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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에 치를 떨면서 바닥에 무릎 꿇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항은 믿었다.
하지만 크레이그에게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기가 성공시키지 못한 두려움에 절망까지 더해져서 항을 덮쳤다.
“저 남자는.”
정인이 소리쳤다.
“두려움을 느끼지 못해요.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해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두려움도 알지 못해요.”
“저 남자를 막아야 돼. 좀비들과 싸울 수는 없다고!”
소명도 크레이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준을 놓칠 수는 없었다.
지강은과 소명은 준뿐만 아니라 채영과 사요까지 상대해야 했다.
“히나타. 어떻게 안 되겠어?”
항이 소릴 질렀다.
지명은 히나타의 눈동자가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히나타. 한계를 넘어서는 건 안 돼.”
지명이 말했을 때 항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히나타. 할 수 있는 것만 해. 너를 소진시키는 건 안 돼!”
하지만 히나타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알지 못했다.
히나타의 눈이 하얗게 덮이더니 히나타의 팔에서 한없이 긴 넝쿨이 뻗어나갔다.
크레이그는 뒤를 돌아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은 놀라움에서 멈추었다.
히나타에게서 뻗어나간 넝쿨은 정확히 크레이그의 발목을 노렸다.
하지만 크레이그는 그것을 요령껏 피하면서 달아났다.
히나타가 최상의 컨디션이었다면 크레이그를 잡는 것쯤은 문제가 안 되었겠지만 히나타는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히나타…….”
지명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놔둬. 히나타. 무리하지 마. 네가 더 중요해. 좀비들이 오면 우리가 맡을 테니까.”
소명이 소리쳤다.
항도 소명 쪽으로 옮겨가며 소명의 말에 호응했다.
“지명이랑 아미는 히나타랑 정인일 지켜.”
소명이 말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소명은 진한과 지강은을 바라보았다.
“웬만하면 좀비들이 오기 전에 끝내버리자고.”
진한과 지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항은 자기가 반 사람 정도는 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진한의 곁으로 붙었다.
“아주 쓸모 없지는 않을 거야.”
“그래야죠.”
진한이 말했다.
준은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듯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사요. 지겨운 소음에서 해방시켜 주지. 네 눈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기만 한다면 말이다.”
준이 속삭였다.
사요는 미치기 직전이었다.
자꾸만 몸을 떨었다.
채영은 그런 사요를 바라보았다.
“제가 사요를 도와줘도 되는 건가요?”
채영이 준에게 물었다.
“그야 물론이다. 사요랑 같이 떠나게 해 주지.”
준이 말했다.
채영은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들,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진한이 물었다.
소명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항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어. 준을 끝까지 보호하려고 할 거야. 저 녀석들을 대신해서 내 목숨을 포기할 뜻은 없어. 나한테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
항의 말에 한 사람씩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사요와 채영을 죽이고서라도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그들에게는 있었다.
“저 사람들한테 총은 없어요. 준 맥브라이언은 칸트가 죽은 후에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자꾸 의심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총을 소지하고 자기 곁에 올 수 없게 했어요.”
정인이 말했다.
다행히 정인의 능력은 그나마 아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잘 됐네. 귀찮게 될 뻔 했는데.”
진한이 말했다.
당연히 총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대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은, 히나타 때문이었다.
나무 신이 제때 막아줄 거라고 생각하고 믿었던 건데.
땅을 무너뜨리거나 큰 나무를 솟구치게 해서 총알을 막아줄 거라고 생각했던 건데.
사람들을 구하는데 너무 큰 힘을 쏟게 될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는 순전히 자신들의 힘만으로 일을 끝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진한을 눌렀다.
지강은의 옆 얼굴에서도 땀이 흘러내렸다.
“긴장들 할 것 없잖아. 내 옆에서 쓰러질 수 있는데. 영광이라고 생각해.”
소명이 말하자 진한이 헛웃음을 쳤다.
“나는 쉽게 안 죽어. 네 무거운 시체를 끌고 가야 하게 될까봐 걱정이다.”
“그래? 그럼 누가 누구를 끌고 가야할지 알아볼까?”
두 사람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이에 채영이 먼저 다가왔다.
그의 움직임은 이상했다.
“두 사람은 실험체였어요.”
정인이 소리쳤다.
“검증되지 않은 약물들이 오늘 아침에 두 사람한테 투약됐어요.”
“까다롭게 됐군.”
항이 말했다.
히나타의 눈은 아직도 백탁에 가려져 있었다.
“괜…찮은 거야?”
지명이 작은 소리로 물었지만 준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누구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명확해진 지금, 준이 놓칠 소리는 없었다.
준은 히나타를 흥미롭다는듯 바라보았다.
항은 마지막으로 힘을 쏟아냈다.
그들의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들은 바닥을 기다가 가슴을 움켜쥐었고 가까스로 달아났다.
항은 갈등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과, 쓸데없는 인명 피해는 줄여야 한다는 생각이 서로 격렬하게 싸웠다.
서림을 만나야 했다.
그 짧은 재회로 끝낼 수는 없었다.
소명이 항을 힐끔 바라보았다.
항이 무엇 때문에 갈등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는 빠르게 앞으로 솟구쳐 나갔다.
채영의 움직임은 소명의 눈에 읽혔다.
이상한 패턴이긴 했지만 완전히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간격이 너무 길어서 알아차리기가 힘든 것일 뿐, 그 사이에는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이 있었다.
소명은 정확히 채영이 올 곳에서 기다렸고 채영은 피하지도 못하고 소명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마주 달려나갔다.
소명의 오른 손이 괴력을 발휘했다.
채영은 힘도 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잠들어있어. 사십 오분이 지나면 왜 여기에 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겠지. 너를 위해서 잘 된 일이야. 아이처럼 맑은 정신으로 일어나라고.”
소명이 말했다.
사요는 저를 위해 나섰다가 쓰러진 채영을 보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고통으로 인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사요가 날카롭게 소명을 노려보았다.
사요의 머릿속에서 내내 사요를 괴롭히던 소음이 사라진 거라고 정인이 말해주었다.
“맥브라이언이 소음을 거뒀어요. 싸우게 하려는 거예요.”
준은 성가시다는 듯이 정인을 노려보았고 아미가 곧바로 정인의 앞으로 나섰다.
준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미의 무릎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였다.
“저 여자는 알아서 처리할 수 있지?”
소명이 진한을 바라보았다.
“나는 여자는 안 때려.”
진한이 말했다.
“뭐?”
소명이 발끈해서 소릴 질렀다.
“그러게 누가 저 녀석을 맡으래?”
진한의 말에 소명은 항을 바라보았다.
“오빠.”
“미안하지만 나도야. 여자는 안 때린다.”
지강은을 바라보았지만 지강은은 시선을 마주쳐 주지도 않았다.
“여자로 보인단 말이지!”
소명은 이를 갈았다.
사요도 마찬가지의 약점을 보였다.
사요의 움직임은 짐승 같았다.
투약했다는 약물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사나운 유인원의 유전자와 관련이 돼 있을 거라고 소명은 생각했다.
“온다.”
지강은이 말했다.
그 말에 소명이 곁눈질을 했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잘 하는 짓이다. 개새끼. 너 지금 저 여자한테 핸디캡 주려고 한 거야?”
소명이 잇사이로 말을 내뱉었다.
“설마요.”
지강은은 그렇게 말하면서 방향을 틀었다.
크레이그가 한 무리의 실험체들을 이끌고 기세 좋게 걸어오고 있었다.
소명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되어서야 좀비라는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 뚜껑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얼굴이 정확히 반만 존재하는 사람들.
그 윗부분이 어디로 날아가 버린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실험실에 그런 것들을 폐기하는 곳이 딸려 있는 건지.
소명의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이 순간만큼은 소명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강은이 저벅 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크레이그와 좀비들을 향해 다가가려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쓰러져있는 채영에게 다가갔다.
그러면서 사요에게 말했다.
“히나타. 내 말을 전해줄 수 있어요?”
히나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이 남자의 살가죽을 벗길 거라고 말해줘요. 이 남자가 의지하는 기억의 처음. 존재가 시작하게 되는 부분을 말살시킬 거라고요. 그러면 이 남자는 45분이 지난 후에 정신을 차리고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죠. 존재하면서 그 영혼은 미궁에 빠지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기를 원하면 계속 싸우라고 해요. 아니면, 그깟 자신의 고통 따위가 무서워서 꼭 싸워야 하겠으면 덤비라고 해요. 여자라고 봐주지 않는 무자비한 남자랑 상대해야 할 거라는 것도 알려주고요.”
히나타는 그가 하는 말을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전해주었다.
사요의 얼굴에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지강은은 긴 시간을 사요에게 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손에서 칼이, 핑, 소리를 내면서 튕겨져 나왔다.
어디에서 뽑아든 거였는지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빠른 동작이었다.
소명이 진한을 바라보았다.
지강은이 어딘가 달라진 것 같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느끼고 있었다.
그가 사용하는 어휘, 억양까지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저렇게 굴곡없는 억양이라니.
듣는 사람마저 지쳐버리게 만드는 억양이었다.
항이 소명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정인이 격한 신음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무도 정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모두의 머릿속에 단 한 가지의 생각이 관통했다.
‘리벳이다. 지강은이 아니야.’
지강은은 만족스런 포획물을 발견한 것처럼 쓰러져있는 채영을 향해 다가갔다.
그 순간 사요가 소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요의 움직임을 아주 가까이에서 본 진한과 소명만이 그것이 자살행위라는 것을 이해했다.
사요는 그저 달려들었을 뿐 어떤 공격 의지도 갖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처리해 달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소명이 공중으로 뛰어 오르며 사요의 얼굴을 가격했고 사요는 쓰러졌다.
“지강은. 멈춰!”
소명은 소리를 지르면서 그대로 준을 향해 달려갔다.
진한과 항도 준을 향해 뛰어갔고 지강은도 뒤늦게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면서 준이 도망쳤다.
“젠장!”
준이 그들의 숨소리 하나까지 읽으면서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지강은!”
진한이 그를 불렀다.
“누굴 맡고 싶어? 좀비들이야? 아니면 준 맥브라이언?”
지강은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좀비들 아니겠습니까? 여리여리한 저런 남자한테 뜯어낼 건 겨우 팔다리 몇 개뿐이잖아요.”
진한은 지강은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차를 향해 뛰어갔다.
어느새 히나타도 같이 달리고 있었다.
소명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고 항이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뛰면서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