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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은 자기가 알아낸 사실을 들려주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 여자는…….”
정인은 사요에 대해서 알아낸 것들을 조용히 설명했다.
지하철 사고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히나타가 그 사건을 기억해냈다.
“범인은 끝까지 잡히지 않았는데 그래서 그랬던 거군요. 준 맥브라이언이 숨긴 거예요.”
히나타가 말했다.
“그런 것 같아요.”
“두 사람은, 날개가 완전히 구겨지다가 찢어져버린 나비 같아요. 두 사람,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
정인이 완곡하게 표현을 했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두가 알아들었다.
“이 남자는?”
진한이 크레이그를 가리켰다.
“이 남자요? 이 남자는 이름을 따로 부를 필요도 없어요. 쓰레기에요. 사람이 아니에요.”
“잘 됐네. 그럼 내가 저 자를 맡을게, 소명아.”
진한이 말했다.
소명이 머리를 헝클었다.
“괜히 물어봤잖아. 이런 걸 알고서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선악의 경계, 시비의 경계는 그처럼 불분명하고 모호했다.
장항은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도무지 잠이 오지를 않았다.
복도를 서성거리다가 선우 형과 연우와 마주쳐서 뻘쭘하게 웃고 방으로 돌아온 게 몇 분 전이었는데 다시 나가기도 무엇해서 그냥 침대에서 이리 저리 뒹굴기만 했다.
오늘따라 서림이 그렇게나 자주 떠올랐다.
기억의 바닥으로 밀어넣어둔 덕에 서림으로 인한 고통이 그를 흔들어대지 못했었는데 오늘은 자꾸만 서림에 대한 기억이 솟구쳤다.
그러면서도 항이 이상하게 느낀 것은, 서림을 추억하는 것이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서림이 죽었을 때 그는 서림의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다.
도무지 남겨두고 볼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그러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찬히 시간을 두고 서림을 추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그는 지갑을 열고 아들의 사진을 들여보았다.
그러면서 듣지 못할 아내에게 말을 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당신이 보고 싶은 거지? 이 녀석 얼굴에 당신이 있어. 알아? 자라면서 더 그래. 당신이 웃는 웃음을 이 녀석이 웃는 걸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해. 그래도, 당신이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채 이 세상을 떠난 건 아니니까 괜찮은 거지?”
귀를 기울이면 서림의 웃음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결국 그는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울었을까.
어쨌거나 한참을 운 덕분에 지쳤고 그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 덮으면서 눈을 감았다.
그가 걷어차 낸 이불을 덮어주고 토닥거려주던 아내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울컥해지려 했다.
항은 만남의 순간이 코 앞으로 다가온 것을 알 방법이 없었다.
준은 벽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큰 비가 쏟아졌다.
그것은 준에게 닥친 상황과도 비슷했다.
하지만 애써 준은, 자신이 여전히 상황을 장악할 수 있다고 믿으려고 했다.
아래에서 타고 있던 나무 토막 하나가 무너져 내리며 주저앉았고 그 위에 있던 것들이 연쇄적으로 가라앉았다.
별 것 아닌 것들이 왜 전부 암울한 미래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는지 현관쪽 바깥 문이 거센 바람에 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준은 귀찮아하면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유령을 본 듯 그 자리에 멈춰섰다.
갑자기 칸트가 떠오르는 건 또 뭐람.
칸트가 처음 그에게 순결을 내던지기 위해 그를 찾아왔을 때도 날씨가 이따위였다.
바람은 거세게 불어왔고 갑자기 추워져서 준은 벽난로에 장작을 집어넣었다.
칸트는 비에 젖어서 생쥐꼴을 하고 문 밖에서 떨고 있었다.
문 손잡이에 손만 갖다대고서, 차마 열지는 못한 채로 그곳에서 얼마나 서 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대단한 청각을 가졌으면서도 빗소리에 휩쓸려 칸트의 소리를 구분해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문단속이나 한 번 다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갔을 때 그곳에 서 있는 칸트를 발견했다.
왜 여기에 있는 거냐고, 왜 들어오지 않았냐고 말할 틈도 없었다.
칸트가 얼어붙은 것 이상으로 그도 얼어붙어 버렸다.
두 사람은 서로 말없이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칸트의 몸에서 하얀 열기가 피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감기 걸리겠어.”
이윽고 준이 말했다.
흠뻑 젖은 칸트의 옷 위에 제 셔츠를 벗어서 덮어주었다.
칸트는 준의 벗은 몸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옮겼었다.
‘칸트……!’
준은, 듣지 못할 이의 이름을 불렀다.
“칸트.”
그가 소리를 내서 그 이름을 좀 더 정확하게 불렀다.
망령이라도 돌아와 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림도 사요도.
칸트의 자리를 채워주지는 못했다.
서림은 사그라지지 않는 증오로만 그를 대했고 사요는 그를 두려워했다.
칸트가 가졌던 욕망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찾기가 어려웠다.
붉은 번개의 틈에 속한 신자들 중 누구라도 데려다가 잠자리를 같이할 수는 있겠지만 칸트처럼 그를 열렬히 욕망하는 사람을 찾을 수는 없었다.
두려움이나 거리낌이라고는 전혀 없이 그를 사랑하던 칸트가 그날따라 계속해서 떠올랐다.
문을 닫으러 갔다가 준은 정원으로 나 있는 계단을 내려가 테라스를 바라보았다.
혹시 칸트가 그곳에 있지는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두려웠다.
준은 내친 김에 걸었다.
사요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채영에게 안겨있는 사요의 모습을 보았다.
준은 자기 속에서 솟아오르는 감정의 실체를 바로보지 못했다.
질투인 것인가.
아니면 그저 분노인가.
채영의 하얀 나신이 움직일 때마다 사요가 채영의 머리와 목을 끌어 안으며 어깨와 등을 쓰다듬었다.
간헐적으로 사요의 다리가 채영의 엉덩이를 휘감았다.
준은 분한 마음을 느꼈다.
사요가 채영의 존재를 기뻐한다는 것이 싫었다.
준은 냉정하게 돌아서서 걸었다.
그의 뒤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요의 모습이 보였다.
채영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사요의 고통을 달래주기 위해서 허둥댔다.
방안에는 채영의 노랫소리가 퍼졌다.
사요는 연인의 품 안에서 어떻게든 고통을 감추어 보려고 애썼고 채영을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제발, 이겨내, 라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그는 사요가 평화로운 울림에 집중하고서 고통을 잊을 수 있도록 노래를 하고 또 했다.
준은 곧장 크레이그를 찾았다.
“숙소를 옮겨야겠어.”
크레이그는 잠에서 깨어났지만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말씀입니까?”
“호수 뒤쪽.”
“거기는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두 시간 후에 그리로 옮길 테니까 준비해 두라고 해.”
“……. 예.”
크레이그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준은 자신의 불운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변함없는 궤도를 돌고 있다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의 평온이 깨졌다면 그들도 그렇게 되어야 마땅했다.
감히 잠을 자고 하루를 마감하고 오늘도 평화로웠다고 안심하다니.
준은 제 처소로 돌아가자마자 손에 잡히는대로 벽에 던지고 내동댕이를 쳤다.
깨지고 박살내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지옥에 빠지는 사람이 한꺼번에 수만명이 된다면 그 중에 제일 위로 올라가면 되는 거잖아? 그럼 가장 뜨거운 불구덩이는 피하게 되겠지.”
준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늦은 밤중에 동원된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호수 뒤쪽의 저택에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두 시간 후에는 온기가 감돌게 되리라.
준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호수에는 노를 젓는 보트들과 모터보트가 있었다.
“충분히 넓어.”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크레이그를 시켜서 신도들을 성소에 모이게 하고 모여드는 대로 그들을 호수에 끌고 가 매장하는 것을 상상했다.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고 그들에게 명령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준은 이미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면서 보트에 오르라고 말을 하기만 하면 그들은 저항하지 못할 거라고 준은 생각했다.
신의 손길을 받고 구원의 행렬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한 무리들이 스스로 보트를 타고 호수의 중앙으로 가서 물 속으로 뛰어내리면 보트를 저어올 한 사람만 남아있다가 다시 보트를 몰고 돌아온다.
수위가 오를 수도 있다.
이천 명은 족히 묻히게 될 테니.
그 광경을 호수 뒤쪽의 저택에서 바라보면서 준은 자신의 마지막을 결정할 생각이었다.
어쩌면 서림과 둘이서만 다른 삶을 찾아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귀찮은 일들을 맡기려면 크레이그를 데려가야 할지도 모른다.
생각이 큰 진전을 이루자 준의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모든 준비가 마쳐졌다고 크레이그가 다가와 말했을 때 준은 보트를 깨끗이 치워두라고 명령을 내렸다.
크레이그는 피곤에 지친 표정이기는 했지만 곧바로 사라졌다.
일무리의 사람들이 호수쪽으로 옮겨가는 것이 보였다.
아침이 되면 모든 준비가 완전히 마무리 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준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희영은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준의 모습을 환시로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준의 처소가 갑자기 변경된 것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다행히 아미가 호수 뒤쪽의 저택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뭘 꾸미려는 거지?”
히나타의 지명이 아미에게 물었다.
“저 호수에 수 십 명의 사람들을 빠뜨려 죽인 일이 있었어요.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면 엄연히 죽인 거지만 그들은 영생으로 인도했다고 말했죠. 하늘에 생긴 틈으로 구원을 받는 것 말고도 신의 축복을 직접적으로 받은 사람들은 물의 틈으로 들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게 붉은 번개의 틈에서 가르치는 교리에요. 준 맥브라이언의 축복을 받고 호수에 들어가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그들은 믿는 거죠.”
아미가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맥브라이언이 얻는 게 뭔데?”
“숙청이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보이라고 강요하는 거예요. 영생을 얻을 기회를 거절한다는 건 교리를 믿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붉은 번개의 틈을 떠나고 싶지 않다면 그 명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아미의 말에 누구 할 것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계획에는 차질이 생길까?”
소명이 물었다.
아미는 간단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우려 되는 점에 대해서 말했다.
“일단 이곳이 제단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 완전히 팀을 나눠서 움직여야 될 거예요.”
“팀을 나눠서?”
기선이 되물었다.
팀을 나눈다는 건 그들이 가진 능력을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는 뜻이었다.
“미친 새끼가 왜 오밤중에 이사를 하고 지랄이야, 썅.”
진한이 말했다.
모두다 그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간결하게 표현할 능력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나랑 진한, 강은이가 준 맥브라이언을 맡자.”
“히나타는?”
진한이 말했다.
“서림 언니를 구출하는 사람들 쪽에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