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3.
노인은 거울을 보고 있었다. 거울 속 노인은 참으로 추레했다. 휠체어가 아니면 더 이상 움직일 수조차 없을 정도로 두 다리는 쓸모없는 것이 되었으며, 고뿔 한 번에 수십 명의 의사들이 달라붙을 정도로 몸뚱이는 쇠약해졌다. 종국엔 기어코 암까지 걸렸다. 세계적 명의라고 불리는 이들은 노인에게 말했다.
“요즘 암은 예전 암과 다릅니다.”
“저희 병원에 오신다면 완치가 가능합니다.”
“제가 담당의가 되어 24시간 보살펴드리겠습니다. 제 병원으로 오시지요.”
“병원이 필요합니까? 모든 시설과 장비를 가지고 회장님의 자택에 병원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최고의 실력자들을 보내드리지요.”
“장담합니다. 저보다 오래 사실 겁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노인을 자신의 고객으로 만들고자 했다. 매년 적게는 수십억 원에서 많게는 수백, 수천억이 넘는 돈을 버는 그들이 노인의 딸랑이가 되길 마다하지 않았다.
대체 노인의 정체가 뭐기에?
“흐흐흐, 정말 나도 많이 성공했군.”
거울 앞에 선 추레한 노인의 이름은 한석균.
그는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은 자였다.
문수는 시끄러운 텔레비젼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빌어먹을…….”
술에 취한 뒤에 집에 오자마자 텔레비전을 켜놓고 잠이 든 것이다. 머릿속에 든 건 전기세였다.
“이게 다 돈인데 말이야.”
흐아암, 하품 한 번 거하게 하며 아침 운동을 마친 문수는 다시금 텔레비전 앞에 누웠다. 딱히 할 게 없었다. 면접은 떨어졌고, 이제 남은 건 채용시즌이 오기 전까지 스펙업을 하는 것뿐이다.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해야 하나…….”
통장 잔고가 간당간당하다. 학원도 다니려면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해야 할 것이다.
“쯧.”
그렇게 생각하니 더 움직이기 귀찮아졌다. 문수는 텔레비전 앞에 멍하니 서있었다.
“이래서 바보상자, 바보상자 하는구나.”
소설가를 업으로 삼았을 때는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다. 왠지 보기 싫었다. 볼 때마다 무언가가 하나씩 죽어가는 느낌이었다. 영감이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텔레비전을 보면 그런 게 시들어가는 느낌이라서, 한때는 텔레비전을 치우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가의 길을 포기한 뒤로부터 텔레비전은 그에게 친구나 같았다.
매달 케이블 요금만 지급하면 정말 무궁무진한 세계가 텔레비전 속에 있었다. 정말 텔레비전과 리모컨만 있으면 365일 넋을 잃고 살아도 문제 없을 것 같았다.
더불어 문수의 가슴 속에 그나마 남아있던 창작 의욕은 아주 썩어문드러졌다. 예전에는 공부를 하면서도 불타는 창작욕에 몸을 주체하지 못했는데 요즘은 이력서 쓰는 것도 버겁다.
“킥킥, 그때는 3일에 한 권씩 뚝딱 만들었는데.”
200자 원고지로 1천장 분량의 책을 3일에 뚝딱 만들던 게 어제일 같은데, 이제는 200자 원고지 10장 분량의 자기소개서 쓰는 것도 힘들어 죽을 지경이다.
“에휴, 나도 돈 걱정만 없으면 그냥 취미로라도 소설이나 쓰면서 사는 건데.”
푸념을 내뱉던 문수의 눈에 마침 세계 최고의 대부호, 한석균에 대한 뉴스가 나왔다.
한석균이 쓰러졌다는 내용의 긴급속보였다.
“저 양반이 쓰러졌어? 역시 세월엔 장사 없구나.”
한석균.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전세계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을 것이다.
현재 세계적인 석유기업 KP, 소프트웨어 시장의 절대강자 OPS소프트, 최고의 군수기업이라 평가받는 화랑 시스템, 세계 10대 기업 중 하나로 선정된 파도 전자…… 이 외에도 대기업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무수히 많은 기업들.
그 기업들의 최대주주 또는 최고책임자가 바로 한석균이란 양반이다.
“돈이 1천 원 넘게 있어도 죽음 앞엔 평등한 건가?”
그런 한석균의 재산은 대략 1천조 원! 솔직히 감이 오지 않는 수치다. 보통 부호 순위를 매길 때 대체적으로 석유 매장량이 어마어마한 나라의 왕가의 사람들은 거론하지 않는데, 한석균의 재산은 그런 그들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였다.
인류 역사상 한 시대에 저만한 부를 축적한 자가 과연 있긴 할까?
여하튼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한석균 때문에 먹고 사는 사람의 숫자가 백만 명을 훌쩍 넘기고, 그가 내는 세금에 국책사업의 스케일이 달라질 정도라고 하니, 정말 대단한 양반이긴 한 것 같다.
하지만 역시 나이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예전에도 몇 차례 그의 건강악화 따위의 기사가 온갖 언론매체의 들썩이게 만들었고, 대체적으로 그의 명줄에 종각에 다다랐다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때문에 그의 후계자를 놓고 온갖 드라마가 써지는 중이었다. 왜냐하면 한석균은 슬하에는 손녀 한 명만 있는데, 이미 한석균이 손녀에게 재산은 몰라도 경영권을 물려줄 생각은 없다고 공헌했었으니까.
“보면 배만 아프지.”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한 문수 입장에서는 솔직히 체감조차 안 되는 이야기다.
“응? 진짜 배가 아프네.”
그 순간 갑작스레 몰려오는 복통에 문수의 표정이 헬쓱해졌다.
“헉, 어제 안주도 안 먹었는ㄷ…….”
몰려오는 복통이 보통이 아니다. 진짜 간만에 장이 꼬이는 느낌이다. 반대로 이거 한 번 싸면 진짜 제대로 된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긴장감과 흥분이 묘하게 뒤섞이기 시작했다.
“화, 화장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띵동!
그 순간 초인종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박문수는 찰나 동안 온갖 고민을 했다.
‘젠장! 빨리 처리하고 싸러 가자.’
“누구세요?”
고민 끝에 문수는 잽싸게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 너머로 휠체어를 탄 노인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응?”
집을 잘못 찾아온 건가?
“저기 누구…… 헉!”
그 순간 문수는 하마터면 바지에 똥을 지릴 뻔했다.
“자네가 이 책의 작가인가?”
휠체어에 탄 채 나뭇가지마냥 앙상한 손으로 과거 문수가 썼던 책 한 권을 내미는 노인.
“하, 한석균?”
그는 세계최고의 대부호 한석균이었다.
4.
가끔 세계적인 재벌 혹은 투자자와의 식사가 경매에 나오고는 한다.
그러면 돈 많고 꿈 많은 젊은 이들은 수십억이 넘는 돈을 지불하고 그들과 식사를 가진다.
누군가는 돈지랄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매우 뜻 깊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만약 세계적인 대부호인 한석균과 1대1으로 대면할 수 있는 자리는 경매에 붙이면 얼마가 될까? 일국의 대통령조차 만나려면 일단 대기표부터 뽑아야 한다고 알려질 정도로 만나기 힘든 그와 대면할 수 있는 기회라면 정말 수백억이 넘는 돈을 지불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그와의 만남을 대면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가지게 된 박문수가 한석균에게 가장 먼저 했던 말은 그거였다.
“저, 저기 진짜 죄송합니다만 똥 좀 싸고 오겠습니다.”
“내가 타이밍을 잘못 잡은 것 같군.”
“죄, 죄송합니다. 어제 먹은 술이 좀…….”
똥 싸고 오겠습니다.
문수는 그 말을 내뱉거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건 꿈이야. 꿈이 아니라면 지옥이거나. 내가 어제 술마시고 어디서 차에 치여 뒈져서 지옥에 떨어진 게 분명해.’
푸지직!
그러나 뱃속을 가득 채우던 그 악마의 덩어리가 나오자 문수는 저도 모르게 긴장을 풀었다.
“으아…….”
이런 쾌변은 간만이다. 휴지가 필요 없을 것 같다. 1년에 한 번 경험하기 힘든 기적이 왔다.
‘가만. 대체 한석균, 그 양반이 왜 나를?’
그리고 지금 현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들 중에 한 명이 경험하기 힘든 기적이 문수 앞에 왔다.
‘내가 착각한 건가?’
꾸르륵 거리는 뱃속 고동소리를 보면 이건 현실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세계적인 대부호가 문수를 찾아왔다?
‘설마 내가 한석균의 숨겨둔 손자?’
재벌가에서 버려졌다, 나중에 재벌총수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자 버려진 아이를 찾는 스토리. 드라마에서 너무나 자주 사용되어서 이제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스토리다.
더불어 문수는 그런 소재로 소설을 쓴 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지 알 수 있었다. 소설을 쓰면서도 억지로 개연성을 만드느라 별 지랄을 다했으니까.
숨겨둔 자식은 아닐 거다. 지금 문수가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지만, 그는 엄연히 가족도 있고, 추석 때면 슬그머니 조부 댁에 내려가서 꾸중도 듣고 있다. 특히 생김새 쪽에서는 정말 가족이란 말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라서, 주워온 자식이 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럼 왜 왔을까?
‘꿈이 아니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겼지만, 그래도 일단 최대한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자.
한석균, 그가 적어도 문수를 상대로 사기를 치려고 여기 오진 않았을 것이다. 사기를 친다는 게 상대에게 이익을 얻어낸다는 건데, 한석균이 그 정도로 돈이 궁핍한 인간인가?
‘돈이나 사기 따윈 아니지. 장난이라면 모를까.’
소설 같은 일이 일어났다.
세계 최고의 대부호가 손님으로 혼자 왔고, 그런 대부호를 맞이한 주인은 똥이나 싸고 있다.
‘가만.’
문수가 우연찮게 키포인트를 잡았다.
‘혼자 왔다고?’
한석균.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80살은 넘은 걸로 알고 있다. 거기에 노환으로 지병까지 앓고 있다. 심지어 방금 전에 한석균이 쓰러졌다는 긴급속보가 나왔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인간. 보통은 의사들 대여섯 명이 옆에 달라붙고, 보디가드도 수백 명 정도가 달라붙었어야 하는 인간이 혼자 왔다는 게 말이 될까?
‘나를 찾아온 건 내가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대동하지 않았다면 은밀한 제안을 한다는 것.’
박문수. 그는 탐정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판사도 아니다. 그는 소설가다.
그렇기에 그는 여기서 소설을 써보기로 했다.
자신이라면 어떤 소설을 쓸까? 개연성 있는 소설, 그럴싸한 소설.
‘설마 로맨스는 아닐 테고.’
끔찍한 이야기를 쓸 뻔했다. 문수는 잠시 식겁하고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똥 싸기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