이 아니었다.
“미안하네만 말만 듣고는 믿을 수가 없네.”
“이해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증거나 혹은 할루이 선조께서 남기신 무언가가 있나?”
문수르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음?”
이제르트 자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문수르가 꺼낸 것은 매우 반듯한 검은색 돌이었는데 반질거림이 보통 돌과는 차원이 달랐다. 유리라고 해야할까? 그러나 유리라고 하기에도 그 느낌이 묘했다. 참으로 신묘하면서도 기괴한 것이었다.
문수르는 이제르트 자작에게 그걸 건네줬다.
“한 번 만져보십시오.”
“어, 어……”
문수르로부터 그 괴상한 물체를 받자마자 이제르트 자작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기괴한 감각에 침음을 흘렸다.
“음!”
이런 재질은 처음이다. 단단한 듯하면서도 정말 너무나도 매끄럽고, 앞과 뒤가 다르다.
거기에 매우 정밀해 보이는 이음새 비슷한 부분…… 대체 이것의 정체가 무엇일까?
“신기한 돌이로군.”
“더 신기한 걸 보여드릴까요?”
문수르는 말과 함께 자신이 꺼낸 것, 스마트폰의 전원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시커멓던 화면 위에 화려한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헉!”
딸까닥!
놀란 이제르트 자작은 저도 모르게 스마트폰을 내팽겨 쳐버리고 말았다.
“마, 마법인가?”
빛을 내뿜는다니? 이런 건 마법진에 마력을 공급할 때나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저건 마도구란 의미인가?
“마법이 아닙니다. 제가 살던 세계에선 이걸 과학이라고 부르지요.”
바닥에 떨어진 스마트폰을 주운 문수르는 잠금 버튼을 풀었다.
“으헉!”
그 광경도 이제르트 자작에겐 놀라움, 그 자체였다. 검은 화면에 빛이 나더니 이상한 그림이 나오고 그 그림 위에 손가락을 가져가니, 반응을 하지 않은가?
문수르는 일단 스마트폰 기능 이것저것을 살폈다. 과연 뭘 보여줘야, 좀 더 강한 임팩트를 줄 수 있을까?
‘노래가 좋겠지.’
“혹시 음악 좋아하십니까?”
기습적인 질문.
“크흠…….”
그제야 허둥지둥하던 이제르트 자작이 헛기침과 함꼐 체면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어렸을 적은 악사들이나, 음유시인을 초대하고는 했네. 아버지께서 음악을 좋아하셨지. 하지만 알다시피 가문 사정이 이렇게 된 이후에는 그런 사치를 부린 적은 없었네.”
“뭐, 특별히 좋아하는 악기가 있습니까?”
“그냥 음악 자체가 좋네.”
쿵쿵!
그 순간 스마트폰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끄악!”
여기서 이제르트 자작은 집무실 구석까지 도망칠 정도로 기겁했다.
“소, 소리가 나다니!”
물체서 소리가 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예를 들면 통신 마법이나, 알람 마법이 걸려있는 마도구에서는 충분히 소리가 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소리는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문수르는 묘한 미소와 함께 스마트폰을 이제르트 자작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쿵쿵!
스마트폰에서는 연신 음악이 흘러나왔다.
“차, 참으로 청명하면서도 진중하고…….”
그 순간 이제르트 자작은 저도 모르게 뚝뚝, 눈물을 한두 방울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어…… 눈물이 왜?”
문수르의 노래가 이제르트 자작의 심장을 관통한 것이다.
그럴 법도 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
문수르가 고른 음악은 다름 아니라 모차르트의 레퀴엠이었다. 죽은 자를 위한 노래…… 이제까지 죽음만 가득했던 이제르트 자작령에서 온갖 죽음을 보아왔지만 그 죽음에 대한 그 어떤 보답도 하지 못했던 이제르트 자작의 심금을 울리기엔 딱 맞는 노래였다.
“심금이 울리는군.”
이제르트 자작이 눈물을 닦으며 조용히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동안…… 이제르트 자작은 정말 오랜 만에 음악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애틋했던 과거가 떠올랐고, 죽어간 부하들이, 수하들이, 영지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이 이제르트 자작의 눈빛에 불을 붙였다.
“미안하네만, 음악은 여기서 멈추지.”
죽어간 이들과 지금 영지의 상황 그 모든 것들을 다시 보니, 어설펐던 각오가 다져졌다.
“예.”
뚝!
문수르가 음악을 껐다.
이제르트 자작은 그런 문수르에게 말했다.
“내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제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은 뭐든지 드릴 겁니다.”
“그럼 나는 자네에게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제가 부탁드리는 모든 것을 해주시면 됩니다.”
이제르트 자작, 그가 문수르를 받아들이기로 각오했다. 사기? 미친놈? 정신병자? 그런 단어 따윈 중요치 않았다.
문수르가 보여준 것은 기적이었고, 이제르트 자작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기적이었다. 작금의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선 그 누구보다 기적이 필요했으니고, 문수르는 그 기적을 보여줄 수 있는 자였다.
그렇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
‘나는 이제까지 죽어간 모든 이들을 위해서라도 내 영혼을 팔아 보답을 해야 한다.’
귀족이 누리는 모든 것들은 귀족이 행해야 하는 의무로부터 나오는 법.
고작 영혼 따위로 자신을 위해 희생한 자들에게 보답할 수 있다면 백만 번이라도 팔 수 있었다.
그런 각오를 품고 살아왔는데, 문수르를 받아들이는 일 따위에 거리낌이 있을까?
“좋아. 이제부터 자네를 임시적으로나 영주대리인으로 임명하겠네. 내 전권을 위임하지.”
빠른 판단력과 행동력이었다.
그러나 문수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급하게 처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단 점진적으로 일을 진행시킬 생각입니다. 일단 기사분들께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고, 성 내에 머물만한 저택 한 채를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더 필요한 게 있나?”
“필요한 게 있지만…… 그 부분은 차후 말씀드리겠고 혹시 제가 부탁하실 건 없습니까?”
“부탁?”
부탁이란 말에 이제르트 자작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있네.”
지금 그 무엇보다 급한 게 하나 있었으니까.
3.
문수르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런 문수르의 앞에는 소녀가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소녀였다. 하지만 소녀의 피부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창백하다?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시체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온몸은 겨울의 나뭇가지마냥 앙상하기 그지없었다.
소녀는 그렇게 문수르의 앞에 알몸으로 있었다.
“아버님이 급하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어요. 당신이 은인이라면서, 당신이라면 저를 고쳐줄 수 있다고요.”
소녀의 이름은 이리아 이제르트.
이제르트 자작의 딸로, 어릴 적부터 타고난 천병으로 인해 이제까지 두 다리로 걸어본 적조차 손에 꼽을 정도로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소녀였다.
하녀의 도움 없이는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하는 그녀의 운명은 이제르트 자작을 괴롭히는 것들 중 하나였다.
문수르는 그런 그녀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말했다.
“옷을 벗어주십시오.”
처음에 이리아는 크게 놀랐지만, 그녀는 이내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저는 혼자 옷조차 벗지 못할 정도에요. 벗겨주시면 감사하겠어요.”
그녀는 알고 있었다.
멀쩡한 사내라면 자신의 비루한 몸뚱이를 보고 욕정 따위를 느낄 리가 없다는 걸 말이다.
또한 그녀를 바라보는 문수르의 표정은 진중했고, 조금은 굳어있었다.
사실 문수르도 지금 이리아의 알몸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단지 알몸을 보려는 건, 그녀의 몸 상태를 문수르의 육안만으로 체크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리아 아가씨. 이제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소리를 지르시거나, 놀라시지 말아주십시오.”
더욱이 문수르를 급하게 만드는 건, 인공지능 로이드의 계속된 재촉이었다.
- 이리아 이제르트 양의 몸 상태가 지극히 좋지 못합니다. 로이드 시스템은 이제르트 가문의 안전과 생존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 지금 당장 이리아 아제르트 양의 검진을 시작합니다.
한석균이 문수르를 케르빈 월드로 보낸 건 여행이나 하라고 보낸 게 아니다.
자신의 가문을 위해서다.
그리고 한석균이 가장 고민했던 건 가문의 일원이 죽거나, 하는 일이었다.
로이드 시스템도 애초에 케르빈 월드로 가게 되면 제어할 수 없는 문수르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만큼 이제르트 가문의 직계혈손이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로이드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빠른 검진과 치료법을 내놓는 것이었다.
‘알고 있어. 재촉하지 마!’
로이드의 명령에 따라 이리아의 옷을 벗기고 몇 가지 설명을 한 후에 문수르는 곧장 검진에 들어갔다.
문수르가 손으로 이리아의 전신을 마사지하듯 만지기 시작했다. 촉진을 함과 동시에 문수르가 착용한 노크 클락이 이리아의 몸속으로 몇 가지 파장을 쏘아내 이리아 몸 내부를 살폈다.
“아앗…….”
문수르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앙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소녀의 나신을 만지는데 조금의 배려도 없었다. 다리는 물론, 음부와 가슴까지. 문수르는 거칠게 주물렀다.
아무리 당황하지 않으려고 해도 이리아 입장에서는 충분히 치욕스럽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문수르 입장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성욕이 올라오기는커녕 로이드의 계속되는 설명에 땀이 줄줄 나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이리아의 상태는 정말 심각했다.
‘심장이 약해졌어. 거기에 로이드도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린 상황이다. 당장 치료가 필요한데, 치료자체도 수술 한두 번으로 끝날 만한 게 아니야. 거기에 다른 질병들까지 복합적으로……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군. 대체 이렇게 낙후된 세계에서 어떻게 버틴 거지?’
사실 이제까지 이리아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주기적으로 마법사를 고용해서 한 힐링 마법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 힐링 마법도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목숨을 간신히 유지하는 정도.
‘일단 상비약으로…….’
문수르는 천천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가장 필요한 건 몸이 약해지면서 달고 살게 된 병들을 치료하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확실하게 해치울 만한 약이 있었다.
거대한 제약업체를 소유했던 한석균은 케르빈 월드에서 만병통치약으로 써도 될만한 약품을 만들었고, 문수르는 그것들을 가지고 이 세계로 넘어왔다.
‘이런!’
그 순간 문수르가 혀를 찼다.
‘하필이면 그 가방을 숨겨뒀지.’
케르빈 월드로 넘어오면서 가지고 왔던 물품들 중 무기를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숨겨둔 상황이다. 부피가 작지 않고, 워낙 눈에 띄는 것들이라 가지고 다니기 애매했으니까.
상비약도 마찬가지였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문수르는 상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곧장 이리아의 방을 빠져나가, 어디론가 향했다.
그런 문수르의 쏜살같은 움직임에 이리아는 어안이 벙벙한 듯 고개를 흔들다가 이내 얼굴을 붉혔다.
“은인이라고……?”
그녀 입장에서 문수르는 자신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만져준 최초의 남자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