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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영은 못 본 척 하려고 했지만 사요가 혼자서 견디고 걸어온 고통의 흔적은 쉽게 채영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안타깝게 생각할 것 없어. 내가 한 짓이니까.”
사요가 변명삼아 이야기했다.
“네가 왜?”
“소름끼치는 끔찍한 소리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이제는 그 소리가 안 들려?”
채영이 물었다.
다시 45분이 지나버린 건가.
사요는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잘 들어. 너는 길을 가다가 나를 만난 게 아니야. 어쩌다보니 같은 방에 있게 된 것도 아니고. 나는 너랑 섹스하고 싶은 거고 네가 나를 알아주기를 원해. 나는 사요야. 사요 유타카. 우리가 알게 된지는 오래 되지 않았지만 네가 좋아.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네 기억이 45분 후에는 사라지기 때문이야. 나는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소리에 대한 강박증이 있어. 소리가 반복되어 들려오면 나는 참지 못하고 폭력적으로 변해. 네 앞에서나 이렇게 착하고 얌전한 척 하고 있을 뿐이지 내가 직접 죽였거나 내가 일으킨 사고로 죽은 사람이 백 명이 넘어. 그 전까지는 백 명이 넘는다고 말하면 대충 거짓말은 아니게 됐는데 이제는 이 백 명이 넘는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며칠 전에 기록을 갈아치웠거든. 자. 나는 이런 사람이야. 이런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너를 원하고 있어. 나를 받아줄 거니?”
한 번에 몰아서 말을 해 버리느라 말을 마친 사요의 가슴에서는 씩씩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급하게 들썩이고 있었다.
“와우.”
채영이 말했다.
처음에는 웃으려고 시도했지만 사요와 눈이 마주친 후로는 그러지 못했다.
“이제 내가 기억하는 나에 대해서 말해야 할 차롄가?”
사요가 고개를 저었다.
“너에 대해서는 전부 알고 있어. 지하실의 시체들이 살아있을 때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채영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는 누구지?”
채영이 물었다.
“너를 지키려고 내려온 수호신. 수호신을 오래 기다리게 하면 수호신이 화를 내게 돼.”
“수호신이 자기가 지켜야 되는 인간을 유혹하기도 해?”
채영이 물었다.
“수호신들도 각자 개성이라는 게 있지 않을까?”
사요가 짓궂게 웃으며 그의 앞에서 진을 벗어버렸다.
채영은 제 팔에 생긴 흉터를 보고 준이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일단 그 질문은 뒤로 미루어야 하겠다는 것이 점점 확실해졌다.
잃어버린 시간을 더듬는 채영의 어색한 웃음이 슬퍼보였고 그것이 사요의 가슴에 사무쳤다.
하지만 이내 사요에게 집중하기 시작한 채영이 사요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가볍게 번쩍 들어올려 침대 가장자리에 앉히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사요는 그의 손길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머릿속의 고민을 제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알았고 눈 앞에 사요를 둔 채 답도 나오지 않을 문제를 푸는데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채영이 사요의 발을 들어 발가락을 머금다가 아기 발바닥처럼 가는 주름이 새겨진 발바닥을 혀로 핥아 올렸다.
생경한 느낌에 움찔한 것도 잠시였고 사요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사요는 그가 그 행위를 즐기고 있으며 그 행위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조차 연신 사요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의 지하실에서 채영에게 자비를 구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의 앞에서는 동정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잔혹한 사신처럼 굴었었다.
그런데 사요의 앞에서는 왜 이렇게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요는 채영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요는 채영의 폭력성을 잠재우는 힘을 가진 것 같았다.
하긴.
두 사람이 서로에게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사요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가 발을 쉽게 붙잡지 못하게 이리저리 물장구를 치듯이 발을 피했다.
채영은 사요의 발을 잡으려고 기를 썼고 드디어 높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그에게 낯설게 들렸다.
그런 격의 없는 웃음을 낸지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채영이 사요의 몸을 잡아채고 풍덩 물 속으로 뛰어들 듯이 그녀의 몸을 침대에 눕혔다.
순수하게 사요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는데 그의 몸은 그가 느긋하게 구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단단해진 그의 페니스가 사요를 사납게 밀어댔다.
머뭇거리는 채영의 목에 사요가 팔을 감고 가슴에 끌어 안았다.
채영은 애무를 하는데 서툴렀지만 사요는 그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달아올라 있었다.
채영은 사요를 끌어안은 채 허리를 움직여 천천히 그녀에게 들어갔다.
삽입의 순간에 사요의 목에서 고통과 기대가 뒤섞인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요가 고통스럽지 않기를 원했고 빨리 적응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할수록 삽입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채영의 얼굴이 상기되는 것을 보고 사요가 웃음을 지으면서 손을 뻗어 그의 페니스를 쥐고 그가 이르러야 할 곳으로 안내했다.
“꼴이 말이 아니게 됐는데?”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채영이 말했다.
그 후로는 한가롭게 이야기나 주고받고 있을 틈이 없었다.
사요가 하얗게 드러난 그의 엉덩이에 손톱을 박아 넣었고 채영은 사요의 안에서 빨리 몸을 풀어버리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사요의 눈이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간혹 그를 바라볼 때마다 원망의 빛이 가득했다.
그러기는 채영도 마찬가지였다.
참기 어려울 정도의 흥분상태라 어서 사정을 해 버리고 싶기도 했고 사요의 안에서 쾌락의 순간에 대한 기대감을 한없이 간직하고 싶기도 했다.
마침내 사요가 흐느꼈다.
채영은 바싹, 마르며 타 들어간 사요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는 바람에 페니스가 밀려 나온 것을, 다시 허리를 밀며 깊게 들어가자 사요의 입에서 죽음 같은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녀의 가슴에 입을 맞추고 손으로 깍지를 낀 채 그가 사요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두 사람의 비명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격해진 숨을 고르느라 가쁘게 숨을 내쉬면서도 채영은 쉽게 사요의 몸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여기저기에 아쉬움이 가득 담긴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다가 손을 더듬어 다른 콘돔을 뜯는 채영을 보고 사요가 웃음을 터뜨렸다.
“또 하려고?”
“너를 자꾸자꾸 담아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내가 널 담는 거 아니니?”
“어, 야해. 부끄럽게 그런 말을!!”
“감동할 틈이 없게 만드는 데는 도가 텄나 봐. 감동할만 하면 주먹을 부르는 말을 하고.”
뾰로퉁한 얼굴로 사요가 말했지만 채영이 입을 맞춰올 때는 열렬히 그의 목을 끌어 안았다.
채영이 사요의 손을 잡아 제 가슴에 끌어 당기며 눈을 빛냈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상관없어. 기다리다보면 언젠가 다시 네가 돌아오겠지. 너를 오래 기다려야 하는 운명이라면 그래야 하겠지. 내가 너를 기억하지 못해도 나한테 너를 소개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줘.”
“나는 웬만해선 다른 사람을 내 마음에 들이지도 않지만 한 번 마음에 들인 사람은 웬만해선 포기하지도 않아.”
사요가 말했다.
나른해졌던 채영의 몸에 다시 기대감으로 생기가 넘쳤다.
사요의 다리를 번쩍 들고 채영이 사요의 음부에 얼굴을 묻었다.
시트가 사요의 손길에 구겨졌다.
미궁에 갇힌 것 같은, 답을 알 수 없는 신비한 쾌감에 사요는 자기 손가락을 입안에 가져가 물었다.
사요의 허리가 그를 튕겨낼 듯 움직였고 교성이 채영을 흥분시켰다.
“아아흐윽!!!”
사요의 아래쪽에서 시큼한 냄새가 풍겨나면서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신기해하는 눈으로 사요의 오르가즘을 지켜보았다.
사요가 얼마나 거칠게 숨을 쉬어댔는지 가슴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채영은 사요에게 삽입도 하지 못한 채로 순식간에 사정을 해버렸다.
그가 사요에게 키스를 하면서 사요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사요의 몸을 애무해주었다.
좋았는지를 물을 필요가 없었다.
홍조 띈 사요의 얼굴과, 그의 손길 아래에서 파르르 떨리는 허벅지에 흥건하게 새어나오는 액이, 사요가 최고의 순간을 경험했음을 웅변해 주었다.
채영이 갑자기 사요에게 깊은 키스를 퍼부은 것이 서러운 눈물을 감추기 위한 거였다는 것을 사요도 모르지 않았다.
서로의 얼굴을 적시는 눈물을 남의 것으로 떠넘길 생각으로 두 사람은 탐욕스런 키스를 나누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젠장! 너 때문에 내 얼굴이 엉망이 돼 버렸잖아!”
채영이 일어나 앉으며 투덜거렸다.
사요도 한 마디를 해주려다가 입을 다물고 누운 채로 그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네가 착한 남자였다면 정말 재미없었을 것 같아.”
그 말에 채영이 피식 웃어버렸다.
“영원히 잊어버리는 일은 없다고, 그것만 약속해 줘.”
사요가 말했다.
채영은 고개를 끄덕였고 사요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졸려.”
채영이 말했다.
사요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참아봐.”
“왜?”
“일어나면 내가 누군지 기억하지 못할 거야.”
“단순히 그냥 졸리는 정도가 아니야. 내 발 밑에서 땅이 벌어진 채로 나를 끌어내리는 것 같아. 너를 기억할게.”
그는 장담했다.
그는 자기가 그 약속을 지킬 능력을 갖지 못했다는 것도 그 사이에 잊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채영을 보지 않으려고 사요는 눈을 감아 버렸다.
마침내 채영은 자신의 몸이 평온한 수면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아 버리는 것을 느꼈다.
무겁고 어둡고 차가운 잠이 시작되었다.
사요는 떨리는 맘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긴장한 탓이었는지, 채영을 지켜보던 사요도 그 옆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한참만에, 옆에서 조심스럽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채영이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채영…….”
사요가 아슬아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제가 실수를 한 것 같아요.”
채영은 사요의 나신을 이불로 덮어 가려주고 얼른 옷을 입으면서 말했다.
그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요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깨가 흐느끼며 떨려왔다.
채영은 자기가 강제로 여자를 가진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참담한 심정 조차도 사십 오분을 넘어 지속되지는 못했다.
채영은 지하실로 갈 생각이었고 여전히 지하실로 내려갈 문을 찾지 못해 난감해 했다.
주위의 물건들 중에 어느 것 하나 익숙한 것이 없었다.
그는 하염없이 의문스러워할 뿐이었다.
***
선 사장은 막 지명과 통화를 끝내고 스마트폰을 충전하려고 하다가 자기에게 아들이 둘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다른 지명이 또 전화를 걸어왔다.
선 사장은 웃음을 터뜨리며 전화를 받았다.
“웃으시는 걸 보니까 그 자식이 선수친 모양이죠?”
지명이 말했다.
선 사장은 웃음을 멈추고 싶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너희들은 결국 같은 녀석인데 서로를 싫어하는 게 너무 우스워서.”
선 사장은 그렇게 사과를 했다.
“별 일은 없으시죠?”
지명이 말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겠어. 너희들이나 조심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