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6.
케르빈 월드.
그곳은 중세 유럽의 그것과 비슷한 세계관을 지녔지만, 그 세계관이 2천 년 넘게 유지된 땅이었다.
어스 월드의 인류가 이룩한 역사를 가늠해 보면, 케르빈 월드는 너무나 발전이 느렸다.
처음에 문수는 어째서 문명의 발달속도가 그렇게 느린지 궁금했다.
하지만 한석균은 그 부분에 대한 대답 대신 다른 이야기를 해줬다.
“자네에게 중요한 건 케르빈 월드를 근본부터 바꾸는 게 아니네. 신분제도가 확실한 그곳에 가서 민주주의를 확립시키는 것도, 자유시장경제체제로 바꾸는 것도 아니네. 자네가 거기 가서 해야 하는 건 내가 떠남과 동시에 몰락했을 나의 가문, 이제르트 자작가를 부흥시키는 일일세.”
케르빈 월드에 어떤 역사가 있고, 어떻게 발전했으며, 어떤 식으로 해야 그들 모두가 행복하고, 풍요로운 문명을 누릴 수 있는가?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그곳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건, 그걸 이용하기 위해서지, 그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가 아니다.
맹점을 확실하게 찌르는 한석균의 말을 문수는 깊게 통감했다.
‘그래, 맞는 말이다.’
소설을 썼던 문수였기에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허점이 많고, 두루뭉술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써본 경험이 많았으니까. 더불어 굳이 깊은 세계관에 대한 설정이나 설명 없이도 충분히 소설은 써진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참고로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겠지만 케르빈 월드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은 페스로 제국이다. 그리고 이 페스로 제국은…….”
한석균이 만든 케르빈 월드의 지도. 그 위에 있는 땅의 1/3은 페스로 제국이란 이름이 차지하고 있었다.
한석균은 그런 페스로 제국의 이름에 X자를 그었다.
“적이다.”
적이라는 말에 문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적이라…….’
페스로 제국.
이 거대한 권력과 힘을 지닌 제국은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점이 있다. 황제는 보다 수월하게 제국 영토를 확장하고 동시에 제국 국경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대한 황실의 소모를 줄이기 위해 변경백 제도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문제는 제국 국경을 공격하는 적으로부터 제국을 지키기 위해 변경백들은 자체적으로 사병을 육성하고, 영지 내 조세제도 및 세율을 임의로 측정할 수 있었다.
이후 국경이 안정되자, 변경백들은 그들이 가진 막강한 권한을 기반으로 엄청나게 세력을 확장했고, 황권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페스로 제국의 황실은 이런 변경백들의 견제를 상대하기 위해 내놓은 방법이 바로 전쟁이었다.
전쟁을 일으키면 국경을 마주본 이들과도 마찰이 심해질 테니, 그럼 자연스럽게 변경백들의 힘이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페스로 제국의 시스템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언제나 전쟁을 하게 만들었다.
페스로 제국은 속국이 아닌 이상, 주변국들과는 전부 원수지간이었으며, 앙숙이었다.
그리고 한석균이 어스 월드에 오기 전, 케르빈 월드에서 활동할 당시 그는 페스로 제국의 동쪽에 위치한 콩탄 왕국의 이제르트 자작가의 장남이었다.
“페스로 제국을 활용해야만 이제르트 자각가를 부흥시킬 수 있네.”
이 순간 문수가 손을 들었다.
질문이다.
“말해보게.”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페스로 제국이 그렇게 막강하다면 콩탄 왕국의 몰락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 경우 이제르트 자작가 역시 없어졌다면…….”
“음, 그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선을 그어주지.”
한석균은 의외로 담담하게 말했다.
“자네 말대로 이제르트 자작가가 몰락했다면 일단 이제르트 자작가의 후손을 찾게. 사촌, 육촌, 팔촌, 아무래도 좋아. 일단 찾게. 하지만 만약 그들 전부가 죽었다면…….”
번쩍!
그 순간 담담하게 말을 뱉던 한석균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문수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츠려들 정도였다.
“피의 복수를 해야지.”
피의 복수란 말에 문수는 침을 삼켰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문수는 한석균이 말하는 피의 복수가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더불어 자신에게 다가올 의무와 책임감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건 감히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노크 센터에서 보낸 세월이 반년쯤 지났을 때, 문수는 아예 다른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의 온몸에는 정말 소름 끼칠 정도로 단단한 근육이 보석처럼 박혀 있었다. 키도 반년 전보다 10센티미터나 더 커서, 185센티미터를 넘겼다. 얼굴선도 조금씩 변해서, 평범하기 그지없던 인상이 나름 호쾌한 외모로 바뀌었다.
그리고 가장 큰 소득은 한 달 전부터 머리털이 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룰루랄라∼!
매일 거울을 볼 때마다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미소 짓는 문수.
그런 그에게 선물이라도 주려는 듯, 한석균은 계획에도 없었던 일을 꺼냈다.
“오랜만에 외출하도록 하지.”
“외출 말입니까?”
외출이란 말에 문수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매뉴얼대로라면 문수는 1년 동안 이곳에서 훈련만 받아야 하는 팔자였다. 외출 같은 건 매뉴얼 어디에도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때문에 문수는 한석균이 단순히 상을 주기 위해서 그런 말을 뱉은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대답은 가면서 하지.”
한석균은 곧장 말해주지 않았다. 문수는 그런 한석균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어차피 그는 좋든 싫든, 한석균이 원하는 대로 뭐든 걸 해야 하는 운명이 됐으니까.
반 년 만의 외출은 새롭기 그지없었다. 그 기나긴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여러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생겼다.
‘대체 뭘까?’
반 년 동안 한석균 밑에서 많은 공부를 한 그다. 더군다나 그의 반년은 다른 그 어떤 이들의 반년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충실한 나날들? 그런 의미가 아니다. 문수가 반 년 동안 노크 센터에서 이룩한 성과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30년을 해도 얻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리고 한석균은 문수에게 언제나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줬다.
- 의심해라. 또 의심해라.
모든 걸 의심함으로써 계획을 보다 완벽하게 실행하는 것!
문수는 그런 한석균의 가르침을 숙지했고, 명심했다.
그래서 지금도 의심을 했다.
‘분명히 이건 훈련의 일환일 거다. 흠…… 그럼 갑작스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 대처하는 방법을 익히는 건가?’
비상시의 대처 요령.
확실히 필요한 훈련이다. 더불어 이제까지 문수가 받았던 훈련과는 거리가 먼 훈련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문수는 이미 계획된 것들을 착실하게 수행하기만 했을 뿐, 갑작스런 돌발 사태나 변수의 등장에 대한 대처 훈련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반 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
“그렇겠죠. 요즘은 한 달만 지나도 세상이 바뀌잖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한 번 보게.”
말과 함께 한석균이 건네준 건 스마트폰이었다. 요즘 시대에 스마트폰 하나면 모든 걸 알 수 있다.
“와이파이 잘 뜨나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르네.”
스마트폰을 작동시키자마자 곧장 문수가 한 건,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습득하는 일이었다.
여러 개의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주요 기사들을 빠르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나라꼴이 말이 아니네요, 경상수지가 또 적자라네요.
경제 이야기부터.
“후우, 엘지는 또 졌네요.”
“야구를 좋아하나?”
“한때는 광팬이었죠.”
“후후후, 나도 한때는 야구를 좋아했던 적이 있었지. 그래서 메이저 리그 구단 하나를 사려고 했는데 막상 그때 원하는 구단이 매물로 나오지 않아서 말이야.”
스포츠 기사도 봤다.
“요즘 여자 연예인은 죄다 사업가들하고 결혼하네요? 재벌 2세 아니면…….”
“왜? 연예인 소개시켜줄까?”
“됐습니다.”
연예란도 가볍게 훑어봤다.
그러나 결국 이야기의 끝은 현재 대한민국은 가장 떠들석하게 만든 사건으로 귀결됐다.
“쯧쯧쯧, 대체 왜 멀쩡한 성인이 애들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하고 그러는 겁니까?”
최근 이슈가 됐던 아동성추행 사건들. 전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사건이었고, 그 이후 아동의 성에 대한 사회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은 빠르게 바뀌지 못했다.
기어코 역대 아동관련 성범죄 중에서 최악이라 불릴 만한 범죄가 일어난 것이다.
조길철.
20대 후반의 사내가 3명의 여아를 납치한 후에 3개월에 걸쳐, 감금 및 성추행을 했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그 아이들을 이용해 성매매까지 벌였고, 그중 한 명인 성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더 심각한 건 그 성매매 관련자들 중에는 고위 공직자 관련 자제도 있었으며, 조길철 자신은 어느 대형 로펌 간부의 자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미 조길철은 역대 그 어떤 아동강간범도 가지지 못했던 막강한 변호사 부대로 무장한 상황이었다.
“세상이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데, 날이갈수록 오히려 흉흉해지기만 하는군요.”
“그런가?”
“제가 보기엔 그런 것 같습니다.”
솔직히 이런 기사를 보면 문수도 가슴이 아릿했다.
왜 세상은 이 따위인 걸까?
왜 세상에는 이렇게 죽어 마땅한 놈이 많은 걸까?
“이 인간도 결국 평생 살겠죠?”
“대한민국도 일단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지 꽤 됐으니 아마도 그렇겠지.”
한석균은 말과 함께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문수는 그 미소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도?’
한석균이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아니면 아닌 거지, 아마도라니?
‘대체 뭐야?’
문수가 한석균을 의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볼 무렵, 한석균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이윽고 한석균과 문수가 찬 타는 서울 도심으로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