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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한조차 어떤 말로 항을 정신 차리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살아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고통일 것 같지 않은가? 당장 서림을 다시 만난다고 해도. 예전처럼 서림을 안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내 어머니는 창녀였다. 하지만 서림만큼은 아니지. 서림만큼 영악하지도 않았고. 남의 자식을 너한테 내 놓을 만큼 뻔뻔하지도 않았지. 네 아이. 어쩌면 네 손에 죽으려나? 그러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니 순순히 여기에서 죽음을 받아들여. 이거야말로 내가 내 창조물에게 주고 싶은 선물인데.”
“형!”
진한이 항을 날카롭게 불렀지만 항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혼돈을 헤엄치고 있었다.
저 자가 하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항이 믿을 것 같지도 않았다.
“형. 여기에서 살아서 나가요. 정인씨가 말해줄 수 있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을 필요도 없어. 내게서 원하는 걸 가져가라니까? 그리고 아이에게 말해. 네가 누군지 알아보려고 네 아버지 몸에서 떼온 살덩이다 라고. 아이가 충격을 받을까? 그러면 머리카락을 가져가.”
준은 큰소리로 웃더니 천천히 항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항은, 자신을 받치고 있던 단단한 지반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했던 아이. 그리고 서림.
그들을 의심하게 된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더럭 겁이났다.
그는 처형당하는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순교자처럼 준을 바라보았다.
“죽여줘.”
“형!!”
진한이 항을 불렀지만 항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비를 구하는 표정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서림을 의심하며 살 수는 없었다.
아이를 바라보는 자신의 눈빛이 바뀌었음을 깨달으며 아이에게 고통을 줄 수도 없었다.
차라리 이렇게 끝내는 것이 낫다고 그는 생각했다.
준은 흔들림 없는 냉혹한 표정을 짓고 항을 바라보았다.
이대로라면 그를 죽일 자신이 있었다.
“혀어엉!!!”
진한은 절규했고 항을 향해 달렸지만 제때 항을 피하게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혀엉!!!”
더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래서 그는 한 순간 시야를 놓쳤고 퍼퍼펑 거리는 소리와 함께 땅이 솟구쳐 오르며 흙이 쏟아졌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한 순간에 솟아난 땅은 금세 다시 가라앉았지만 그 충격이 어찌나 컸는지 나무들은 뿌리가 뽑혀서 이리 저리 쓰러졌다.
항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눈의 히나타가 서 있었다.
“히나타!”
힘이 돌아왔구나! 라고 말하려고 하는 순간 히나타가 팔을 쳐들었다.
그 순간의 히나타는 사람 같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게, 그 순간에 일어나는 일들을 목격하고 참아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팔이 어깨에서 빠지는 것처럼 기괴한 형태로 변하더니 쭉쭉 그 길이가 늘어났다.
“히나……!!”
진한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준은 자기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넋을 놓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깜짝하는 순간, 그 늘어나던 팔이 네 목을 휘감았을 때 준은 미처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끝도 없이 늘어난 팔은 마른 나뭇가지였다.
팔이 어느새 나뭇가지가 되어 준의 목을 휘감았다.
“으으으으으으!!”
흐윽! 이라는 말조차 이을 수가 없었다.
준은 눈 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바둥거렸고 자신의 몸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두 다리가 절망으로 버둥거리고 있었다.
히나타는 고뇌도 갈등도 없이 눈에 보이는 가장 높은 나무의 끝까지 준의 몸통을 올렸다.
히나타의 명령에 반응을 하는 듯, 나무가 움직였다.
죽은 나무 기둥이 빠르게 팽창했고 준을 흡입하려는 듯 구멍을 키웠다.
진한과 항은 다음 순간에 그 공격이 자신들을 향하는 것은 아닌지 겁을 먹었다.
하얀 눈과 하얀 머리.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히나타가 그들이 알던 사람 같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잠깐 동안 준의 몸이 공중에 그대로 떠있었다.
아주 잠깐 사이였다.
준은 그 높은 곳에서 몸이 풀려났을 때 환호해야 하는 것인지 절망해야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마음을 정할 틈도 없이 그를 풀었던 나뭇가지가 날카로운 창처럼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준의 입에서 피가 솟구쳤다.
도무지 한 번도 예상해보지 못했던 결말이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준의 시체를 찾을 수 있기는 할까.
진한은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히나타가 자신의 팔을 거두어들이는 동안, 준을 흡수한 나무가 스스로 움직였다.
거대한 나뭇가지로 준을 끌어안는 듯 하더니 그대로 멈추어버렸다.
그의 몸에서 흐른 피는 땅에 미치지도 못했다.
진한은 목이 아플 때까지 고개를 들고 준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계획은 수정해야겠네요.”
마침내 고개를 내리고 항을 바라본 진한이 말했다.
“뭐?”
진한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저기까지 올라가서 강간할 수는 없을 것 아니에요. 포기하라고요.”
그것을 농담이라고 하는 건지.
항은 진한이 엄청난 광경을 보더니 미쳐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살아요. 살아서 싸워요. 싸움은 끝나지 않아요. 상대가 바뀔 뿐이죠. 나는 오빠가 오빠와의 싸움에서 이길 거라고 믿을 거예요.”
히나타가 말했다.
다시 히나타로 돌아왔지만 그 하얗게 쇠어버린 머리카락과 백탁이 서린 눈은 변하지 않았다.
항이 다가가 히나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항이 생각하기에 히나타가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에, 그가 힘을 보태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항에게 좋은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그를 절망시키는 나쁜 상상으로부터 그를 끌어올려 줄 수 있었던 것이다.
“혹시 히나타.”
항이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히나타는 항을 바라보지 않았다.
준의 시체를, 손도 닿지 않는 그 높은 곳에 묶어버린 것은 준의 이야기 때문이었던 거냐고 묻고 싶었다.
‘너도 역시 내 아이가 저 저주받을 인간의 아이인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러나 히나타가 하염없이 깊고 하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항은 조용히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가죠. 우리가 먼저 끝낸 건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우리가 그쪽을 도와야돼요.”
그렇게 말하고 진한은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애스턴 마틴 뱅퀴시는 주인을 잃었죠. 그 와중에 키를 뽑아가지고 나왔을 리도 없고요.”
태연하게 말하는 히나타는 그제야 히나타처럼 보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희영이 보여준 환영이나 시영과 선우 형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돌아올 수도 있었을 거라고 지명은 생각했다.
하지만 크레이그가 제단 아래의 실험체를 데려온 이후로 인원이 더 늘어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지명은 조금 전부터 지강은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인이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리벳이 확실하지?”
“네.”
“저게 리벳이라면 왜 다시 강은이 형한테 돌아온 거지? 강은이 형을 떠났던 이유는 뭐야?”
“그야 강은 오빠가 수감됐으니까요.”
“지금은 왜 돌아온 거지? 강은이 형은 귀휴를 나온 거잖아. 돌아가야 하는 거고.”
“그렇죠.”
“리벳이 처음부터 우리를 따라온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강은이 형은 그가 들어가기 쉬운 그릇이었을까?”
“그렇겠죠. 이미 한 번 정복한 일이 있었으니까 익숙했을 거예요. 강은이 오빠가 별다르게 거부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고요. 강은 오빠는 두려워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상황을 피하고 싶었을 거예요.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던 마음이 리벳에게 쉽게 자리를 내 주게 된 이유인지도 모르죠.”
“형이 더 이상 매력적인 상대가 아니라고 느끼면 리벳은 어떻게 할 것 같아?”
“더 강한 숙주를 찾아갈지도 모르죠.”
“그게 누구일 거라고 생각해?”
“……!!”
“우리 중에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누굴……. 말하는 거예요?”
지명은 대답대신 지강은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소명이 사요에게 다가가는 것을 지강은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퍽이나 의심스러웠다.
그들이 보아왔던 지강은의 표정과는 상당히 이질감이 묻어났다.
“설마요. 소명 언니요?”
“누나!!”
지명은 정인에게 대답하는 대신 소명을 불렀다.
소명이 뒤를 돌아보았다.
지강은은 귀찮게 되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강은 형.”
지명이 이번에는 지강은을 불렀다.
강은이 그를 바라보았다.
화가 나 있는 표정이었다.
“강은 형!”
지명은 그를 연거푸 부르기는 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지 못했다.
지명이 정인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아미가 심상치 않게 일이 돌아가는 것을 깨닫고 소명을 바라보았다.
“누나, 조심해요.”
아미가 말했다.
소명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아미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지강은을 향하는 것을 보았다.
“아!”
소명의 입에서 작은 탄식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와달라고 억지로 간청을 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강은이 다시 리벳에게 빙의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명은 형용하기 힘든 죄책감을 느꼈다.
“리벳은 새 숙주를 찾을 거예요. 강은 형은 어차피 교도소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지명이 말했다.
‘그리고 강은 형보다 훨씬 더 멋진 숙주를 눈 앞에서 지켜봤으니 리벳이 머뭇거릴 이유는 없어요.’
지명은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소명은 강은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사요에게 돌아섰다.
사요는 눈을 뜨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지옥 같은 소음이 저를 괴롭히게 될까봐, 사요는 현실을 마주하는 것을 겁냈다.
지명은 애가 탔다.
아미는 다시 소명을 불러서 주의를 주려고 했지만 소명이 일부러 지강은에게 등을 보인 거란 사실이 갑자기 깨달아졌다.
“누나는……. 기회를 주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강은이 형한테.”
지명이 말했다.
“강은이 형한테라고요? 리벳한테겠죠!”
아미는 불안에 떨며 말했다.
“누나!!”
아미가 큰소리로 부르며 소명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지명이 그를 막았다.
“누나도 알고 있어. 누나가 알아서 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누나가 너를 쳐야 할 상황이 된다면 누나도 괴로울 거다.”
지명의 말에 아미는 분하다는 듯 지명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거냐고 따지고 싶은 눈치였다.
채영도 슬슬 정신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서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되는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사요는 소명을 바라보다가 채영에게 다가갔다.
소명은 자기가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을 설명했다.
그 소음은, 아마 우리 동료가 들리지 않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였다.
사요는 감격에 찬 얼굴로 소명을 바라보았다.
의심이라고는 전혀 담기지 않은 순수한 눈빛이었다.
그러더니 채영의 증상도 고칠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소명은 자신하지 못했다.
소명이 사요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내가 갑자기 달라질 수도 있어요. 악령이 깃들게 될지도 모르거든요. 무턱대고 나를 믿고 의지하려 들다간 위험한 일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 내가 달라지면 나한테서 달아나요.”
사요는 소명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소명의 눈빛을 보고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내 친구들한테 가요. 그 사람들은 믿을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