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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선과 항이 희영을 환상에서 불러내려고 애를 써도 희영은 쉽게 빠져나오지를 못했다.
“이제는 희영이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어.”
항이 기선을 보며 말했다.
그에게는 기시감이 들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패배감. 무기력감.
눈 앞에서 고통당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게 되는 사람의 심경이 어떤 건지 그는 너무나 잘 알았다.
“안 되겠어. 길가에 세워봐.”
항이 말하자 기선이 차를 깊 옆으로 댔다.
차가 멈추자마자 희영은 위험천만하게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더니 희한하게도 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물 속에서 물을 한참이나 먹고 나온 사람 같았다.
입에서는 검은 해초까지 토해져 나왔다.
토해져 나온 물이 족히 5리터는 되는 것 같았다.
희영의 눈이 퀭해졌다.
그들의 옆으로 차들이 지나가면서 차 안에 있던 일행들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괜찮은 거냐고 물었다.
“금방 따라갈 테니까 먼저 가.”
항이 그들을 보냈다.
“희영씨. 힘들겠지만 참아. 참아야 돼. 저 사람들한테는 우리가 필요해. 알았지?”
항의 말에 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채 펴지지 않는 무릎을 바로 세우다가 한 번 더 허리를 숙이면서 물과 해초를 토해냈다.
“이겨내.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그래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
희영은 결심이 선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선은 희영의 손을 잡아주는 것 말고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선우 형은 부드럽게 핸들을 왼쪽으로 감았다.
랜드로버가 도로 위를 조용하게 미끄러져갔다.
시설이 위치한 곳이 약간 높은 언덕이라 성처럼 우뚝 선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진입로와 내부 정문에서 두 번의 검문을 거쳐야 했다.
선우 형은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차창을 내린 채 고개를 밖으로 뺐다.
하지만 너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통과가 되었다.
“뭐지?”
진입로에서도, 정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선우 형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연우는, 형의 능력이 그 사이에 아주 막강해진 모양이에요, 라고 말을 했지만 그 말이 딱히 믿기지는 않았다.
오늘따라 방문객이 더 많은 것 같다는 아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부터는 다른 생각하지 말고 각자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자고.”
소명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제는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럴 참이었다.
아미가 알려준 대로 선우 형은 제단쪽으로 향했다.
제단이 있는 건물은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1층은 전체가 유리벽으로 되어 있었고 발코니에 놓인 의자에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선우 형과 연우와 시영은 동양인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까해서 신경을 썼지만 동양인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곧 항을 태운 차도 도착했다.
희영의 모습은 한 눈에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지만 희영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로 어떻게든 버티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기선은 희영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히나타와 지명도 내렸다.
정인도 함께였다.
“우리가 빨리 끝내야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가 있어.”
그 말에 모두는 한꺼번에 재빠르게 움직였다.
발코니에 앉아 있던 사람들 중 몇 명이 다가왔다.
“안에 들어갈 겁니다.”
아미가 말을 하자 선우 형이 웃으면서 자신들의 의지가 그렇다고 다시 말해주었다.
경계는 곧 무너졌다.
소명이 탄 차가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문이 열리고 소명이 선우 형에게 손을 까딱거렸다.
“넌 이제 여기에 타.”
선우 형은 그렇게 소명과 합류를 했다.
“너희들한테는 시영 변호사가 있으니까 이제부터는 알아서들 해 봐.”
그리고는 알았다는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
선우 형까지 사라져버리자 한층 더 긴장이 되기는 했지만 아미가 이끄는 대로 그럭저럭 더듬지 않고 찾아갈 수는 있었다.
“오늘은 위층을 폐쇄합니다. 호수에서 성대한 세례식이 있어요. 모두들 그곳으로 안내해 드리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안내를 맡은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하지만 시영은 웃음을 가볍게 지으면서 그의 실수를 깨우쳐 주었다.
“저희들은 저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저희를 안내하시느라고 애 쓰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은 방문객이 유난히 많은 것 같더군요. 다른 사람들이 밖에서 길을 찾지 못해서 우물쭈물하는 걸 봤어요. 저희는 호수를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저희는 놔두시고 그쪽으로 먼저 가 보시죠. 오늘 성녀의 그림을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근방을 둘러보는 건 괜찮잖아요. 그렇죠?”
“네. 아, 네……. 물론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대한 세례식이라고 하면 그쪽도 놓치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슬슬 가 봐도 괜찮지 않을까요? 저희가 이쪽으로 올라오면서 봤지만 이쪽으로 향하는 차들은 한 대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곳의 통제와 안내를 맡은 사람들이 일손 부족으로 애를 먹고 있을 것 같아요.”
“아, 그렇군요. 저희도 슬슬 이제 그쪽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습니다.”
시영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여기가 처음도 아니에요. 몇 번 와 봤었죠. 그리고 치유를 받았었고요.”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제가 굳이 안내를 해 드리지 않아도 되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들이 자신에 찬 걸음을 옮기자 그들의 출입을 통제해야 할 사람은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도 않고 저절로 떨어져나갔다.
아무도 보이지 않게 되자 아미가 앞장을 섰다.
처음 보는 공간이기는 했지만 희영의 환시를 통해서 본 적이있었던 터라 익숙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시영이 항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도 놀라거나 이성을 잃으면 안 돼요.”
항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하면서 시영을 바라보았다.
그때 기선이 바짝 붙어 말을 이었다.
“희영이가 괴로움을 참는 것처럼 형도 참아줘야 돼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무슨 일이 있을 거라는 거지?”
“살아있을 리가 없을 거라고 형이 생각하는 사람이 살아서 형의 눈 앞에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감정에 사로잡히지 마시라고요. 일단은 안전하게 모두들 여기를 떠나는 게 중요해요.”
시영이 말했다.
항에게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아서 안타까울 뿐이었다.
항은 충분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영이나 기선을 붙들고 제대로 얘기해 보라고 윽박지를 수도 없었다.
그들은 호수에서의 세례식 때문에 훨씬 더 쉽게 진입을 할 수가 있었다.
제단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희영은 서서히 평안을 되찾았다.
“미리 축하해요, 오빠.”
희영이 슬그머니 그렇게 말을 했을 때는 항도 화를 냈다.
“나를 놀리려는 것처럼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자꾸 찔끔찔끔 흘리는 그런 거, 이제 안 봐줄 테니까 그만해!!”
하지만 그는 오래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그는 왠지 모르게 거대한 눈물이 자신의 안에서 솟구쳐 오르려 하는 느낌을 받았다.
도무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히나타가 항의 등에 손을 얹었다.
“히나타.”
그는 히나타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떤 말도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말하려고 애쓸 필요 없어요. 곧 문이 열리고 해결이 될 거예요.”
히나타마저 자애롭게 웃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거부 없이 문이 열렸다.
침대에는 그녀가 앉아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쳐 놓고.
이제 일어서서 그들과 함께 나가기만 하면 될, 그런 모습으로 서림이.
앉아 있었다.
항은 황망한 표정으로 서림을 바라보았다.
잃었던 아내를 보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어쩌다보니 서림과 눈이 마주친 것 뿐이었다.
그가 서림을 인식하는데는 시간이 걸렸다.
삼 초나 사 초쯤.
“어허어어어으으!!” 그는 괴물 같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대로 무릎이 꺾여서 바닥에 쓰러졌다.
그 순간 그가 느낀 감정은 기쁨이나 감격보다는 두려움이었다.
이렇게 다시 보여 주었다가 뺏어갈 거라고 생각했고, 그랬다가는 자신이 절대로 견디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밀려 들었다.
그는 눈 앞의 서림을 실체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서림은 사랑이 넘치는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 순간을 얼마나 기다리고 염원해 왔을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서림은 일어서서 다가왔다.
그리고 바닥에 무릎꿇은 항에게 다가와 그의 두 손을 붙잡았다.
항은 오열을 했다.
하지만 주위에서 그를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서둘러야 돼요. 우리도 힘을 보태줘야 돼요.”
그 말에 항은 곧 일어섰다.
그는 서림의 어깨를 감싸고 서림의 정수리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그러면서도 걸음을 부지런히 옮겼다.
“세상에. 세상에. 이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서림아, 세상에. 여보!!”
그는 눈물이 맺혀서 부옇게 뜨는 시계 때문에 연신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서림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연우가 서림이를 데리고 가 줘. 서림이를 안전한 곳에 데려가 줘. 부탁해도 되겠지?”
항이 연우에게 말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이 작은 것이라고 기가 죽는 표정은 아니었다.
서림은 자기도 함께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항은 단호하게 고게를 저었다.
“다시 당신을 잃을 수는 없어. 다시는. 안 돼.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야 될 거야. 그러니까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지 그거나 잘 생각하고 있으라고.”
항은 서림을 잠시도 품에서 놓지를 못했다.
이윽고 서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갈게요.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다시 만난 순간이 이걸로 끝나버리게 해서는 안 돼요. 무사하게 돌아올 거죠?”
서림은 항에게 매달린 채 항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항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림을 품에서 떼 놓는 것이 자신의 살덩이를 떼 놓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연우가 서림에게 다가갔고 서림은 곧 연우의 뒤를 따랐다.
자기가 먼저 빨리 사라져 줘야 이 사람들이 남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연우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뒤에서 바라보면서 항은 심장의 요동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서림은 고개를 내밀어 주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손을 흔들어 주지도 않았다.
자신의 그런 행동이 항의 가슴을 마구 흔들어 놓을 거라는 것을 서림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강은이 먼저 소리를 질렀다.
“시작하려는가 봐요.”
희영을 통해서 호수에서의 세례식이라는 것이 뭔지 내용을 대충 들은 그들은 보트에 사람들이 하나씩 오르는 것을 보고 경악을 했다.
그들의 표정은, 앞으로 그들에게 닥칠 재난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것 같았다.
그들의 가까이에 준 맥브라이언이 서 있었다.
사람들은 맥브라이언이 머리에 손을 얹고 뭐라고 말을 건네면 말할 수 없이 경건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다가 맥브라이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보트에 올라탔다.
여남은 명 정도나 탈 수 있는 작은 크기의 보트였지만 그것이 호수의 중간으로 이동하는 순간 어떤 참극이 벌어질 거라는 것은 너무나 확실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