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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어쩌다가 이렇게 됐어? 하얗게 쇠어 버린 거야?”
사요가 물었다.
“그걸 지금 나한테 묻고 있는 거야?”
채영이 말했다.
사요는 자기가 굉장히 멍청한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곧 반박할 말이 떠올랐다.
“언제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잖아. 그러니까 네 장기기억 속에 그 기억이 남아 있는지 나는 모르니까 물을 수도 있잖아.”
“아.”
채영은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요는 튀어오르듯 일어서서 채영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앉아 있는 채영의 머릿속을 살폈다.
“뭐해?”
채영은 고개를 들려고 했지만 사요가 꾹 누르고 놔주지 않앗다.
“가만 있어 봐.”
채영은 사요의 짧은 셔츠가 올라가면서 하얗고 단단한 배가 드러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리 뿌리 색깔을 살펴보는 중이야. 검은 머리카락이 밑에서 나오고 있는지.”
“그래서? 염색한 것 같아?”
“아닌 것 같아. 젊은데 정말 다 쇠어버린 모양이다.”
사요가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들추면서 두피를 건들기도 하자 그 감촉에 나른해져서 채영은 눈을 감았다.
그 기분 좋은 감각이 그의 아래쪽으로 전해졌다.
“수염은 어때? 수염도 하얀 게 나와?”
사요는 호기심이 왕성한 초등학생처럼 이번에는 채영의 얼굴을 타겟으로 삼았다.
사요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에 다가왔다.
사요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부드러운 손으로 여린 피부를 만지면 남자의 몸에서 불이 일어난다는 것을.
“그건 검어?”
자기는 괜찮다고 항변을 하려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채영의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났다.
“신기하다. 수염은 검게 올라온다.”
사요가 말했다.
턱과 코 밑에 난 수염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사요의 눈동자가 드디어 채영의 눈에 맞추어졌다.
“어.”
사요는 그제야 자기가 난감한 상황을 연출해 냈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머리는 염색한 게 아니라는 거.”
사요는 선언하듯 말하고 허리를 펴고 채영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채영은 사요의 손을 붙잡은 채 사요를 놔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채영이 갑자기 손을 놔 버렸다.
“왜?”
사요가 오히려 그렇게 물었다.
꼭 아쉬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기세좋게 덤벼들던 젊은 남자가 갑자기 멈춘 것이 이상하게 여겨진 모양이었다.
“기억하지도 못할 텐데 이런다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잖아.”
채영이 말했다.
“누구한테? 나? 아니면 유채영 당신?”
사요가 물었다.
“두 사람 모두.”
채영은 일어서더니 시계와 자신의 팔에 새겨진 흉터, 그리고 주머니에서 만져지는 메모지를 보았다.
“어쩌다가 이런 일의 한복판에 서 버리게 된 거지?”
채영이 말했다.
사요는, 채영이 돌아선 사이에 사십 오 분이 후딱 지나가 버리고 자기가 다시 잊힐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재빨리 일어섰다.
사요는 자기가 채영을 만난 이후로 웬만하면 계속해서 채영의 시야에 머물려고 노력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채영은 사요가 다시 소리에 집중하는 것을 보았고 이번에도 잘못 들은 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요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으으으으으윽!!”
사요는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채영의 방에서 나가려 했다.
채영은 엉겁결에 사요를 붙잡았다.
이렇게 가버리고 나면 사요와 쌓아올렸던 추억이 사라질 거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사요의 눈에 순식간에 핏발이 섰다.
“가야 돼. 내가 어떻게 변할지 몰라. 너를 죽일지도 몰라.”
사요가 말했다.
“너는 안 그럴 거야. 네가 그럴 리가 없잖아!!”
채영이 말했지만 사요는 거칠게 그의 손을 쳐냈다.
채영은 화가 나서 사요를 노려보았지만 사요가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자리에 주저앉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사요!”
사요는 다가가는 채영을 거부하지도 못했다.
“흐으으으으으!!!” 사요의 눈에서 피가 흐른다고 해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정말로 피가 흘러나왔다.
눈에서는 아니고 귀에서였다.
사요는 크게 입을 벌린 채 거친 숨을 토해냈다.
“사요!!”
채영이 사요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사요는 제가 채영을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겁을 냈다.
일은 이렇게 일어나곤 했다.
모든 사건들이.
사요를 궁지에 몬 모든 사건들이 그런 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일이 끝난 후에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변명의 여지조차 남지 않았다.
“채영. 나한테서 달아나. 나는 아마 너를 죽일 거야.”
사요가 부르짖었다.
“내가 말할게. 사요. 내가 말할게. 내가 하는 말에 집중해. 뭐가 들리든 그 소리를 듣지 말고 내가 하는 말에 집중해 봐. 그럴 수 있지? 응? 그렇게 할 수 있겠지?”
사요는 그렇게 해 보려고 애썼다.
배경에 아무 것도 없을 때는 그저 참을 수 없이 괴롭기만 했지만 채영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에는 그 소리를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는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반복되는 소리를 잠시라도 잊을 수가 있었다.
“내 손을 잡는다고 생각해. 사요. 이 어둠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네가 듣는 소리는 실체가 없는 건지도 몰라. 나한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사요. 실체 없는 소리야. 네가 그 소리를 부정할 수는 없겠어?”
채영은 간절하게 말했다.
사요야말로 그러고 싶었다.
부정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말해줘. 계속 말해줘. 네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 끔찍한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어.”
사요가 말했다.
그러면서 사요는 자기가 말을 하는 중에도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쉬이. 괜찮아. 사요. 괜찮아 질 거야. 내가 노래를 해 줄게.”
채영은 사요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슨 노래를 해야 할지 생각나는 게 없었다.
하지만 쉬지 않고 말을 하는 것 보다는 노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듣고 싶은 노래가 있어?”
“생각나는 게 없어.”
“아무 거라도. 아무 거나.”
채영은 조급했다.
“On a dark desert highway Cool wind in my hair”
채영은 호텔 캘리포니아의 가사를 떠올렸다.
사요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저를 미치게 만드는 소음을 무시하려 애썼다.
“Warm smell of colitas Rising up through the air”
어둑한 사막의 고속도로, 시원한 바람은 머리결을 스치고
따뜻한 콜리타스의 냄새가 바람 속으로 스며오는데
“Up ahead in the distance I saw a shimmering light”
저 쪽 앞에서 아른한 불빛이 보였어.
사요는 가끔 가다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제 머리를 규칙적으로 채영의 이마에 가져다 부딪쳤다.
채영은 사요의 귓가에, 사요가 놓치지 않고 그의 손을 잡고 그 어두운 혼돈 속에서 잘 빠져 나오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노래를 불러주었다.
“My head grew heavy And my sight grew dim”
내 머리는 무거워지고 눈빛은 흐려졌어..
사요가 절망적인 눈빛으로 채영을 바라보았다.
“나는 빠져나갈 수 있을까? 버틸 수 있을까?”
사요가 물었다.
채영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I had to stop for the night”
난 하룻밤을 묵어야만 했어
“There she stood in the doorway”
그녀는 문 앞에 서 있고
“I heard the mission bell”
나는 미션 벨을 들었어. ?
“And I was thinking to myself”
나는 생각했지.
“'This could be heaven or this could be hell'”
여긴 천국이거나 지옥일 거라고.
채영의 노래는 끝에 다다랐다.
“You can check out any time you like”
당신이 원할 때는 언제라도 체크아웃 할 수 있지만
“But you can never leave”
절대 떠날 수는 없어.
사요의 숨결이 잦아든 것은 채영의 노래가 마력을 발해서가 아니었다.
사요를 괴롭히고 싶어했던 준이 다시 변덕을 부려 사요에게 내린 명령을 거두어서 그렇게 된 것 뿐이었다.
그러나 사요는 감격에 젖은 표정으로 채영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네가 나를 구했어.”
사요가 말했다.
“고백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같이 일본에 가게 되면 벚꽃 축제에 같이 가자.”
사요가 채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응?”
“응, 이라니?”
사요가 다시 물었다.
“벚꽃축제?”
채영이 웃으며 물었다.
“응, 벚꽃…….”
사요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찾았다.
시간이 지나 있었다.
눈 앞의 사람이 누구라는 것은 잊지 않았지만 지나간 이야기는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저기, 내가 누군지 잊은 건 아니지?”
“사요. 사요잖아. 그걸 왜 물어? 내가 널 구해줬잖아. 구해줘서 고맙다고 말해놓고서.”
채영은 천진하게 웃었다.
“그래. 네가 나를 구했어.”
사요는 눈물이 날 것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태어난지 일 년도 안 된 갓난아기한테 자기 몸을 의탁하고 있는 것 같은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이 녀석을 위해서라도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잖아!
사요는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벚꽃 얘기, 다른 사람한테 했던 걸 착각했나보다. 나한테 다시 들려줘.”
채영이 사요를 졸랐다.
“그래. 내가 착각했나 봐.”
사요가 말했다.
“아빠랑 같이 벚꽃축제에 갔는데 꽃잎이 눈처럼 흩날렸었어. 앞에선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이 양산을 들고 오고 있었고. 아빠가 나한테 기모노를 갖고 싶냐고 해서 나는 양산을 갖고 싶다고 했었어. 붉은, 정말 예뻤던, 그 양산을.”
괜히 울컥했다.
“거봐. 처음 듣는 얘기야. 나한테 한 적 없어. 다른 사람한테 말했던 걸 착각했던 모양이야.”
채영이 자신있게 말했다.
“그래. 그런 것 같아. 내가 착각했던 모양이야.”
사요가 채영에게 다가가 채영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채영은 사요의 가슴에 갇힌 채 사요를 올려다 보려 했다.
“왜?”
잘 흘러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채영이 물었다.
“사랑하고 싶어서. 네가 싫다고 하지 않는다면.”
사요가 말했다.
“싫다고 하지 않는다면?”
채영이 웃었다.
“그래. 싫어?”
“싫진 않아. 나도 너무나 원하고 있어. 하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왠지는 모르겠어.”
왠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자기의 기억이 45분밖에는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사요는 슬프게 웃음 지었다.
“그 따위 어설픈 직감 같은 건 버려.”
“응?”
사요가 채영을 밀었고 채영은 뒷걸음을 치다가 이내 침대에 다다랐다.
“정말 이러고 싶은 거야?”
채영이 물었다.
“그래. 너한테 나를 주고 싶어. 그리고 너를 갖고 싶고.”
사요의 말에 채영이 슬퍼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지금 당장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놓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는 알고 있어, 사요?”
채영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뭘?”
“내가 알아야 하는 거. 내가 놓치고 있는 거.”
“그런 게 있니?”
사요가 태연하게 물었다.
다음 순간 사요는 셔츠를 벗었다.
브래지어에 감싸인 사랑스런 가슴이 채영의 눈 앞에 드러났다.
“미안하지만 지금부턴 어두운 게 좋아.”
사요가 말했다.
사요가 침대 위에 누운 채영의 허리 옆으로 무릎 하나를 대고 몸을 기울여 커튼을 쳤다.
그렇다고 충분히 어두워지지는 않았다.
채영의 눈에는 사요의 몸에 난 흉터들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