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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브라이언이 물었다.
“한국의 선 말입니다. 그가 죽었어요.”
“그래? 그 일은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줄곧 준비해 오고 있다가 지금이야말로 적기라고 판단하고 실행에 옮긴 것 같습니다.”
“잘 했군. 그런데 지금이 적기라는 건 무슨 말이지?”
준이 물었다.
“그의 주변에 늘 어슬렁거리던 인간들이 보이지 않는데요. 갑자기 떼로 모여서 어딘가로 떠나 버린 것 같다고 하더군요.”
크레이그의 말에 준은 눈을 찌푸렸다.
칸트와 던칸의 일에 신경을 쓰느라 기선과 지명 일행에게 집중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며칠 정도는 더 이런 상태가 지속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모든 에너지를 월스트리트의 동향 살피기에 집중해야 했다.
자세히 말하자면 월스트리트를 찢고 파괴하고 강간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준이 진정으로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일이었다.
준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서림의 방으로 향했다.
그가 서림에게로 가는 도중에 네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서림은 준에게 등을 보인 채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서림이 들고 있는 붓은 거칠게 움직였다.
준은 서림이 그려놓은 꽃들이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것 같다고 느꼈다.
팡팡팡, 터져 피어난 꽃들이 꼭 그를 쏘는 것 같았다.
강렬한 환호성.
꽃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해방을 향한 격렬한 간구 같기도 했다.
“좋은데요?”
준이 말했다.
자기가 왔음을 알리려는 의미였지만 서림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런 대우를 받는 거야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니까.
준은 작업을 하는 서림의 뒤에 앉아서 자기가 준비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떠들어댔다.
“드디어 던칸의 시신이 발견되기만 한다면 한 순간에 대단한 추진력을 얻게 될 거예요. 그때는 완전히 판이 뒤집어지겠죠. 지금도 힘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이건 그저 장난 수준에 불과해요. 던칸의 시신. 언제까지나 그걸 숨길 수는 없겠죠. 던칸의 지지자들은 충분히 그 시신을 붙들고 애무를 해 왔을 거예요. 하지만 던칸이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 말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결국에는 그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겠죠.”
준은 지치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그때가 되면요, 서림.”
준이 말했다.
“동유럽에 진출해서 성전을 지을까 생각중이에요. 나는 그쪽을 동경했거든요. 그 완고한 사람들에게 나를 신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서림. 나는 당신이 나를 도와줄 거라고 믿고 있어요. 훨씬 좋은 방을 만들어 줄게요. 사람들이 성녀를 만나기 위해서, 살아있는 성녀를 만나기 위해서 긴 행렬을 만들 거예요. 서림도 그 일을 즐기게 될 거예요. 실제로 서림은 사람들을 낫게 하잖아요. 당신도 보람을 느끼잖아요. 그렇죠? 나는 알아요.”
서림은 그가 만들어내는 소음으로 고통당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의도로 지껄여대든 서림은 그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이제는 누구도 서림의 절대적인 평온을 흔들어댈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준은, 그 꽃들이 불길해 보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드디어 그가 일어섰다.
“우선은 하던 일을 좀 더 마무리하고 다시 올게요. 우리 같이 저녁이나 함께 해요. 먹을 걸 가지고 올라올게요.”
배 고프지 않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렇게 말을 하면 신이 나서 어떻게든 더 먹이려고 들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준 맥브라이언은 미쳤다.
다른 평가를 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팡팡팡.
그 사이에 몇 송이의 꽃들이 다시 방아쇠를 당겼고, 준 맥브라이언은 소리없는 총격을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듯 돌아갔다.
“던칸 상원의원의 실종 소식이 공공연히 들려오고 있습니다. 던칸 의원의 대표적인 후원자로 알려져왔던 기업들의 주가가 폭락하고 있는 배경에는 그런 원인이 작용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던칸 상원의원의 측근들은 아직 사실 확인을 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뿐입니다. 폭락하는 주가에 연일 불안과 공포에 떠는 사람들이 가세를 하면서 폭락의 폭과 속도는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던칸 상원의원은 여전히 두문불출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맞을지도 자신이 없네요. 그는 나올 수 없는 처지인지도 모르거든요.”
관록있는 여성 사회자가 카메라를 보고 말했다.
“좋아. 잘했어.”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준이 혼잣말을 했다.
“얼마나 벌어들이게 될까?”
준이 곁에 있던 크레이그에게 묻자 크레이그가 답을 해 주려고 애썼지만 확실히 그것은 크레이그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니었다.
“애쓰지 말고 애기들을 데려오면 되잖아.”
그 말에 크레이그는 모욕을 받았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이 MBA출신의 잔뼈 굵은 엠디들로 구성된 팀을 데리고 왔다.
그들은 대단한 성공을 거둔 준 맥브라이언의 곁에서 이 대단한 시기를 함께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무한한 긍지를 가지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준의 곁으로 나왔다.
“우리가 만든 스프레드시트로는 계산이 다 안 될 정도에요. 하지만 2조 달러가 넘을 거라는 건 확실해요. 미쓰비시에서 빌린 대출금은 전부 갚았어요. 좋은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고 싶어하는 곳들이 줄을 섰거든요. 모건에서는 계속 러브콜을 보내고 있어요. 대출금이 더 필요하지는 않냐고 직접적으로 접촉을 해 오기도 했고요.”
“그렇겠지. 앉은 자리에서 거액의 수수료를 챙길 수 있을 테니까. 아마 사상 최고의 실적을 올릴 수 있게 될 걸? 모건은 나와의 거래 때문에 올 연말 결산때 2천 퍼센트 이상 순이익이 뛸 거야.”
“아마도 그렇게 될 겁니다.”
“어떻게 할까? 한 번 더 조여줄까?”
“그래도 숨통을 열어놓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아직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새벽에 두 사람이 자살을 했어요. 그게 기폭제가 되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슬슬 하락폭이 주춤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미 바닥을 찍었다는 생각들이 반영된 건지도 모르죠. 사실, 주목해야 할 힘이 느껴지기는 해요. 단순한 저항으로만은 보이지 않는, 꽤 여력을 가진 세력이 개입을 한 것 같은 느낌이 있거든요.”
“그래봤자지.”
준이 말했다.
“그래봤자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결과에 만족을 하고 손을 뗀다면 엄청난 수익을 챙길 수 있을 거예요, 준.”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그래봐야 겨우 타이기록을 세우는 정도밖에 되는 것 아닐까? 남과 기록을 공유하는 건 내 관심 밖이야. 하려거든 나는 감히 갱신하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못하게 할만한 나만의 기록을 세울 거야.”
준은 욕심을 부렸다.
그리고 그 탐욕의 결과가 어떤 사태를 불러올지 알지 못했다.
저항은 점점 단단해졌다.
준은 밀리는 기분을 받고 싶지 않아서 위에서 한 번 더 내리눌렀다.
주가가 저항하며 올라오지 못하도록 대량으로 물량을 쏟아내 버렸다.
물량 공세에 눌려 저항선이 무너지고 바닥까지 몇 초만에 추락할 거라는 것이 준의 예측이었다.
하지만 마치 바닥에 거대한 싱크홀 같은 괴물이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고 그 엄청난 물량을 소화한 괴물이 순식간에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MBA출신의 엠디 군단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준을 찾아왔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소식을 전하려고 할 때 준의 뒤쪽에 있던 대형 TV 화면에 타이라가 등장했다.
그들은 짧은 경력의 새파란 여자애가 왜 거기에 나오는지 알지 못했다.
타이라가 하는 말에는 주목할만한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여러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짜깁기했다는 인상밖에는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시선은 타이라의 목 아래에서 노출되어 보이는 탱탱한 가슴에나 쏠렸다.
그러나 잠시 후에 모두의 입에서 경악에 가까운 신음과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에피소드나 재미있는 사고처럼 보였다.
카메라가 흔들렸다.
그리고 카메라맨의 목소리가 들렸다.
“던칸 의원 아니야?”
그 말이 모든 것을 순식간에 갈라 놓았다.
카메라 앞에 서서 앵무새처럼 조잘거리던 타이라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던칸 의원요?’ 라고 물었고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과연 인파속에 던칸이 있었다.
그의 곁에는 수행원들이 있었다.
던칸은 빠져나가려다가 잘 안 됐다는 듯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의원님. 살아계셨군요!! 도대체 어디에 계셨던 거예요? 일단 이리로 오셔서 의원님을 걱정하고 촛불을 밝힌 미국의 위대한 시민들 앞에서 인사 좀 해 주세요.”
타이라가 말했다.
던칸은 못 이기겠다는 듯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앵글 속으로 들어왔다.
준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셨다.
그는 크레이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려는 것 같았다.
크레이그야말로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 되었다.
“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던칸이 살아있다는 건 그냥 변수 정도가 아니에요. 포트폴리오를 완전히 수정해야 합니다. 전권을 위임해주세요. 빠른 대책을 세우고 신속하고 대응해야 돼요.”
준은 그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 사납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준 맥브라이언이야. 안 되는 일은 되게 만들면 돼. 방방거릴 것 없어. 버텨. 버티면 되는 일이야. 우선은 요동을 치겠지. 기대를 할 거고. 하지만 기대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알면 그들은 다시 빠르게 절망할 거야. 내 말을 믿으라고. 버텨.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하지만……!”
그들의 블랙베리로 상황이 전송되어 들어왔다.
“대출금 회수 요청이 들어올 겁니다. 순식간에 그렇게 될 거예요.”
그들이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 5분여만에 몇 조 달러에 이른다고 했던 수익의 20퍼센트가 확 빠져나갔다.
아래에 있던 벽돌부터 시작해서 순식간에 빠져나가 버렸다.
그것은 분명한 위기였다.
“시끄러워. 나는 준 맥브라이언이다. 내가 준 맥브라이언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해 주지. 그리고 병아리들. 이 순간에 나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영원히 자랑할 수 있게 만들어 주겠어. 나를 회상하려는 사람들 앞에서 이 장면을 기억하면서 얘기해 주려면 지금부터 정신을 바짝차려. 아무 것도 잊지 않게 말이야.”
준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포트폴리오는 수정하지 마. 계속 가. 그대로. 겁쟁이들에게 소리를 질러주자고. 간이 오그라들 거야.”
던칸은 플루에 걸려 며칠 동안 집에서 나오지 못했다면서 엄살을 피웠다.
“의원님. 정말 의원님이 맞으신 거죠?”
타이라가 과장되게 환영을 했다.
그 장면은 수 백번이나 재전송되었다.
어느 일간지에서는 타이라의 그 말을 헤드라인으로 싣기도 했다.
새벽에 자살한 두 사람은, 조금만 버텼다면 죽지 않아도 되었을 거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준 맥브라이언은 버티기에 들어갔지만 그가 어떤 힘을 상대해야 하는 건지 전혀 알지 못했다.
타이라의 투자자들은 타들어가던 속을 진정하고 드디어 웃음을 지었다.
그들도 타이라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