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5.
사내는 마법사였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였다. 신이 만들어놓은 울타리조차 뛰어넘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사내는 신이 만든 그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그 울타리 밖에 무엇이 있는지 너무 궁금했던 탓이다. 죽을 수도 있었지만, 사내는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호기심이 더 강했다.
폴짝!
울타리를 뛰어넘었을 때 사내 앞에는 새로운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구라는 땅 위에 세워진 세계였다. 사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그러나 세계는 다르지만, 같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였다. 그리고 사내는 그 인간들 속에 섞이기 시작했다.
지구라는 세계는 마법사였던 사내에게 너무나도 대단한 세계였지만, 반대로 사내가 가진 마법은 온갖 놀라운 것들로 가득 찬 세계 속에서 사내를 유일한 존재로 만들어줬다.
몇 가지 마법을 쓰는 것만으로도 어느 새 사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부와 명예와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모든 걸 손에 넣었다고 여겼다. 이제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사내는 고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사내 눈앞에 비친 건 고향이 아니라, 거울 속에 비친 비루한 노인뿐이었다.
“이르지만, 슬슬 배가 출출해질 때로군.”
차안이었다.
‘우와…… 이게 자동차야? 어떻게 내 집보다 넓은 것 같지?’
한석규, 그가 가지고 온 고급 세단 내부는 정말 너무 넓었다. 실제 공간이야 문수의 원룸보다는 좁겠지만, 왠지 모르게 집보다 더 크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이 차가 신기하나?”
“다, 당연한 거 아닙니다.”
“하긴 나도 자동차란 걸 처음 봤을 때는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지.”
“예?”
갑작스런 한석균의 말에 의문을 던지는 문수. 한석균은 그런 문수의 표정을 무시했다.
“혹시 먹고 싶은 게 있나?”
“아뇨, 딱히…….”
“그렇게 열심히 똥을 쌌으면 출출할 법도 한데?”
“……사실은 무지하게 배고픕니다.”
꼬르륵.
마치 문수의 주장에 동조하듯, 문수의 배가 열렬하게 외쳤다.
사실 배가 고플 만도 했다. 어제 빈속에 술만 처먹었다. 속이 말이 아니다. 거기다 수중에 돈도 없어서 이러다할 식사도 못한 상황. 점심 못 먹었지, 저녁은 술만 먹었지, 다음 날 아침도 못 먹었지. 그런 주제에 쌀 건 다 싸버렸지.
배가 안 고프면 인간이 아니다.
“특별히 먹고 싶은 게 있나?”
“이것저것 다 먹고 싶은데요.”
“그럼 뷔페가 딱 적당하겠군. 혹시 가보고 싶은 뷔페가 있다면 말해보게.”
“사주시는 겁니까?”
“적어도 이 나이 먹고 어린놈하고 더치페이는 하지 않는다네. 뭐 자네가 사준다면 먹겠지만.”
“킬츤 호텔 뷔페.”
“음?”
순간적이었다. 문수는 거의 본능적으로 대답했고, 그 대답에 가장 놀란 건 문수, 자신이었다.
“아, 아닙니다. 헛소리가 나왔네요.”
“은근슬쩍 본심을 말하는 재주가 있군.”
“그냥 근처 순대국밥 집에서 한 그릇씩 하죠.”
한석균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킬츤 호텔로 가게. 그쪽에 내가 간다고 알리고.”
“알겠습니다.”
운전기사가 대답했다. 문수는 그제야 눈앞에 있는 인간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다는 킬츤 호텔도 마음 내키면 살 수 있는 대부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냥 순대국밥도 괜찮은데…….”
“미안하지만 순대국밥을 싫어하는 건 아닌데 휠체어 타고 들어가는 건 좀 그렇잖은가? 더군다나…… 지금 날 따라오는 경호원 숫자만 백여 명 안팎이네. 걔들이 다 들어올 정도로 자리가 넉넉한 순대국밥집은 그렇게 많지 않더군. 그보다 어째서 킬츤 호텔 뷔페를 택한 겐가?”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는데…… 요즘 보통 뷔페는 그냥 마음 내키면 갈만한데 거긴 좀 그렇더군요.”
킬츤 호텔 뷔페.
뷔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꿈의 성지라고 불리는 장소다. 초밥을 달라고 하면, 즉석에서 초밥 장인이 초밥을 만들어주고, 스테이크를 먹고 싶다고 하면, 즉석에서 구워주고, 국수를 먹고 싶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밀가루 반죽을 시작하는 곳.
덕분에 한 번 식사하는데 30만 원을 넘는 곳이었다. 할인이나, 멤버쉽 카드도 없는 곳. 호텔 투숙객도 알짤 없이 돈 낼 거 다 내고 식사해야 하는 곳.
하지만 그럼에도 식사를 하기 위해선 최소한 일주일 전에 예약을 해야 하는 곳.
나름 대식가 기질이 있어서, 뷔페를 자주 가는 문수는 그런 킬츤 호텔 뷔페를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오늘 기회가 온 것이다.
‘솔직히 지금도 꿈 같다.’
언젠가 먹을 기회가 올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얻어먹게 될 줄은 몰랐다.
꿈에도 말이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킬츤 호텔에 도착했을 때 언제나 사람으로 북적이던 킬츤 호텔 정문은 조용했다.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단지 투숙객 대신 킬츤 호텔의 직원으로 보이는 이들 수백여 명이 질서정연하게 서있었다. 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로 말이다.
그 앞으로 이미 도착한 경호원들이 잽싸게 인간 성벽을 만들었다. 이윽고 모든 준비가 끝난 후에야 한석균이 차에서 내렸다. 한석균이 나오자마자 꽤나 나이 좀 먹은 듯한 젠틀한 노인이 허리를 숙였다.
“한석균 회장님께서 저희 킬츤 호텔을 이용해주셔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현재 킬츤 호텔 서울의 지배인으로 있는 김주호라고 합니다.”
“김 지배인, 반갑네. 갑작스레 찾아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말씀만 하시면 언제든지, 모든 객실을 비워드릴 수도 있습니다.”
슬그머니 차에서 내린 문수는 그 광경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었다.
‘와, 대한민국에서 이런 게 가능하긴 하구나. 드라마가 오히려 우습게 보일 정도네.’
한석균.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세계 최고의 대부호.
‘그런 인간이 왜 나를 찾아왔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예삿일은 아니군.’
꿀꺽.
문수는 침을 삼켰다.
꼬르륵!
하지만 배는 정직했다. 밥을 달라고 지랄을 하고 있었다. 문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면접 때는 딸꾹질, 이 중요한 상황에서는 배때기가 지랄을 하는구나. 아주 쌍으로 지랄을 해. 다음에는 어떤 게 지랄할지 진짜 궁금하다.’
문수가 자신의 몸뚱이를 나무라는 사이, 한석균과 경호원 그리고 문수는 엄청난 속도로 킬츤 호텔 2층에 마련된 뷔페로 이동했다. 모든 과정은 너무나도 부드럽게 진행됐다. 문수가 눈 몇 번 깜빡했을 때 그는 어느새 식탁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요리사도 없었고, 경호원도 없었다. 그저 이미 만들어진 음식들만 있을 뿐이었다.
적어도 1천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이 거대한 뷔페를 단 두 명이 이용하게 된 것이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가져다 먹게.”
한석균의 말에 문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천천히, 느릿하게 뷔페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접시에 펐다. 한석균은 자신의 접시 위에 쌓이는 음식들을 보았다.
왠지 이건 아니다 싶었다.
‘장난이 정도를 넘으면 폭력이 되는 법이다.’
또 다른 소설 속의 주인공의 대사. 그 대사가 지금 머릿속에 떠올랐다.
‘난 지금 장난을 치는 건가?’
너무 허무맹랑한 상황 진행에 저도 모르게 장난으로 이 상황을 대하기 시작한 것 같다.
자의든 타의든 그건 중요치 않다.
상대가 느끼는 게 무엇인가, 그게 중요한 거지.
또 다시 소설 속의 어느 인물의 대사가 떠올랐다.
‘불꽃은 언제든 피어오른다. 인생도 언제든 종막을 맞이할 수 있다. 불꽃은 영원하고, 인생은 무상하다. 때문에 불꽃이 필요하다면, 그 자리에서 붙잡아라. 손이 타버리더라도 목숨이 잿더미가 된 후에 잡는 것보단 가치있으리.’
3년 동안 잊어버렸던 그것들이 왜 지금 떠오르는 것일까?
더군다나 그때는 그저 의미없이, 그럴싸하게 써내려갔던 것들이 왜 지금에서는 심장에 꽂히는 비수가 되어버린 것일까?
‘나는…….’
문수가 무언가를 결정한 듯 눈빛을 바꾸었다.
문수가 돌아왔다.
“음식이 없군.”
“더 이상의 장난은 폭력이 될 뿐입니다.”
“크크크…… 검은 왕의 시대였던가? 1권에서 주인공이 자신을 가르치던 검술 선생에게 했던 대사였지.”
문수는 깜짝놀랐다.
“어떻게 그걸…… 아!”
그제야 문수는 한석균과 대면한 직후에 그가 보여줬던 책이 떠올랐다. 그 책은 자신이 썼던 책이었다. 더불어 한석균은 문수보고 그 책의 작가임을 물어봤었다.
똥 때문에 잠시 잊어버리게 됐지만.
“나 같은 인간이 아무 이유도 없이 자네를 만나러 왔을 것 같나? 반대로 이유가 있다면, 그저 그 이유 하나만 가지고 자네를 만나러 왔을 것 같나? 난 이래 뵈도 이런저런 힘이 많은 노인일세. 자네보다 육체적 힘만 부족할 뿐이지.”
“장난을 치지 않는 건 적절한 판단 같군요.”
“맞네. 더 이상 분위기가 개판이 됐다면 내 심기도 꽤나 뒤틀렸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자네는 충분히 합격점을 받을만하네.”
“무슨 합격점입니까?”
“내 대신 나의 소망을 이루어줄 자. 그에 대한 합격점을 말함이네.”
이야기를 듣던 문수는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다. 온갖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채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었다.
짜악!
그 순간 문수는 제 손으로 제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머릿속이 웅웅 울릴 정도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볼이 얼얼하고, 화끈했다. 볼에는 손바닥 자국이 시뻘겋게 올라왔다.
문수는 그 상태로 말했다.
“이야기를 경청하겠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50년 전으로 거슬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