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5.
몬스터들은 5백여 마리의 오크부대였다. 모두가 어느 정도의 무장을 한 걸 보면, 그냥 단순히 떠돌이 부족이 아니었다.
성벽 위로 올라 몰려오는 오크 무리를 바라보던 기사, 페도르 알란은 이를 갈았다. 눈이 좋은 그가 오크 무리들 사이에 치솟은 깃발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빌어먹은 또투 부족 새끼들.”
또투 부족.
무려 1만 마리의 오크들이 모여 군락을 형성한 부족으로 테블스 산맥의 일부를 차지한 채 이곳저곳 설치고 다니는 놈들이다. 특히 놈들의 무시무시한 점은 주기적으로 테블스 산맥 근처 영지인 이제르트 자작령을 공격한다. 그 대부분의 공격을 이제르트 자작령을 잘 막아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또투 부족?”
“아, 젠장 저 빌어먹을 새끼들. 이번 달만 들어서 벌써 네 번째야. 대체 몇 번이나 더 쳐들어오려는 거야?”
“완전 공성전을 치르는 느낌이군.”
보통 오크들이 근처 성이나, 인간 무리들을 습격하는 이유는 하나다. 인간을 죽여 식량을 삼거나, 인간이 가진 식량 또는 무기나 자원 등을 얻어내기 위해서다.
하지만 또투 부족은 다르다.
놈들은 올해 들어서만 벌써 13차례, 이번 달에 들어서만 무려 4차례나 이제르트 자작령을 습격했다.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몬스터는 없다. 이런 움직임을 보여주는 종족은 대륙 천지에 딱 하나다.
인간!
전쟁을 벌이며, 전술과 전략을 쓰는 인간만이 이런 식으로 전투를 벌이다.
주기적으로 공격을 통해 상대를 지치게 만들어, 나중엔 성을 정복하는 것! 공성계 중 하나다. 아주 어려운 전략은 아니지만, 적어도 무식이라면 슬라임과 대등하다는 오크들의 머리통에서 나올 만한 전략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공성전이라니, 말이 안 되는 건 알지만…… 이렇게 경험하니까 믿을 수밖에 없군.”
“중요한 건 실제로 우리 쪽 피해가 누적된다는 거지.”
심지어 놈들의 전술은 효과를 보고 있었다. 계속되는 공격으로 이제르트 자작가의 전력을 야금야금 소모됐다.
특히 가장 큰 피해가 있었다.
“그보다 기가스 출동은?”
“빌어먹을 지금 마나동력이 50퍼센트 밖에 안 찼어. 긴급 마력 공급에 들어갔지만, 그래도 최소 움직이기 위해서는 60퍼센트 대에 돌입해야 돼. 긴급 마력 공급이 들어간 후 10퍼센트의 마력 공급을 하려면…… 오늘 하루는 힘들겠지.”
“진짜 저 오크 새끼들 갈아 마시고 싶어지네.”
기가스!
이제르트 자작가의 최고 전력이며, 이제까지 전장에서 가장 활약해준 그 기가스의 약점 중 하나가 바로 마나동력이다.
마나동력이란 무엇인가?
기가스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다. 보통은 스스로 마력을 생성하는 마력석에 마나를 모으는 마법진을 새겨서 계속해서 스스로 마력을 생산할 수 있게 만들어지지만, 이 부분에 많은 제한이 있다.
마력용량, 마력출력, 마력효율성 등…… 온갖 것이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제르트 자작가가 보유한 기가스는 1세대 기가스를 개조해 만든 1.3배 급 출력의 기가스였다.
출력이 1세대 기가스보다는 좋다고 해도, 마력용량이나, 마력생산능력은 1배 급의 기가스와 똑같다. 오히려 출력을 높인 대가로 마력효율성이 떨어져서 전투 유지 시간은 1배 급 기가스보다 떨어진다.
즉, 강력하지만 대신에 유지시간이 더 짧은 기체다.
계속되는 전투 속에서 기가스의 마력용량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 들어서 또투 부족의 계속되는 공격 때문에 마력용량이 바닥나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아무리 긴급 마력 공급을 통해 마력을 채운다고 해도 엄청난 수준의 마법사나 그와 관련된 값비싼 도구를 쓰지 않는 이상 그 속도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쩌면 오늘이 제삿날일지도 모르겠군.”
“쯧쯧, 말이 씨가 되는 법이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직접 싸워야 한다는 건 피할 수 없는 사실이네.”
기가스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제 기사와 병사 그리고 용병대가 나가서 또투 부족의 오크 부대를 처치해야 한다.
이제까지는 기가스의 도움으로 매우 효율적이고, 일방적인 전투를 치렀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소리다.
“유서나 쓰라고 말해.”
기사들이 각오를 다지며 성문 아래로 내려갔다.
철컥!
그리고 궁병들이 성벽 위로 올라오며 활시위에 화살을 재웠다.
기사들의 명령과 전술은 사병들과 용병대에 동시에 전해졌다. 나름 규율이 잡혀있던 이제르트 용병대는 사병들만큼은 아니지만 매우 분주하게, 그리고 빠르게 움직였다.
“모두 무장은 확실히 해라!”
“오늘 죽을 수도 있다! 유서는 꼭 남겨둬라! 죽고 난 다음에 저승에서 후회하지 말고!”
“도망치는 자는 엄벌로 다스릴 것이다.”
용병들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 유일하게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이가 있었다.
“자네!”
“네?”
“지금 뭐하는 건가?”
“뭐하기는요. 상황이해가 안 되서 멀뚱히 서있는 중이죠.”
“그게 무슨 헛……!”
무언가 말하려던 용병. 하지만 그런 용병의 입을 가로 막는 손이 있었다. 사내의 것보다는 작은 손이었다. 여자의 손…… 하지만 섬섬옥수라는 개념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곳곳에 굳은살은 물론, 피부는 수 년 동안 가뭄을 겪은 농지의 것마냥 갈라졌고, 온갖 상처가 가득했다. 용병들 중에서도 저런 손을 가진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손의 주인은 의외로 예쁜 여인이었다. 보는 것만으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휘파람 정도는 나올 정도? 체격은 보통 여자보다 크지만, 그래도 기준치 이상은 아니다.
여인의 이름은 소피아.
이제르트 용병대를 이끄는 A급 용병 중 한 명이야 유일한 여자 용병이기도 했다.
보기에는 작업 꽤나 받았을 여인.
하지만 이제르트 용병대 내에서 소피아의 별명이 바로 살쾡이다. 성격도 사나울 뿐더러, 표적을 잡으면 정말 살쾡이처럼 한 번에 해치울 정도로 그녀의 검 솜씨는 제법이었다.
그녀의 솜씨에 그녀에게 수작을 부렸던 이들은 전부 고혼(孤魂)이 되어버렸다.
그런 그녀가 나섰다.
“신입.”
“말씀하시죠.”
“이제르트 자작님을 뵙고, 계약서에 사인했지?”
“물론입니다.”
“계약금은?”
“당연히 받았죠.”
“좋아, 그럼 군말 없이 명령을 듣는 게 계약서에 사인하고, 계약금을 받은 용병이 해야 하는 일이겠지?”
“그 일이 뭡니까?”
“따라와. 네가 싸워야 할 전장을 안내해주지.”
나름 점잖은 말투지만, 듣는 이는 온몸이 오싹해질 정도로 차가운 말투였다.
문수르는 그런 소피아를 보며 눈매를 가늘게 떴다.
‘하프 엘프.’
문수르는 보는 순간 소피아의 내력을 알 수 있었다. 문수르가 단숨에 상대의 진실을 꿰뚫 정도의 안목을 가져서 그런 건 아니었다.
- 눈앞의 여성은 하프 엘프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귀의 형태를 보면 일부러 귀를 잘라낸 것처럼 보입니다.
‘귀를 잘라? 어우, 소름끼치네.’
- 목이 잘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목이 잘려?’
- 제게 입력된 데이터에 따르면, 하프 엘프 여성은 대부분이 노예로 팔린다고 합니다. 케르빈 월드에선 도망친 노예는 무조건 목을 칩니다.
‘살벌하구만. 그보다 스캔은 얼마나 진행 중이야?’
- 근처 10핵타르는 탐색 완료했습니다.
문수르.
본래 이름은 박문수.
두 번의 노크로 이 세계에 방문한 이계인(異界人)이었다.
6.
두 번의 노크를 하기 직전.
한석균은 문수에게 일단 최소한의 장비들을 지급하고자 했다. 마음 같아선 정말 말도 안 되는 장비들…… 뭐 가능만 하다면 항공모함을 통째로 같이 보내주고 싶긴 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기호식품은 차후에 옮기고, 일단 가장 중요한 건 다섯 가지이네.”
한석균이 말한 중요한 다섯 가지 물품.
“자 받게.”
하나는 온갖 기능이 첨부되었으며, 충전 없이 10년쯤은 사용가능하며, 63빌딩에서 던져도 깨지지 않는 5인치 스마트폰이었다.
“이 스마트폰…… 제법 크네요. 할부원금은 얼마쯤 됩니까?”
겉보기에는 보통의 스마트폰이다.
한석균은 문수의 말에 씨익 웃었다.
“글쎄, 할부원금으로는 대충 1천억쯤 하지 않을까, 싶군. 기존의 기술력을 이용했다곤 하지만 거기 사용된 금속은 상상을 초월하는 놈들이니까. 아마 방패로 써도 될 걸세.”
“방패요? 액정도요?”
“사실 액정이 제일 강하지. 현재 인류가 가진 나노기술의 정수가 담겨 있네. 막말로 한 번 나노입자끼리 얽혀서 만들면 그 상태에서 다른 가공이 불가능할 정도야.”
“와우.”
두 번째로 지급된 건 두 자루의 창이었다. 이 역시 신기술이 적용된 창으로, 그 강도와 절삭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창이었다.
검이 아니라 창이 지급된 건, 한석균이 케르빈 월드의 대마법사로 활동할 당시 그가 알고 있는 무술이 창술이었기 때문이다. 케르빈 월드에서 신창(神)槍)이라 불렸던 페르수스의 창술로, 그 창술이 한석균이 아는 최고의 무술이었고, 자연스럽게 문수는 창술을 익혔다.
“이 창에도 특수기능이 있습니까?”
“심플 이즈 베스트. 그냥 단단하고, 잘 베이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좀 묵직한 게 흠이군요.”
“거기 가면 오히려 가벼워질 걸세. 일부러 무겁게 만든 건데…… 그게 한계더군.”
세 번째로 지급된 건 가방이었다. 등에 매는 가방이 아니었다. 소위 007가방이라고 불리는 가방이었다.
“이게 그겁니까?”
“그래, 이제부터 케르빈 월드에서 자네를 보조하게 될 인공지능 시스템 로이드일세.”
인공지능 로이드.
사실 이 로이드의 존재는 매뉴얼에 없었다. 한석균도 개발은 시도했지만, 개발진척이 늦어 실제상황에 적용하는 건 좀 더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술발전이 그렇듯, 어느 순간 확! 답이 나오고는 하는 법이다.
로이드가 갑작스레 개발진척을 보이자, 한석균은 부랴부랴 로이드 시스템을 준비물에 포함시켰다.
로이드가 할 수 있는 건 무궁무진했다. 장비만 제공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지금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장비의 양이 제한된 탓에, 일단 가장 먼저 옮기게 된 장비는 GPS시스템이었다. 의외일 듯하지만, 사실 가장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일단 한석균 자신도 케르빈 월드의 지형이 어떠한지 정확히 모른다. 케르빈 월드에는 어스 월드의 그것처럼 위성을 이용해 제대로 지형을 파악하기는커녕, 지도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곳이니까.
또한 판을 크게 보고, 만약 국가적인 전쟁을 벌일 경우 지형 파악의 유무는 엄청난 위력을 가져줄 것이다. 웬만한 무기들보다 훨씬 유용한 게 바로 GPS시스템이었다.
“물론 이건 소형위성을 이용했고, 더군다나 케르빈 월드를 빙빙 도는 게 아니라, 케르빈 월드랑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일부 지역만 파악이 가능할 걸세.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로이드 시스템은 노크 클락에 설치되어 있네.”
더불어 로이드 인공지능은 노크 클락에 탑재되어 있었다. 이것이 가지는 이점은 또 있었다.
“그럼 이 녀석이 정말 제 생각도 읽습니까?”
“물론일세. 노크 클락 자체에 자네의 모든 생체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저장하는 기능이 있으니까. 로이드는 그 기능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고. 왜? 문제 있나?”
“아뇨, 없습니다.”
“후후후, 그러니까 괜히 배신할 생각은 하지 말게. 뭐, 자네가 배신한다면 내 쪽에서 꺼낼 수 있는 카드는 거의 없지만.”
굳이 음성이 아니더라도, 인공지능 로이드와 문수는 대화가 가능했다.
물론 반대로 로이드는 문수가 배신하는 걸 감시하는 감시자 역할이기도 했다. 한석균이 급하게 로이드 시스템을 노크 클락에 탑재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네 번째로 지급된 건 안경이었다. 보기에는 평범한 안경이지만, 문수가 가져가는 스마트폰과 노크 클락의 데이터를 시각으로 출력해주는 장치이기도 했다.
더불어 안경에는 골전도 이어폰 기능도 탑재되어 있어서, 잠시 귀머거리가 되도 어느 정도 대처가 가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급된 건 가방이 아니라 배낭이었다. 이것저것 상황에 따라 필요한 물품들이 담긴 가방으로, 일종의 만능 가방이었다.
이 다섯 가지 물품이 처음으로 케르빈 월드로 떠나게 될 문수의 모든 준비물이었다.
“그럼 곧바로 시작하지.”
준비물품을 확인한 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한 번 숨을 고른 뒤에 문수는 창을 등에 매고, 그 위에 배능을 매고, 한손에는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노크 클락을 착용한 손으로 문을 두드리듯, 허공에 두 번 노크를 했다.
휙휙!
손이 허공을 때렸고.
“노크노크.”
시동어가 작동됐을 때.
파앙!
문수의 존재는 어스 월드에서 완벽하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