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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번개의 틈은 놀라울 정도로 성장해서 교세를 확장할 것이고 세계 곳곳에 성전을 지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서림에게 걸린 최면을 풀어주고 서림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에게 조종받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지배복종 관계를 강화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상황이 안정되면, 쥐새끼 같은 실험체 몇 명을 처리해버리면 그만이다 라고 준은 간단히 생각을 정리했다.
맥브라이언은 자신의 완벽한 포트폴리오와 사랑에 빠질 지경이었다.
그것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
긴장감 넘치는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사요의 위로를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사요는 결코 간단한 여자가 아니었다.
맥브라이언은 자기가 사요를 갖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섣불리 욕심을 부리고 작은 것을 급히 갖겠다고 바라다가 그가 애써 그려놓은 큰 그림을 망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덕분에 사요는 그에게서 얼마동안이나마 벗어날 수가 있었다.
늘 크레이그가 감시한다는 것은 알았다.
크레이그는 자신이 부를 때면 언제든지 달려올 수 있는 거리에 머물도록 하라고 사요에게 지시를 했다.
크레이그의 말을 간단하게 무시했다가 크레이그의 지독한 폭력을 맛본 후로 사요는 웬만하면 그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크레이그와 둘이 붙는다면 압승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비슷한 데미지를 입힐 수는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크레이그가 정정당당하게 혼자 싸움에 임해줄지 그 점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사요는 크레이그와 붙는 것 보다는 45분짜리 불량 테이프를 가지고 있는 유채영의 곁을 기웃거리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았다.
유채영은 늘, 처음보는 여자를 대하는 것처럼 사요를 뜯어보았다.
그리고 매번,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얼간이같은 표정을 지었다.
“사요. 그게 내 이름이고 사실 우리는 어제도 만났어. 네 기억은 45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고 해서 나는 지금 백 번도 넘게 내 소개를 너한테 하는 중이야.”
채영은 이 여자가 웬 헛소리를 하는 건가 하다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메모지를 꺼냈다.
“이게 그 뜻인가?”
채영이 묻자 사요는 아마 그럴 거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 질문도 벌써 여러번 받았다.
자기 주머니에서 그런 메모지가 나왔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아냐면서 그는 묻곤 했다.
“나를 좀 도와줄 수 있어?”
채영이 말했다.
사요는 일인용 소파에 몸을 묻고 두 다리를 탁자 위로 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실에 가 봐야 하는데 지하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어. 혹시 알아?”
채영이 물었다.
그의 장기기억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지하실에는 그가 감금해서 죽인 사람들이 잔뜩 갇혀있다는 것도 사요는 알았다.
사요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찾을 필요 없어.”
“왜? 네가, 거기에 가 본 건 아니지?”
채영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안 갔어.”
“그럼? 혹시 다른 사람들한테 발견됐어?”
그가 놀라는 목소리로 물어서 사요도 조금은 놀랐다.
“그걸 걱정하고 있기는 했어? 발각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조금은 한 거야? 그러면서도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게 이해가 안 간다.”
말을 하다말고 사요가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방금 어떤 신호가 온 것 같았다.
한 번 시작되면 멈추지 않고 3초나 5초 간격으로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의 첫 신호가 들려온 것 같았다.
사요는 잔뜩 긴장을 했다가 그것이 자기가 잘못들은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안심했다.
순간적으로 웅크려졌던 몸이 펴졌다.
채영은 사요에게 바짝 다가왔다.
“누군가 발견했어? 지하실에 간 사람들이 있었어?”
사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차라리 경찰에 잡혔다면 좋았을 걸? 대신 너는 여기로 잡혀왔고 살아있다는 사실이 저주스러울 정도의 삶을 살았지.”
채영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앉았다.
사요의 말이 전부 다 이해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너는 누구야? 나랑 같이 자는 사이야?”
채영이 물었다.
“아마 아닐 걸? 내가 자는 동안 네가 덮친 적이 없다면.”
사요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나는 강간같은 건 안해.”
채영이 단언했다.
“기억이라는 걸 겨우 45분밖에 못 갖는 애가 꽤 확정적으로 말하네?”
사요가 말했다.
채영을 놀리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말을 하고 보니 그렇게 말이 나와버렸다.
주워 담을 수는 없어서 사과라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채영은 전혀 충격받은 얼굴이 아니었다.
“아무리 기억하는 능력이 사라져도 사람 본질이라는 건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지하실에 갇혀 있던 사람들. 우리 누나를 강간했어. 앞을 보지도 못하는 누나를.”
사요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 중에는 젊은 여자도 있었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채영은 사요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그 여자들의 죄질이 덜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지. 그만 얘기하자.”
채영은 일어섰다.
그리고 강박적으로 채소를 씻고 칼질을 했다.
“어떻게 알았어?”
사요가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갔다.
“스너프 필름을 보자고 선배들이 꼬드겼어. 우리는 양어머니랑 살고 있었고 나는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 있었어. 누나랑 헤어진지 겨우 삼 개월이었어. 하긴. 내가 누나 곁에 있는 동안에도 그 짓은 계속 되고 있었어. 그만 얘기하자.”
또 그만 얘기하자고 그러네, 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 말은 진심이었던 듯 채영은 그 후로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사요는 시계를 보고 자기가 채영에게 인사를 하고 38분쯤 지났다는 것을 확인했다.
“45분이 지나면 다시 인사해야 하나?”
사요가 물었다.
“몰라. 그건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그래도. 그런 건 아니겠지? 지금 너는 나를 알고 있잖아. 이 앎이 다른 45분을 이어가 주지 않을까?”
사요가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적상추를 입안에 넣고 씹으면서 채영이 말했다.
“나, 아침을 몇 번째 먹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45분이 내 기억의 한계라면.”
“배고파서 먹는 것 아냐? 그럼 된 거지.”
“그런가?”
“그리고 아침을 수 십 번 먹은 사람의 몸은 아니고.”
사요의 말에 채영은 비로소 안심하는 것 같았다.
45분이 지났지만 채영은 사요를 잊지 않았다.
그의 시계에서 사라진지 45분을 떨어져 있지 않으면 어쨌든 기억을 유지해주기는 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사요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사요가 다시 숨을 멈췄을 때 채영은 걱정스런 눈으로 사요를 바라보았다.
사요는 오른쪽 상반의 한 곳을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이제 채영도 그게 사요의 습관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도대체 뭣 때문에 그래?”
“아니. 너는 무슨 소리 방금 안 들렸어?”
“안 들린 것 같은데. 무슨 소리를 말하는 거야?”
“아닌가? 내가 잘못 들었나? 그렇다면 된 거고.”
“도대체 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건데 그래?”
“나는. 약간 미쳤나봐. 약간보다 좀 더 심각한 상태인 건지도 몰라. 아마 확실히 그런 거겠지. 사람들을 죽였어. 어떤 미친 년이 껌을 씹어대는 바람에 내가 확 돌아버렸거든. 그리고 그게 기폭제가 됐어. 나도 내가 잘못했다는 건 알아. 아. 더 말하지는 않을래. 네가 나를 이상하게 여길 것 같아.”
“이 얘기. 이 얘기도 나는 잊게 되겠지?”
“아, 그러려나? 그러면 그냥 전부 얘기해 버려도 괜찮은 걸까?”
“너랑 나는 잘 맞는 팀인 것 같아. 네가 뭔가를 털어버리고 싶다면 나한테 쏟으면 될 거야. 나는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그 소식을 듣고 가서 내가 너를 다른 사람한테 신고해 버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러려나?”
“그래도 네가 좋은 얘기를 더 많이 하면 좋겠다.”
“왜?”
“나쁜 기억으로만 가득하다고 생각하면. 불쌍하잖아.”
“45분이 지나면 전부 잊어버리는 애가 나를 동정한다는 거야?”
“맘에 안 들면 덤벼.”
채영이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자 사요가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기억도 있어.”
“뭔데? 말해줘.”
채영이 재촉했다.
“사실 별 것 아니긴 한데. 축제 때 아빠랑 같이 갔었던 기억. 벚꽃이 피어 있었고.”
“사랑받는 아이였나보네.”
“응. 아빠는 내가 나쁜 애로 자랄 거라는 걸 몰랐거든. 다행히 일찍 돌아가셨지. 내가 아직 착한 애인 동안에.”
“다행이네.”
“눈이 내리는 것처럼 벚꽃이 흩날리던 날에 나는 아빠 손을 잡고 걸으면서 두리번거렸어. 있잖아. 그 기억이, 예리한 칼날로 잘 떼내져서 소중하게 스크랩된 것처럼 자주 떠올라. 그 순간이 나한테는 의미가 깊었나봐. 특별히 다른 일이 일어났던 건 아니었거든? 그런데 그 순간이 자주 떠올라. 벚꽃나무를 보면, 그리고 그 연분홍빛 꽃눈이 날리는 걸 보면 여지없기 그 기억이 떠올라.”
“부럽다.”
“너한테는 그런 기억이 없어?”
“네 얘기나 계속해 봐.”
“그리고 별 건 없어. 앙증맞은 양산을 쓴 기모노 차림의 여자들이 우리 곁을 지나갔어. 정말 예쁜 기모노였는데. 금색 실이 짜 넣어져 있는……. 얼굴에는 희게 화장을 하고.”
“입술. 입술을 조그맣게 그려넣잖아.”
“그래. 조금은 우스꽝스러워보이는 그런 모습을 하고.”
“즐거웠겠다.”
“우리 사요도 저런 기모노를 입고 싶니? 라고 아빠가 말했지. 나는 양산이 더 탐나서 양산을 갖고 싶다고 말했지.”
채영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하나의 풍경으로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린 아이의 손을 꽉 잡은 아버지.
기모노 차림의 여자들이 양산을 쓰고 지나가고 아이는 그 양산을 부러워하며 돌아서면서까지 바라보는 모습이 선했다.
채영은 사요와 그날의 벚꽃놀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사요와 헤어지고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그 기억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었다.
하지만 슬플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사요를 질투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무엇을 잃었는지도 모를 테니까.
뭘 놓쳤는지도 모르고 기분 좋게 웃겠지.
채영은 그 생각을 했다.
그러자 문득 슬퍼졌다.
사요는 채영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걸린 저주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그의 슬픔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사요는 스스로 위로를 받았다.
“준이 누구야?”
채영이 물었다.
그것은 채영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었다.
자기 팔에 새겨진 이름이 궁금했을 것이다.
사요는 자기가 해 줄 수 있는 선에서 답을 들려주었다.
붉은 번개의 틈의 교주.
신이라고도 불리는 남자.
채영은 더 많은 것을 듣고 싶어했지만 사요도 준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사요는 채영에게, 준과 크레이그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해주곤 했다.
‘왜?’ 하고 채영이 물으면, ‘그건 나도 잘 모르지만.’ 이라고 대답했다.
도무지 아는 것이 많질 않았다.
“준은 나쁜 사람이야?”
채영이 물었다.
“넌 어떤데? 넌 나쁜 사람이야? 나는?”
사요가 물었다.
“알겠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채영이 대답했다.
어떻게 그게 대답이 되었다는 건지 사요는 알 수 없었지만 채영에게는 그 나름의 이해하는 방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그 말로 빨리 이해를 하는 것 같아서 사요는 채영이 그 질문을 할 때마다 그 대답을 반복해서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