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자들-90화 (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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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나와. 희영아. 그래야 돼. 네가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어.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눈 감아야 할 일도 있는 거야.”

항의 목소리가 희영을 건져냈다.

그때 항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희영은 감당할 수 없는 절망에 질식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깊은 패배감이 그들을 짓눌렀다.

하지만 그들이 하려는 일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

기선은 그 사실 하나만을 붙잡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뒤에는 연우와 시영이 선우 형과 함께 타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맨 앞으로 나가야 돼.”

선우 형이 말하자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단의 시설 내부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역할이 막중했다.

시영은 다른 차들을 추월하기 전에 창문을 내리고 뒤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히나타와 정인이 손을 흔들었다.

건투를 빈다고 말하려는 것 같았다.

시영도 마찬가지의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서로의 마음이 조용히 전해졌다.

크레이그는 갑작스런 명령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들을 모으라니.

대규모의 세례식을 거행할 거라니.

“준.”

그는 질문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어서 그의 이름을 불러 놓고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세상은 고통 뿐이야, 크레이그. 정신력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특히 더 그렇지. 그런 사람들에게 긴 생애는 형벌일 뿐이야. 너도 알고 있잖아. 크레이그. 안 그래?”

“…….”

크레이그는 아직 죽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그 말에 대답해 주지 못했다.

크레이그는 자신이 가진 권력을 사랑했다.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가 좋았다.

준의 측근에 있으면서 심지어 던칸 상원의원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는 자신의 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슬슬 삶에 재미를 붙여가고 있는데 이 무슨 섭섭한 말이라는 건지.

“지부장들에게 먼저 연락을 해.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부터 해서 슬슬 모여들겠지. 호수의 물이 넘쳐날지도 몰라.”

“준!!”

크레이그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준이 웃었다.

크레이그는 교리에 관한한 아무 것도 믿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준이 모를 리는 없었다.

“그래. 친애하는 크레이그. 너는 ‘붉은 번개의 틈’이 가르치는 모든 교리를 믿고 있지. 하지만 너는 내 곁에서 해야 할 일이 아직 너무 많아서 내가 너를 먼저 보내줄 수가 없어. 미리 사과하도록 하지.”

크레이그는 속이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얼마나 안도를 했는지 몸에서 가스가 나올 뻔 했다.

“보트에 사람을 열 명씩 태워. 그리고 호수의 중앙으로 보트를 저어가게 하고 거기에서 한 사람씩 뛰어내리게 하는 거야.”

“그러려고 할까요?”

“그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니까.”

크레이그는 불신이 가득한 눈빛을 했다.

“믿음이 약하고 두려움에 정복될만한 사람들에게는 약을 쓰는 게 친절이 될 수도 있겠지.”

“아, 그게 좋겠군요. 실험실에 다녀올게요.”

“그럴 필요 없어. 그들에게도 할 일을 줘야지. 크레이그. 혼자 모든 걸 다 하려고 하다가 죽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연구원들에게 보트를 젓도록 맡기실 건가요?”

“놀면 뭐 하겠어?”

“아, 그렇군요.”

크레이그는 슬슬 대참사의 윤곽이 잡혀가자 오히려 안도를 했다.

저는 그 현장에서 한 발 빼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은 준에게 쓸모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요.”

“쉽지는 않을 거야. 깊은 호수는 아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위험하지. 호수 밑바닥의 해초에 얽히기라도 하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아.”

“그렇군요.”

준은 가늠하는 눈으로 크레이그를 바라보았다.

크레이그의 지적인 수준을 감안하여 판단했을 때 크레이그가 자신을 배신할 가능성은 적었다.

칸트처럼 스스로 생각한답시고 준의 심장에 고통을 안겨주는 짓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이 크레이그가 아니라 칸트이기를 준은 너무나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크레이그.”

준이 그를 불렀다.

크레이그는 충성스런 개와 같은 시선으로 곧바로 준을 바라보았다.

말만 하라는 듯이.

준의 명령이 내려지기만 하면 그는 무슨 짓이라도 할 사람이었다.

사요나 채영과는 확실히 다르다.

생각이 이제는 두 사람에게 미쳤다.

그러자 또 아래에 가라앉혀 두었던 분노가 솟구쳤다.

우선은 복잡한 일들이 산적해 있으니 놔두지만 곧 가치의 우선순위를 제대로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은 갑자기 이상하게 마음이 동해서 서림의 방을 찾아갈 생각을 했다.

순례객들이 모여들기 전이었다.

오늘은 순례객들의 발길을 금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순례객들도 종국에는 신도가 될 것이고 신도가 되어서 궁극적으로 추구할 것은 구원이니, 그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시간을 허비할 것 없이 곧바로 수장을 시켜주겠다는데.

준은 제단의 주변에 서서 순례객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오늘은 서림을 쉬게 할 거라고 말했다.

“준, 멀리에서부터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실망할 텐데요.”

누군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그러자 준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신 호수로 안내를 해. 호수에서 세례식이 거행될 거라고 설명해주고.”

“아, 오늘 세례식이 있는 건가요?”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쏟아졌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거기에서 보자고. 사람들을 안내해야 할 테니 몇 사람만 남아 있도록 하고.”

들뜬 기운이 전해졌다.

그들은 믿음이 약해지기 전에 세례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는 듯했다.

서림의 방으로 올라갔을 때 서림은 침대에 움직임도 없이 누워 있었다.

준은 방안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액자에 걸려있던 그림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림은, 모두 어디로 간 거지?”

준이 물었다.

서림이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믿은 준은 서림을 깨워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깨워놓고 묻는다고 해도 서림이 대답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준은 방을 돌아다니면서 서림이 그림을 어디에 두었는지 찾았다.

그리고 책상 서랍에서 돌돌 말아져 리본으로 묶여진 그림들을 발견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갑자기 이런 짓을 한 건지.

“서림. 당신 그림을 보는 게 괴로웠던 건가? 보지 못하는 바깥 세계를 그리는 게 고통스러웠어?”

준은 물었다.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서림이 끝없는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생의 연장을 포기하기로 결정을 한다면 자살을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나 모레쯤, 같이 소풍이라도 갈까요?”

준은 서림의 마음을 달래주고 싶었다.

모든 상황이 침몰해가는 가운데 서림까지 사라진다면 그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준은 서랍 속의 그림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우선은 세례건을 마친 후에, 그리고 월스트리트를 조금 달래놓은 후에 서림에게 집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아직도 자기가 상황을 얼마든지 뒤집고 바로잡아 놓을 수 있을 거라고 미련을 가졌다.

준이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호수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멀리에서 준을 본 사람들은 감격을 했고 여자들 몇 명이 그 자리에서 실신하기도 했다.

신을 알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준은 그런 반응을 보고서야 자기가 붉은 번개의 틈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서림에게 무시만 당하다보니 자존감이 형편없이 무너져 있었다.

어느새 크레이그가 다가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자리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는 자기가 그 대단한 준의 심복이라는 사실을 마음껏 자랑하고 싶은 듯했다.

“멋지지 않은가?”

준이 말했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세례를 받으러 가는 신도들의 행렬요?”

“아니, 저 저택 말이야. 저 건물. 호수에 비친. 떠오르는 태양의 주홍빛에 섞여 들어가는 저택. 불타는 것 같잖아. 얼마나 반어적이냔 말이지. 호수에 비친, 불타는 건물. 오늘 벌어질 일들과 너무나 잘 어울리지 않아?”

“…….”

“게다가 바람이 호수 표면을 건들면 저 건물의 그림자는 위태하게 흔들리고.”

칸트라면 웃어주었을 텐데.

크레이그는 영 이해하지를 못하는 것 같아 준은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자, 시작해 보자.”

**

히나타는 꽃을 파는 가게에 시선을 주었다.

국화가 소담하게 담겨있는 커다란 통을 보더니 히나타가 혼자서 웃음을 지었다.

“왜?”

지명이 히나타를 바라보며 물었다.

“예감이 좋네요. 국화를 봤잖아요.”

“국화를 보면 좋은 일이 일어나?”

지명이 웃었다.

“요키고토기쿠.’좋은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도끼, 거문고, 국화를 그려 넣으면 좋은 소식을 듣는다고 해서 기모노에도 그런 것들을 자주 그려넣곤 하거든요. 그게 각각 요키, 고토, 기쿠에요. 기쿠를 봤잖아요.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다행이다. 우리가 헤어질 일도 없을 거고. 그렇지?”

지명이 말했다.

히나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명의 손을 잡았다.

드디어 그들의 눈 앞에 거대한 건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붉은 번개의 틈이 숨죽여 웅크리고 있는, 교단의 시설이었다.

“무슨 차들이 저렇게 많아?”

소명이 말했다.

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희영이었는데 물어봐도 대답을 할 수 없는 진한에게 물었다.

진한은 불퉁한 표정으로 ‘내가 어떻게 알아?’ 라고 하고 열심히 밖을 내다보았다.

희영의 눈에는 곧 일어날 일들이 생생하게 보였다.

보트에 탄 사람들 중 몇은 스스로 뛰어내렸고 몇 명은 떠밀렸다.

스스로 뛰어내린 사람들도, 일단 물 속으로 잠긴 후에는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보트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그들을 건져주기는커녕 노로 그들의 머리를 밀어 넣었다.

끝까지 떠오르던 사람들도 마침내는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빗방울까지 후두두둑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빗방울이 굵어졌다.

절망스럽고 참혹한 비명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날씨마저도 그들의 편이 되어주지 못했다.

겨우 물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고개를 쳐들어도 거세게 쏟아지는 빗방울 때문에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빗방울은 호수의 표면을 두드리면서 파문을 일으켰다.

바람은 점점 거세게 불었다.

검은 구름마저 음산하게 몰려들었다.

지나가지도 않고 호수 위에서 멈추어 버린 것 같았다.

찬란하게 떠오르던 태양은 간 곳이 없었다.

낮게 드리워진 구름 아래에서 사람들이 엉켜들어갔다.

나중에는 눈을 뜨고 앞을 보는 것이 힘들 정도로 비가 거세게 쏟아졌다.

사람들은 고개를 쳐들지도 못했고 좁은 보트 안에서 달아날 곳을 찾지 못한 채 버둥거렸다.

노에 밀려 물 속으로 떨어지면서 그들이 본 것은 검은 해초였다.

끔찍하게도, 죽은지 몇 분밖에 되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까지도 보였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산 자의 무리에 속하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순식간에 그들은 경계를 넘었다.

희영은 눈 앞에 보이는 환영을 보면서 숨을 쉬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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