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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이를 도와. 그리고 웬만하면 끝까지 저 녀석을 믿어줘!!”
“젠장.”
“다른 녀석들도 지켜주고. 그게 네가 해야 할 일이야.”
그것으로 계획은 정리가 되었다.
소명은 더 이상 동요하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해졌던 것이다.
제대로 싸울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수적인 열세가 이 정도가 된다면 분명히 불리했다.
사이보그가 아닌 이상 강은과 소명 모두 지치게 될 거였다.
크레이그의 뒤를 따르던 좀비들은 슬슬 이성을 상실했다.
싸울 대상을 잘못 잡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어떻게 순순히 크레이그를 따라나와서 크레이그를 도울 생각을 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저 남자가 연구원들 몇 명을 죽이고 문을 열어줬어요. 이 사람들은 저 남자가 자기들을 도와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정인이 크레이그에 대해 말했다.
“그런 거였군.”
몇 명이 서툰 공격을 가해왔다.
그때마다 소명은 뒤로 물러설 뿐 제대로 반격을 가하지 못했다.
날파리같이 성가신 존재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살기를 가지고 공격할 마음도 쉽게 들지를 않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예요?”
강은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강은의 팔이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움직였고 그에게 안겨있던 좀비 하나가 푹 꺼지듯 쓰러졌다.
이미 일은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을 소명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였다.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화면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과 소명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던 것은.
소명과 강은 모두 큰 부상 없이 몸을 굴렸다가 일어섰지만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 미안. 방향을 잘못 잡았어요.”
아미의 목소리였다.
빛과 함께 들려온 굉음에 아직도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소명과 강은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크레이그의 뒤를 따라 질서 없이 달려오던 무리의 한가운데에서 폭탄이 터졌다.
‘아, 제발 그만하자.’
소명은 겨우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끔찍한 무리들이 이제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 되어 나가떨어져 있었다.
소명은 그것이 아미가 만든 사제 폭탄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건지 가늠 안 되는 살덩이와 피투성이가 된 옷자락, 신발에 신겨져 있는 발들이 나뒹굴었다.
아미도 놀란 듯했다.
더군다나 소명과 강은이 같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웬만한 강심장이라고 해도 두려웠을 것이다.
아미가 장난스럽고 무책임하게 말을 한 것은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를 반증하는 거나 다름 없었다.
그의 얘기만 들어서는 비비탄 몇 발을 방향을 잘못 잡아 쏜 것처럼 들릴만했다.
아미의 옆 얼굴은 긴장으로 잔뜩 굳어있었다.
나무에는 이파리들이 남아있지 않았고 하늘에서 나뭇잎이 비처럼 쏟아져내렸다.
좀비들은 우왕좌왕했다.
크레이그는 이 모든 상황에 어리둥절해 했다.
자기가 이 오합지졸을 데리고 혼자서 이들과 맞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분노하는 것 같았다.
크레이그는 사요에게 달려가 발로 세게 사요를 걷어찼다.
“일어나. 정신 차리라고. 이 개 같은!!”
하지만 사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크레이그는 사요를 위협하려다가 그냥 뒤로 물러섰다.
억지로 싸우게 해 봐야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하나 더 가요!”
아미가 외쳤다.
매캐한 화약 냄새가 났고 한 번 더 나뭇잎 비가 쏟아져 내렸다.
공중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것은 나뭇잎 뿐만은 아니었다.
살아있던 사람들의 살덩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의 몸에 붙어 있었던 살덩이들이 같이 쏟아져 내렸다.
끔찍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더 있어?”
소명이 소리쳤다.
“두 개 더요. 지금 던져요?”
아미가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소명은 그것이 아미의 페이크라는 것을 눈치챘고 강은을 바라보았고 강은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의 거짓말은 남아있던 사람들을 분열시켰다.
남아있던 사람들 중에 아직 달아날 수 있는 사람들은 달아났다.
소명은 크레이그를 목표로 달려갔고 강은은 달아나는 사람들을 붙잡았다.
크레이그는 아미를 노렸고 소명은 크레이그를 향해 달렸다.
크레이그는 소명이 자신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준이 자신을 믿고 맡기고 간 곳을 정리하고 그를 기다릴 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미의 목뼈를 먼저 부러뜨려 놓고 남은 일들은 찬찬히 할 생각이었다.
소명은 크레이그를 향해 달리다가 뭔가가 자꾸만 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팔로 거칠게 그것을 닦아냈다.
흘러내리는 뜨거운 액체는 피였다.
‘젠장.’
귀찮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소명은 옷 소매로 그것을 다시 닦아냈다.
그러면서 오른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소명은 크레이그가 아미에게 거의 이르렀을 때 그의 머리를 노리고 주먹을 날렸다.
그의 거대한 신장 때문에 주먹은 어깨를 쳤고 요란하게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도 크레이그는 소명을 돌아보았다.
소명은 왼손으로 오른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아래에서부터 위쪽으로 쳐올렸다.
골반을 축으로 몸 전체를 돌리면서 오른손을 처 올리자 광대뼈가 박살났다.
소명은 엇박자로 다시 뛰어 올랐고 공중에서 멈춘 찰나의 시간 동안 평행으로 들어간 주먹에 이마가 움푹 파이며 함몰되었다.
소명이 채 끝내지 못할 일을 끝낸 사람은 지강은이었다.
소명은 기괴한 얼굴이 자기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면서 크레이그가 자기에게 반격을 가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힘없이 앞으로 떨어져버렸다.
목을 잃은 몸이 그대로 서 있었다.
얼마동안.
그 시간이 소명에게는 꽤 길게 느껴졌다.
칼을 비스듬하게 잡고 있는 강은이 그 뒤에 서 있었다.
저렇게 잡고서 목을 단 번에 베어낼 정도였다는 건가.
강은이 소명을 보고 웃었다.
실험체들 중 몇몇은 여전히 날뛰고 있었다.
서로 싸우다가 쓰러진 사람들도 여럿이었다.
그들에게는 오랜 시간동안 속박되었다가 풀려난 감격과 대상을 정하지 못한 분노가 있었을 뿐, 제대로 집중하고 사고할 힘은 부족한 듯 보였다.
강은은 죽음의 사신처럼 다시 그들에게 향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을 성실하게 거두어 들였다.
정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지명이 정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저 사람들. 아무 위협도 되지 못하고 있잖아.”
지명이 말했다.
“지금 우리한테는 그렇겠죠. 하지만 우리가 이대로 떠나버리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재앙덩어리가 될 거예요. 떠나면 된다고 생각하고 쉽게 말하면 안 돼요. 여기가 삶의 터전인 사람들에게 지옥문을 열어놓고 그렇게 태평한 소리를 하겠다는 거예요?”
아미의 말에 지명은 할 말을 잃었다.
“하려거든 빨리 끝내버려요. 저쪽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잖아요. 히나타 누나는 아직 제대로 힘이 돌아오지도 않았고요.”
아미의 말에 소명은 정신이 번쩍 든 듯 걸음을 옮겼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끔찍한 모습이었던 사람들은 이제 눈을 뜨고 보기가 힘든 모습으로 죽어 널부러져 있었다.
소명은 진심으로 그들을 애도했다.
그리고 소명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해 오른 주먹을 날렸다.
행위를 거듭할수록 그들에 대한 연민과 자기 혐오가 겹쳐져서 오히려 소명은 더욱 가혹한 공격을 가했다.
몇 미터나 날아가는 사람도 있었고 몇 사람의 두개골은 소명의 오른 손 안에서 바스라졌다.
이율배반적인 행동이라고 소명 자신도 생각했다.
안타깝기에 더 확실하게 숨을 끊어버려야 한다는 사실에 소명의 가슴은 점점 더 무뎌졌다.
지강은은 제 할당량을 마친 것 같은 기분으로 소명을 돌아보았다.
정인은 불안한 시선으로 지강은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될 것 같아?”
지명이 물었다.
“언제까지 저 사람이 우리랑 같은 편인 거지? 이 싸움이 끝난 후에는 저 사람을 상대로 다시 싸워야 되는 것 아닌가?”
정인은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지 못했다.
“희영이 누나가 있었으면 알았을 텐데.”
아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
집요하고 지루한 추격전이 벌어졌다.
“우와, 씨이발. 미치겠다. 내가 지금 애스턴 마틴 뱅퀴시를 쫓고 잇어. 강간하려고 여자 뒤꽁무니를 쫓아가는 기분이야. 비틀대면서 돌아보면서 마지막으로 저항하면서 도망가는 여자 뒷태 같잖아!”
진한이 말했다.
“그것참. 적절하지 않은 얘기다.”
항이 히나타의 눈치를 보면서 진한에게 호통을 쳤다.
“아, 죄송해요. 형님. 근데 진짜 엄청 섹시하긴 하네요. 아름답다의 최상급이라잖아요. 아, 정말 이대로 덮쳐버리고 싶어요.”
“따라잡을 수 있을 때의 얘기지. 그리고 깡패 두목한테 형님이란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어어, 왜 이러세요. 형님. 그러면 챔프라고 부를까요?”
진한의 말에 항이 움찔했다.
이 녀석이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알지 못해서였다.
“그나저나 소명인 잘 하고 있겠죠?”
진한이 물었다.
“믿어봐야지. 그러는 수밖에 없잖아. 우리는 우리 앞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자고.”
“소명이한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돌아가면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고 핀잔을 줄지도 모르죠. 아마 그럴 거예요.”
진한은 무슨 예감을 받았는지 평소보다 많이 지껄였다.
“걱정하지마. 소명이한테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길 거였다면 희영이가 미리 봤겠지. 안 그래?”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항도 확실히 장담할 수는 없었다.
능력이 고갈돼 버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의 심장에 멍이 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능력이 없을 때는 알지 못했지만 있었던 능력이 한 순간에 고갈되어 사라져버리고 나자 그때 찾아온 패닉은 결코 만만하지가 않았다.
곁에 다른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 절망감에 무릎을 꿀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항은 생각했다.
희영도 그런 이유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이라면!
하지만 항은 그 생각을 오래 하지 않으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히나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백탁으로 덮인 눈은 불안하게 시시각각 변했다.
히나타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항은 히나타나를 보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히나타를 훔쳐보았다.
히나타는 항이 자기를 자꾸만 본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다시 힘을 모으려고 하는 것 같아서 항도 히나타를 내버려 두었다.
드디어 진한마저도 잠잠해졌다.
“저 자식. 차를 버리려는 것 같아요.”
바짝 뒤따르면서도 간격을 충분히 좁히지는 못하고 계속해서 뒤만 쫓아서 답답했는데 진한이 말했다.
항도 앞을 바라보았다.
“빨리 쫓아가. 애스턴 마틴을 쫓는 건 쉽지만 저 녀석이 차에서 내려서 숨어버리면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어.”
진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애스턴 마틴이 멈추고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준 맥브라이언이 밖으로 튀어나갔다.
진한은 입을 꾹 다문 채 전력으로 차를 몰고 애스턴 마틴의 뒤에 바짝 붙여 세우고서 준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항이 그보다 몇 미터를 앞서 있었다.
공터가 숲으로 이어졌다.
“히나타. 차를 타고 돌아가.”
진한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