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전투가 끝났다.
오크들의 시체가 성문 주변에 너부러져 있을 때 기사들은 용병대의 대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자네들이 전장을 정리하게. 우리는 안으로 침투한 오크들을 처치하겠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로드게스를 제외한 두 용병대장은 놀랐다. 영지 안으로 오크들이 침투했다니? 성벽을 넘은 오크는 한 마리도 없는데?
“오크들이 땅굴을 파서 들어온 모양이다. 방금 소란을 느꼈네.”
“아!”
그제야 용병대장들도 영지민들의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볼 수 있었다.
‘땅굴이라니?’
‘그 무식한 오크들이 그런 정교한 전술을?’
하지만 전장에서 닳고 닳은 용병대장들 입장에서 오크들과 땅굴의 조합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역사를 찾아봐도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역시 테블스 산.’
‘사람보다 더 하군.’
용병대장들이 기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 역할분담을 끝낸 뒤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사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영지민들의 거구지역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이 할 일이라고는 살아남은 영지민들을 보호하고, 도륙난 오크들의 시체를 정리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기사들은 놀랐다.
분명 오크들이 침투한 건 맞는데, 시체만 너부러져 있다.
대체 누가 이런 일을 했단 말인가?
“음!”
단 한 명, 헤인 경만은 작금의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어렴풋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자…… 대체 정체가 무엇인가?’
단신으로 수백 마리의 오크를 상대할 정도의 창술을 지닌 자.
대체 그런 자가 어째서 이제르트 자작가에 등장한 것인가? 그것도 용병이라고 자기 정체를 숨기면서. 심지어 왜 그는 하필 콩탄 왕국에서도 버림받은 이제르트 자작가를 도와주려는 걸까? 막말로 그 정도 실력이라면 그가 원하는 만큼의 부귀영화를 줄 귀족들이 넘쳐나는 세상인데?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헤인 경은 고개를 들어 내성 안의 성을 보았다.
그들의 주군, 이 영지의 주인 이제르트 자작이 머무는 성.
‘자작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어쩌면 이제트르 자작가의 운명을 바꿀 존재가 등장한 것일지도 모른다.
6.
기사들이 영지민들의 거주지역을 정리할 무렵, 그들은 조용히 쉬고 있는 문수르를 발견했다.
기사들 중 몇 명이 일단 그를 포박하기 위해 움직이려고 했다. 그때 쉬고 있던 문수르도 눈을 떴다.
일촉즉발의 상황.
“잠깐만!”
그 상황에 나선 건 헤인 경이였다. 헤인 경은 동료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이분이 이번 일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분이라네.”
헤인 경은 문수르에게 예의를 갖추며, 그를 좋게 말했다. 문수르과 기사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기사들의 표정이야 묘한 게 당연했지만, 문수르의 묘한 표정은 다른 의미였다.
‘날 포섭하려고?’
헤인 경의 의중을 단숨에 파악한 문수르. 때문에 문수르는 헤인 경이 그저 싸움질만 잘하는 기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기사들도 결국은 지배계층이기 때문에 평민에 대해선 무조건 얕잡아보고는 한다. 나름 교육을 한다고 해도, 검을 휘두르는 시간이 더 길고, 그 교육도 아집과 고집으로 가득한 귀족사회의 교육이다. 양과 질, 모두가 문수르가 사는 사회에 비교하면 뒤떨어진다.
가치관이 깨있거나 하기가 힘든 세상이라는 거다.
그런데도 저런 태도를 보인다는 건, 나름 깨어있는 기사라는 소리다.
이 시대에 맞지 않은 인재.
실력의 유무를 떠나 문수르에게 가장 필요한 인재다.
‘다시 한 번 얼굴 좀 외워볼까?’
문수르는 헤인 경을 눈 여겨 봤다.
한편 헤인 경은 문수르에게 다가가 물었다.
“일단 이제르트 자작가를 대표해 감사를 표하겠소.”
헤인 경은 적어도 문수르가 적의나, 좋지 못한 의도로 이제르트 자작가를 온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제르트 자작가는 그냥 놔둬도 망할 영지다. 억하심정이 있다면 그냥 지켜만 보면 되지, 굳이 수작을 부릴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문수르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게 더 이득 아닐까?
“아닙니다. 용병으로 고용된 몸인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용병이라……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그대의 실력은 결코 용병의 그것이 아니오. 내가 대단한 기사는 아니지만, 그 정도는 분명히 말할 수 있소이다.”
“그렇습니까?”
문수르가 묘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헤인 경이 그런 문수르의 미소의 의중을 파악한 듯, 가장 중요한 말을 꺼냈다.
“자작님을 만나 뵙게 해드리겠소. 따라오시오.”
“헤인 경!”
다른 기사들이 기겁했다. 아니, 지금 정체가 불명한 인물을 주군과 만나게 할 생각인가?
물론 사실 이미 한 차례 만난 적이 있다. 문수르가 처음 용병 계약을 했을 때 이제르트 자작과 마주보고 했다.
하지만 그땐 그거고,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그만.”
그러나 기사들의 불만을 막는 목소리가 있었다.
젊은 목소리였지만, 힘이 넘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제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던 기사.
하지만 이제르트 자작가의 기사단을 이끄는 수장.
엘렉 포비어.
바로 포비어 경이었다.
그는 기사단장으로 기사들을 이끄는 자였지만, 이제까지 그는 전면에 나서지 않은 채, 묵묵히 기사 한 명의 몫을 해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본래 그는 기가스 파일럿. 보통은 기가스에 탄 채로 활약하는 게 그의 역할이었고, 의무였다. 당연히 그가 배우는 전술훈련, 교육, 전투방식 등은 기가스에 탑승했을 때를 기준으로 삼는다. 일반적인 전투에 대해서는 기본만 가지고 있는 거다. 그런 그가 어설프게 전장을 지휘하는 건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일이다.
심지어 그는 이제르트 자작가가 보유한 유일한 기가스 파일럿이다. 기가스도 귀중하지만, 기가스 파일럿도 그만큼 귀중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를 무리하게 전장의 선두에 내세우거나 하는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전투가 벌어져도 그는 가장 후방에서, 어느 정도 도움을 주는 선이었다.
그 때문에 이제까지 전투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전면에 나서거나, 명령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전투가 아닌, 기사들의 의견 충돌. 그는 이 상황을 정리할 의무와 그만한 자격이 있었다.
“헤인 경.”
“하명하십시오.”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시오. 나머지 경들은 헤인 경의 행동을 막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포비어 경이 결론을 내리자, 다른 기사들이 별다른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수르는 놀랐다.
‘꽤나 군기가 잡혔군. 명령체계가 확고해.’
기사들 사이에 위계질서가 잡히는 건 사실 의외로 힘들다. 기사단장이라고 해도, 결국 직위가 높은 거지, 작위가 높은 건 아니다. 물론 작위가 높은 기사가, 준 귀족이 아니라 자작 또는 남작이 기사단장을 맡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이제르트 자작가에 그런 자가 기사를 할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결국 똑같은 준 귀족이다. 명령을 내리는 자랑, 받는 자 사이에 계급의 차이가 없는 거다.
그러니 가끔 기사들 간의 의견충돌이 나고, 칼부림으로까지 번지는 경우도 있다.
기사들은 명예 빼면 시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족속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르트 자작가에는 그런 게 없었다.
‘망해가는 영지라는데, 내실은 확실한데?’
문수르는 이런 이제르트 자작가의 모습에 내심 감탄했다.
솔직히 케르빈 월드에 온 이후로 이제르트 자작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땐 미칠 노릇이었다.
물론 이제르트 자작가가 몰락하고, 이제르트 자작가가 몰살을 당해서 피의 복수를 하게 되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아니, 어떻게 보면 차라리 그게 나을 뻔도 했다. 만약 정말 피의 복수를 하게 된다면, 그냥 이것저것 잴 거 없이, 케르빈 월드의 강력한 무기들을 가져오면 되니까.
어쨌거나 이제 몰락했고, 끝장나기 일보직전인 영지를 재건해야 한다니? 그것도 그냥 재건이 아니라, 아주 밉보인 왕으로부터 후작이란 작위까지 얻어내야 한다니?
상상만으로도 현기증이 났다.
하지만 막상 와서 보니까 이제르트 자작가에는 나름 훌륭한 저력이 숨어 있었다.
‘해볼만 하겠어.’
나쁘지 않다.
문수르는 그렇게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이윽고 헤인 경이 문수르를 이제르트 자작 앞으로 안내했다.
이제르트 자작은 두 번째로 보는 문수르의 얼굴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 몰랐군.”
말과 함께 이제르트 자작이 헤인 경을 향해 손을 저었다. 집무실에서 나가도 좋다는 의미였다.
헤인 경은 고개를 짧게 한 번 숙인 후에 집무실에서 나갔다.
“자, 앉지.”
이제르트 자작은 문수르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자신 스스로도 자리에 앉았다.
아주 잠깐 침묵이 깔렸다.
누가 먼저 입을 열어야 할까? 서로가 고뇌할 무렵.
“내 말투가 거슬리는가? 필요하다면, 말투를 바꾸겠네.”
먼저 말을 꺼낸 건 이제르트 자작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보통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후후후, 귀족이 평민에게 이렇게 나온다는 건, 그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는 이야기지.”
이제르트 자작이 저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거다. 귀족이 평민에게 말투가 괜찮냐고 물어보고, 그 사실을 숨김없이 말할 정도로 말이다.
“자네도 알고 왔겠지. 아니, 애초에 모르는 인간은 결코 우리 영지에 오질 않지.”
“예, 알고 왔습니다.”
“실력이 대단하더군.”
“……보셨습니까?”
“대담한 성격이 못 되거든. 적어도 내 수족이나 다름없는 이들을 전장에 내보내고 쿨쿨 잠을 자는 성격은 못 되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몰래 성벽 위로 올라 전장을 보곤 했지.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던 이제르트 자작. 그의 얼굴이 석상의 그것처럼 변했다.
“오크들이 영지민들의 거주지역에서 튀어나올 때는 심장이 덜컥했었네.”
“저도 놀랐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오크들이 땅굴을 파고 들어온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위치를 어떻게 정확히 파악했나?”
굳은 표정, 불리한 입장. 그럼에도 이제르트 자작은 핵심을 찌르고 들어왔다.
문수르는 미소를 지었다.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당장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어차피 도움을 받은 건 우리 쪽이거늘. 자네 덕분에 피해가 많이 줄어들었네. 사실 지금은 병사 한 명도 귀중히 여겨야 하는 시기니까.”
이제르트 자작의 굳었던 표정에 애처로운 미소가 걸렸다.
문수르는 그런 이제르트 자작을 보며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이제르트 자작을 돕는 건 정해진 수순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중요하다.
모든 걸 밝히고 도와줄 것인가?
아니면 모든 걸 숨긴 채 도와줄 것인가?
거짓으로 치장한 채로, 진실로 치장한 채, 과연 어느 옷을 입고 자신을 소개하고, 밝혀야 할까?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문수르.
이내 그가 결정을 내린 듯.
“저는…….”
입을 열었다.
케르빈 월드의 모든 걸 뒤바꿀 전설은 그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