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4화. 용병 문수르>
1.
콩탄 왕국.
페스로 제국 옆에 달라붙은 탓에 심심하면 전쟁을 겪는 콩탄 왕국은 최근 들어서 몇 년 동안 페스로 제국과 단 한 차례의 전쟁도 치르지 않을 정도로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의 태평성대는 아니었다.
“젠장, 페스로 제국 놈들이 결국 우리 왕국을 집어삼킬 속셈이군.”
“차라리 전쟁을 하자고!”
10년 전 콩탄 왕국의 새로운 왕으로 필로스 왕이 등극했다. 무려 5년에 걸친 왕위쟁탈전 끝에 나온 왕이었다. 보통 이렇게 들으면 드디어 콩탄 왕국이 오랜 내란 끝에 안정을 되찾겠구나,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본래 콩탄 왕국은 20년 전부터 왕태자가 정해져 있었다. 왕자들 중에서 이미 왕위계승권 1순위라 할 수 있는 왕태자가 정해졌다는 건, 왕위쟁탈전을 할 이유가 없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페스로 제국이 이런 콩탄 왕국의 왕위쟁탈에 끼어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당시 차기 왕으로 내정됐던 카스트로 왕자를 무시한 채, 페스로 제국이 필로스 삼왕자를 밀기 시작한 것이다. 거의 지지기반이 유명무실했던 필로스 삼왕자였지만, 페스로 제국의 막강한 지원력을 받자, 단숨에 카스트로 왕태자의 대항마로 컸다.
심지어 그동안 전쟁질만 하던 페스로 제국이 어느 순간 콩탄 왕국 내의 귀족들과 야합을 이룬 상황이었고, 어느 순간부터 필로스 삼왕자의 영향력이 카스트로 왕태자를 뛰어넘기 시작했다.
그렇게 왕위쟁탈전이 시작됐다.
피로 피를 씻는 무시무시한 전쟁은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았다. 콩탄 왕국의 국민들이나, 대부분의 귀족들은 카스트로 왕태자를 밀어줬지만, 페스로 제국의 지원력은 그런 콩탄 왕국의 지원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했다.
특히 결정적인 건 페스로 제국이 아끼는 기사 슈페언 백작을 필로스 삼왕자의 호위 명복으로 콩탄 왕국에 파견한 게 컸다. 페스로 제국이 보유한 거신병기 기가스 중에서도 3세대 기가스로 평가 받는 기가스 앞에서 콩탄 왕국은 어떻게 상대할 도리가 없었다. 콩탄 왕국이 가진 최신 기가스는 기껏해야 출력 2.5배 급의 2.5세대 기가스가 전부였는데, 이마저도 단 2대만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하물며 온갖 최첨단 마법으로 무장한 페스로 제국의 기가스 앞에선 2.5배 급의 기가스 2대가 동시엔 나선다고 해도 슈페언 백작을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결국 내전의 승리는 필로스 삼왕자의 것이 되었고, 왕위에 오른 필로스 왕은 당연히 페스로 제국과 매우 긴밀하고 우호적인 관계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말이 태평성대지, 세간은 이미 콩탄 왕국을 페스로 제국의 속국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쯧쯧, 결국 이제르트 자작만 안타깝게 됐군.”
“카스트로 왕태자님의 장례를 치렀다는 이유만으로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으로 쫓겨났으니…….”
“과거 대마법사 이제르트만 있었어도 왕태자 그리 쉽게 당하지만은 않았을 것을.”
그렇게 콩탄 왕국은 전쟁 없이 페스로 제국 앞에 함락되고 있었다.
2.
이제르트 자작가.
1백 년 전만 하더라도 이제르트 자작가의 앞에는 광명만이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제트르 자작가에는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마법사 할루이 이제르트!
콩탄 왕국 역사상 두 번째로 탄생한 8서클의 대마법사!
고작 서른 살의 나이에 그 엄청난 경지에 오른 할루이 이제트르의 존재는 콩탄 왕국의 자랑이었으며, 이제르트 자작가의 영광이었다.
때문에 사실상 이제르트 자작가는 자작가 이상의 취급을 받았다. 할루이 이제르트가 참석하는 자리면, 후작이 직접 그를 마중 나올 정도였고, 이미 왕국은 내부적으로 할루이 이제르트에게 맞는 작위로 후작을 정하고, 작위를 하사할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할루이 이제르트가 사라져버렸다.
실종?
그런 표현보다는 증발이란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는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에서 사라졌다.
콩탄 왕국이 뒤집어지는 건 당연했다. 왕국 최고의 마법사가, 대륙을 좌지우지할 마법사가 사라졌는데 멀쩡했으면 그게 더 웃긴 일이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페스로 제국이 할루이 이제르트를 납치하거나 암살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어쨌거나 그의 실종 이후 이제르트 자작가에게 내려지려던 후작 위는 당연이 없던 일이 됐고, 이제르트 자작가는 곧바로는 아니었지만 조금씩 하락세를 찾기 시작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할루이의 등장 이후 치솟았던 권세가 본래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그래도 이제르트 자작가는 콩탄 왕국의 귀족으로 충분히 훌륭하단 평가를 들을 만한 곳이었다. 사치를 부리지도 않았고, 왕국을 위해 충성을 바쳤으며, 왕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왕도로 달려갔다. 적어도 콩탄 왕국의 왕가가 이제르트 자작가를 내칠 이유는 없었다. 영지도 잘 꾸리고, 왕에게도 충성하는 귀족을 누가 내친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이제르트 자작가의 충심이 반대로 이제르트 자작가를 몰락시키는 계기가 됐다.
카스트로 왕태자.
왕이 정했던 왕위계승자.
이제르트 자작가는 그런 카스트로 왕태자를 따랐다. 당연했다. 그것이 콩탄 왕국의 귀족이 해야 할 도리이며,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처음엔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런 이제르트 자작가와 같은 길을 걸었다. 카스트로 왕태자를 중심으로 뭉치고, 싸운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귀족들은 하나둘씩 자시 살길을 위해 카스트로 왕태자의 곁을 떠났다.
종국에 카스트로 왕태자가 스스로 독을 마시고 자살을 했을 때, 그 옆에 남은 건 이제르트 자작가를 포함한 세 곳의 귀족가문이 전부였다. 그리고 이제르트 자작가는 영지를 팔아 그 돈으로 카스트로 왕태자의 장례를 콩탄 왕국의 예법에 맞추어 치렀다.
이런 이제르트 자작가의 충심은 대단했지만, 반대로 필로스 왕에게는 눈엣가지였다. 필로스 왕은 오히려 이제르트 자작가를 응징하는 것을 본보기로 보여줬다. 영지를 비롯해 가산을 처분해 이제는 영지 없는 귀족으로 살아가려던 이제르트 자작가에게 오히려 영지를 하사한 것이다.
영지를 하사하면 좋은 거 아닌가?
……라는 반문이 있겠지만, 그 영지가 콩탄 왕국 북동쪽에 위치한 테블스 산맥을 품고 있다는 설명을 듣는다면 모두가 혀를 찰 것이다.
“차라리 감옥에 보낼 것을.”
‘그런 지옥에 보내다니, 참으로 악독한 왕이로다.“
테블스 산맥.
테블스 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그 거대한 산맥은 몬스터들의 성지라 불리며, 온갖 몬스터 집단들이 저마다의 영역을 구축하고, 심지어 때가 되면 수시로 약탈을 내려오는 땅이었다.
과거 너무나 비옥한 땅을 가진 탓에 많은 나라들이 테블스 산맥의 개간을 시도했지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거신병기 기가스가 탄생하고, 막강한 무력이 생겼음에도 테블스 산맥 개간은 10번 시도해서 10번 다 실패했을 정도다.
세간에선 그 전쟁 좋아하는 페스로 제국의 기사들조차 테블스 산 앞에선 헛기침부터 한다! 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다. 실제로도 필로스 왕이 등극 이후 제국으로 돌아가려는 슈페언 백작에게.
“슈페언 백작, 가는 길에 한 가지 청탁이 있소이다.”
라고 말하며.
“다름이 아니라, 테블스 산맥…… 거기 땅이 기름지고 참 좋은데…… 거기를 개간하면 왕국한텐 참 좋은데, 어떻게 말할 방법이 없소.”
우회적으로 테블스 산맥의 개간을 부탁했을 때.
슈페언 백작은 그 자리에서 헛기침만 토하다, 너무 무리해서 헛기침을 토하려는 탓에 종국에 피까지 토했다.
3세대 기가스. 보통 기가스보다 3배 이상의 출력을 자랑하며, 그 기량 자체는 2세대 기사들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며, 페스로 제국에도 고작 10기 밖에 없는 기가스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슈페언 백작에게조차 테블스 산맥은 무시무시한 장소였다.
그런 테블스 산맥을 품고 있는 땅을 영지로 주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그 전에 일단 영지를 하사 받으면, 영주는 그 영지의 주인이다. 영지의 주인이라 하면, 영지 내에서 왕처럼 군림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영지의 안녕을 책임질 의무도 가지게 된다. 자신의 영지 때문에 일어날 일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이제르트 자작가에게 테블스 산맥을 품고 있던 땅과 주변 땅을 합쳐서 이제르트 자작령으로 선포했다는 건, 이제르트 자작가로 하여금 죽을 때까지 고생이나 하다 쪽 빨려 뒈지란 소리였다.
그러나 이제르트 자작가는 반대할 방법이 없었다. 오히려 필로스 왕의 편에 선 귀족들은 때려 죽여도 시원찮을 이제르트 자작에게 영지를 하사하는 필로스 왕의 드넓은 배포에 놀랄 따름입니다, 라는 개소리만 지껄였다.
그렇게 이제르트 자작가가 다시금 영주가 된 이후부터, 당연히 이제르트 자작가의 하락세는 엄청난 속도로 진행됐다. 그나마 영지를 팔고, 카스트로 왕태자의 장례를 치르고 남은 돈도 영주가 된지 10년 만에 바닥을 보였다. 일각에선 10년 동안이나 그 돈으로 버틴 것만으로도 이제르트 자작가 괜히 대마법사를 배출한 게 아니구나, 하는 칭찬이 끊이질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칭찬은 칭찬일 뿐, 그 누구도 이제르트 자작가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가산이 바닥을 보인 이제르트 자각가는 용병들에게도 기피 대상 1순위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나마 용병을 고용해 부족한 영지 내 전력을 충당하던 이제르트 자작가는 이제 돈이 아니라, 정말 힘이 없어 무너질 판이었다.
그런 이제르트 자작가에 용병 한 명이 왔다.
“문수르라고 합니다. 성은 없습니다.”
용병 문수르.
그는 이제르트 자작령 역사상 처음으로 제 발로 직접 의지를 가진 채 이제트르 자작령을 찾은 용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