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자들-97화 (97/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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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있는 건 위험해.”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바람이 내는 소리가 긴장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진한은 이제 항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쓸 뿐이었다.

진한에게 준은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다행히도 항은 준을 놓치지 않았는지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은 채 달리고 있었다.

준은 점점 숲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위험한 장소로 유인하려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항은 멈추지 않앗다.

준은 길을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달릴 때마다 그의 몸에 부딪히는 잔가지들이 떨어져나갔다.

가끔 꽤 자란 나뭇가지에 몸이 부딪히는 바람에 준이 신경질적인 비명을 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항의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갑자기 준이 숨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준을 놓칠 것 같았다.

준은 숲을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능수능란하게 뛰었다.

그냥 달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호흡을 조절했다.

쉼이 필요할 때는 내리막길을 선택했고 다시 힘이 보충됐다 싶으면 오르막길을 택했다.

항은 자기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진한이 곧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진한을 신경쓰다가 한 순간에 항이 준을 놓쳐버렸다.

“젠장!!”

항이 소리쳤다.

앞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진한이 앞서가며 달리기 시작했다.

“호오.”

기이한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사십 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준이 보였다.

“내가 왜 진작 알아보지 못했는지 모르겠네.”

준이 말했다.

진한은 그가 무슨 꿍꿍이인지 알지 못했다.

항이 그의 시선을 끄는 동안 자기가 몰래 준에게 다가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진한이 아무리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어도 준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진한이 한 걸음을 움직이면 자신은 두 세 걸음을 물러나면서 준은 진한에게 그것이 헛된 짓임을 알려주었다.

“나한테는 네 소리가 다 들려. 아무리 애써봐도 네가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는지 심장소리, 땀이 흐르는 소리도 다 들려.”

진한의 목으로 마른 침이 넘어가자 준이 웃음을 지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도 생생하군.”

진한은 그가 그저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준의 관심은 항에게 몰려 있는 것 같았다.

“서림의 남편이군. 진작 알아봤어야 됐는데.”

준이 입가를 올리며 웃었다.

그렇게 재수 없이 구는데도 그의 기이한 아름다움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희한하다고 장항은 생각했다.

“서림이 죽었다고 믿었으면 좋았을 텐데. 여기까지는 어떻게 온 거지? 내가 너를 만들었어. 알고 있지? 네가 데리고 온 떨거지들도 내가 함께 만들었지. 너희들을 특별하게 해 줬고 너희들이 남들과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해 줬어. 너희들을 만든 건 나라고 할 수 있지. 정자와 난자를 주는 그런 한심하고 가치없는 일이나 한 너희 부모들이 아니라 내가, 너희한테 생명을 준 거야.”

“미친 새끼.”

항이 일갈했다.

“그래. 무슨 생각을 하고 온 거지? 어쩌려고? 뭘 할 수 있다고 기대한 거지? 하긴. 의미있는 일을 해냈다고 인정을 해 주기는 해야겠군. 이렇게 놀라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거든.”

“개소리 그만하고 나와.”

항이 소리쳤다.

“서림을 찾으러 온 건가? 서림은 너를 어색해할걸? 서림은 양심있는 여자니까 너한테 돌아가려고 하지 않을 거야. 밤마다 내가 서림을 안았지. 서림이 얼마나 대단한 여잔지 당신이랑 얘기하면 얘기가 좀 통할 것 같군. 당신도 알잖아. 그렇지? 아이까지 낳은 여자가 그렇게 황홀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건 믿기가 어렵지.”

진한이 항을 바라보았다.

항은 준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얼굴에 핏발을 세우며 버텼다.

그가 이를 악 무는 것이 보였다.

“저 새끼가 하는 말 다 거짓말이에요. 형.”

진한이 말했다.

“서림은 나에게 완전히 사육을 당했지.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나는 서림을 그녀의 육체 안에 가둬 뒀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몇 시간 동안 누워 있어야 했지. 다른 사람이 그녀의 몸이 썩지 않게 하려고 돌려줘야 했어. 그런 채로 살았지. 서림을 감금할 수 있는 사람도, 다시 풀어줄 수 있는 사람도 나 뿐이었어. 내가 서림을 찾아갈 때 서림이 얼마나 환호했겠는지 생각해봐. 서림은 내가 자기를 찾아가 줄 때만 기다리면서 긴 구속의 시간을 견뎌냈지.”

“거짓말이에요. 형. 서림 누나는 형을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렸어요. 서림 누나는 늘 형을 생각하면서 그림에 형의 이름을 새겨 넣었고요.”

항은,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는 표정으로 진한을 바라보았다.

“이런. 이런. 멍청한 동생들이 형을 걱정해서 거짓말을 만들었나보군. 형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고작 그래서야.”

“희영씨가 환영을 보여줬어요. 여기에 온 건 서림 누나를 구하기 위한 거였고요. 서림 누나는 형한테 부끄러운 짓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형을 기다리고 계속해서 그리워할 수 있었던 거고요. 저 고자 같은 새끼는 누나의 손끝도 건드리지 못했어요.”

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는군. 움직이지도 못하는 여자한테 내가 손가락 하나 갖다대지 못했을 거라고?”

준이 비웃었다.

진한은 더 이상 무슨 말로 설명을 해야할지 알지 못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버벅거렸다.

하지만 항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서림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테지. 준 맥브라이언. 네가 한심하다고 생각했겠군. 움직이지도 못하는 여자한테 겁을 내는 너 자신을 보면서. 애초에 서림을 상대로 삼지 않는 게 좋았을 거다. 바보 같은 새끼야!”

준의 얼굴이 비틀렸다.

준이 총신을 들었다.

“젠장.”

진한이 작은 소리로 뇌까렸다.

“대단한 미모라고 생각했지. 남잔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네 시체가 온전하면 시체를 강간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너도 알다시피 나는 전혀 그쪽 취향이 아니긴 하지만 말이야.”

항이 말했다.

준은 저도 모르게 항의 도발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건 아닐 것 같고. 어머니였겠지? 너한테 그런 얼굴을 물려준 사람은. 그럼 네 어머니도 대단한 미녀였을 거란 소린데. 어린 나이에 범해졌겠군. 네 엄마나 너에 대해서 이해해주지 못할 짐승 같은 인간한테. 그렇지? 어린 나이에 너를 낳은 거지? 그래서 너를 보호대상으로 여기지 못하고 경쟁상대나 도피에 사용할 도구로 쓴 것 같은데? 네 어머니는 너랑 같이 물에 빠지면 갈등조차 하지 않고 너를 바닥에 깔고 네 위에 올라설 사람이었겠지. 이봐, 준 맥브라이언. 새삼스럽게 네 어머니 편을 들어줄 건 없잖아? 너는 고작 그런 인간의 자궁을 열고 나왔어. 네 사고방식이 열등한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겠지. 네가 우리를 만들었다고? 네 어머니가 너를 만든 것처럼?”

항이 소리를 높여서 웃었다.

총알이 터무니없이 먼 곳에 있는 나무에 박혔다.

준은 자기가 도발에 넘어가서 평온을 교란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쓸데없이 총알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순식간에 몇 발이나 쏴버렸다.

“네 어머니는 어땠어? 네 의붓 아버지가 손을 내밀자마자 누우라는 말을 듣기도 전에 다리 가랑이를 벌렸을 것 같은데. 너는 고작 그런 어머니의 고작 그런 구멍에서 나온 열등한 인간이야. 너도 그걸 알고 있었고.”

다시 한 발.

“그걸 깨닫는 게 싫어서 너를 다스리려고 했겠지. 이런 저런 미친 실험을 한 것도 혼탁한 물 속에 더러운 찌꺼기를 가라앉히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니었어? 혹시 또 모르겠군. 너는 네 어머니의 경쟁자였잖아? 네 의붓 아버지한테 네 몸을 준 건 아니야?”

다시 한 발.

“좋아서 소릴 질렀어?”

다시 한 발.

“이봐. 준. 이렇게 가엾어서야. 이 친구 좀 보게. 정말 그랬던 거야? 장난삼아 한 말에 이렇게 흥분하다니. 강제로 당한 거야? 그래서 아버지를 죽였어? 이런 이런. 그럼 조금은 불쌍하게 여겨줘야겠군. 네 시체를 강간하면서 네 알몸에 눈물 몇 방울은 흩뿌려주지.”

“닥쳐. 개새끼야!!”

준이 소리를 질렀다.

“잘도 떠들어대는군.”

“슬슬 겁나지? 몇 발이 남았는지 걱정이 되지? 너는 상황을 언제나 네가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겠지. 용케 총을 준비해 두기는 했군. 너처럼 교만한 남자가. 이런 궁지에 몰릴 거라는 생각을 하기는 힘들었을 텐데. 응? 혹시 네가 죽인 칸트가 콘솔박스에 넣어줬던 걸 가지고 나온 거야? 그래. 칸트는 어땠어? 칸트를 만난 건 네가 어렸을 때지? 그때는 아직 힘의 균형이 네 계부한테 쏠려 있을 때 아닌가? 네가 사랑한 유일한 여자도 네 아버지한테 먹혔겠군. 아버지가 먹다 남긴 걸 줄곧 먹었던 거군. 어땠어?”

다시 한 발.

진한은 치를 떨었다.

그것도 항의 능력인 건가 했다.

상대방의 고통을 간파해내서 그것을 파헤치는 능력.

항에게 잘못 걸렸다가는 된통 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은 준에 대해서 그동안 들었던 것들을 토대로 마구 떠벌였다.

그는 준의 얼굴을 읽었다.

준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세한 표정.

준의 얼굴 근육, 그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읽었다.

준이 어떤 말에 반응하는지.

어떤 말을 불편해하고 어떤 이야기가 빨리 끝나버리거나 멈추기를 원하는지.

그것이 걸려들기만 하면 항은 마음껏 촉수를 뻗었다.

그는 법 집행자가 아니었다.

오판을 하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면 말라지.

그런 식이니 그렇게 아무렇게나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였다.

하지만 그런 거침없는 언사가 준과 진한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준이 평정심을 잃는 것을 보면서 항은, 설마! 정말 그런 거였어? 라고 생각했다.

아니라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서림을 모욕하고 괴롭힌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생각 말고는 없었다.

“앞으로 두 발이에요.”

진한이 말했다.

그 소리가 준의 귀에도 들릴 거라는 것을 알고 한 건지 모르고 한 건지 항은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유용하게 써야겠군.”

준이 말했다.

“서림이 세헤라자데와 결혼을 했던 모양이군. 아내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도 모르고 시시덕거리면서 잘만 살아오기에 도대체 뭘 보고 당신같은 사람이랑 결혼을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서림이 뭐에 반했는지 알겠어. 밤마다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줬겠군. 서림이 원한 건 다른 거였을 텐데.”

“할 얘기가 고작 그런 것밖에 없나보지?”

항이 비웃었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해도 좋아. 한 가지만 가르쳐주지. 장항. 나는 너한테 최면을 걸었지. 너는 내가 명령하면 뭐든 했어. 서림도 마찬가지였지. 여기로 데려오기 전에. 아직 한국에 있을 때. 우리 셋이서 재미있는 밤을 보냈었는데. 너는 네 눈 앞에서 내가 네 여자를 갖는 걸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지. 네 여자의 배가 불러오는 걸 보면서 기뻐하는 한편으로 너한테는 가끔 불안한 마음이 들었어. 그 불안의 실체를 알 방법이 없었지? 내가 너를 괴롭히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으면 여기에서 살아서 돌아간 후에 검사를 받아봐. 네가 불임이라는 사실을 듣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내가 봐야 하는 건데. 네가 나를 죽일 수 있다고 믿는다면 내 살을 떼 가라고 권하고 싶군. 네가 네 아이라고 믿었던 녀석이 내 아이였다는 걸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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