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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이 알려준대로 노크를 하면 던칸 의원이 총구를 입에 물고 자살을 할 거라고 했다.
준이 하는 말에 의심을 품는 적이 별로 없었지만 그 얘기만큼은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크레이그는 소리를 흡수하는 복도를 지나 드디어 던칸 의원의 사무실 문 앞에 당도했다.
그리고 정해져있던 대로 노크를 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크레이그의 귀에 총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크레이그의 가슴을 찢는 것 같았다.
‘세상에. 정말로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크레이그는 그 총소리가 저를 뚫는 것 같은 긴장감을 느꼈다.
문을 열자 책상 위에 쓰러진 던칸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던칸이라는 것까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던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크레이그는 던칸을 향해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복도 끝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던칸의 보좌관인듯했다.
크레이그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그러다가, 보좌간이 들어온 후에는 피할 틈도 없겠다는 생각에 정면돌파를 하기로 했다.
복도에서 두 사람이 어긋났다.
크레이그를 보고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었지만 다가오던 보좌관이 크레이그와 마주치기 직전에 돌아서며 전화를 받았다.
“대통령께서요? 의원님을요? 지금 이리로 오신다고요?”
그러면서 보좌관이 서둘렀다.
그 말이 모두 사전에 준비된 대사였다는 것을 크레이그가 알 리가 없었다.
크레이그는 보좌관이 돌아가는 틈을 타서 그곳을 떠났다.
던칸의 죽음을 증명할 수 있도록 그의 시신을 찍어 오라고 했던 준의 명령을 이행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희영은 자기가 보인 환시가 성공했음을 알았다.
크레이그가 들은 환청이 희영의 능력이었는지, 아니면 기선이 한 일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어쨌거나 그들은 첫 계획이 성공을 거두었음을 깨닫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돼.”
기선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칸트의 죽음을 둘러싸고 붉은 번개의 틈에 대한 소문이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했다.
준은, 던칸의 죽음이 알려지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소문이 힘을 잃을 거라고 생각했다.
크레이그가 서두르는 통에 던칸의 죽음을 증명할 사진 한 장 건져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히는 것보다는 잘 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칸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퍼질 때마다 준의 머릿속은 복잡해져갔다.
준은 칸트의 죽음을 조용히 애도하고 싶었다.
칸트가 자신을 완전히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마다 그는 그 감정이 증오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칸트야말로 자신이 온전히 사랑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칸트의 죽음을 서러워하거나 슬퍼하는 대신 칸트의 죽음이 가져오는 악영향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칸트의 죽음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붉은 번개의 틈에 대해서 내리는 평가가 나빠지고 있음을 준은 알았다.
준은 칸트를 잃은 슬픔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문제를 해결해 내야만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은,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붉은 번개의 틈을 단단한 기반 위에 올려 놓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던칸의 죽음이라는 것은 대단한 정보였다.
그가 차기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던칸의 인기는 현 대통령의 인기보다도 더 높았다.
그런데 그런 던칸이 죽는다면.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은 엄청났다.
활용할 수 있는 수만가지 정보가 있었다.
던칸의 죽음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지금, 그 정보를 활용한다면 큰 돈을 벌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기회를 그냥 날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준이 움직이는 때를 맞춰서 지명과 타이라가 만났다.
타이라는 처음 얼마간 서먹서먹해 했지만 지명이 자신을 전혀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감정을 완전히 정리할 수가 있었다.
혹시라도 여지가 있을까 하면서 기다려 왔지만 지명에게는 타이라를 위해 자리를 남겨둘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 확실해 보이자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 오히려 쉬웠던 것이다.
“어려울 건 전혀 없어. 준 맥브라이언이 사는 걸 팔고 그가 파는 걸 사는 거야.”
지명이 말했다.
“잘 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
타이라가 물었다.
“던칸이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면 되겠지. 던칸을 어떻게 등장시키는 게 좋겠는지 그 생각이나 해 보자.”
지명이 한가롭게 말했다.
그것은 준 맥브라이언에게 치명타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던칸이 등장하는 것에 맞추어서 각 회사의 주가가 급등하거나 폭락을 맞을 것이었다.
“생각해 둔 이벤트라도 있어?”
타이라가 물었다.
“아니. 넌?”
“나도 없는데.”
타이라는 머리를 굴렸다.
“민생을 챙기는 던칸이 우연히 카메라에 잡힌다는 설정은 어때? 작위적으로 카메라를 끌고 다니는 게 아니라 우연히 카메라에 잡히는 거야.”
“어린 아이와 애완동물이 있으면 더 좋겠지.”
“거기에 미인까지. 그러면 그림은 완벽해질 테고 던칸의 인기는 치솟을 거야.”
“자애롭고 선구자적인 이미지. 조용히 뒤에서 헌신하는 모습.”
지명도 맞장구를 쳤다.
“내가 아는 방송인이 있어. 나한테 인터뷰 요청을 했는데 장소는 내가 정할 수 있어.”
“좋아. 던칸을 그리로 부르는 거야.”
지명과 타이라가 의미심장하게 눈을 맞추었다.
“재미있겠다. 사이크가 왜 너한테 딱 들러붙어 있는 줄 알겠어.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날 거라는 보장만 있다면 나도 네 곁에 머물고 싶어질 거야.”
타이라가 말했다.
“안타깝지만 내 주위에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있어서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들어오는 게 어려울 거야.”
지명이 말했다.
타이라는 질려버렸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희영과 기선은 호텔 객실에서 사람들을 맞았다.
당연히 항은 빠져 있었다.
항은 사람들이 모두 기선의 방에 모였다는 것도 알지 못할 터였다.
시영이 꼼꼼하게 문 잠긴 것을 확인했다.
“우리는 준비 됐어.”
연우가 시영을 보더니 희영에게 말했다.
“우리가 준비할 건 없잖아요.”
아미가 웃으며 말했다.
선우 형이 아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결국 여기까지 같이 오기로 결정해 준 아미가 고마웠다.
쉬운 결정은 절대로 아니었을 거라고 선우 형은 생각했다.
“자, 그럼.”
희영이 말했다.
그들은 어디를 봐야 할지 알지 못했지만 그들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환시가 나타났다.
방 안에, 낯선 침대 하나가 어느 순간 새로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니.”
희영이 부르자 침대 위에 사람 하나가 떠올랐다.
침대와 서림이 한꺼번에 떠오르지 못한 것은 서림을 위한 희영의 배려였다.
많은 사람들의 앞에 자신의 모습이 벌거벗은 듯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서림이 준비할 시간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서림의 방 안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북적거렸지만 그 모습까지 환시로 보이지는 않았다.
희영은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워할지 알았다.
서림을 사랑하는 감정이 커질수록 서림이 사람들의 질병과 고통을 전가받으며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있는 모습을 볼 때 더 큰 고통을 느꼈다.
기선으로 인해서 해방이 되고 이제 언제든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서림은 기선의 부탁으로 이전과 같은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서림은 누운 채로 그들을 반겼다.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희영을 매개체로 서림이 하는 말이 모두에게 들렸다.
“또 찾아와줬네요.”
서림이 말했다.
“이제 미국에 왔어요. 곧 언니를 구하러 갈 거예요.”
“정말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우리가 정말 걱정하는 건, 오빠가 어떨까 하는 거예요. 과연 오빠가 기절하지 않을지 걱정이 돼요.”
희영이 말했다.
장난스럽기도 했지만 그건 솔직히, 걱정이 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항이 집중해 주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만으로는 힘들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명에게 지강은과 진한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수 백 명을 감당할 수는 없을 터였다.
히나타가 같이 한다고 해도 항처럼 효과적으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무력화시킬 수는 없었다.
서림은 희영이 말하지 않고 생각만 하는 것을 눈치챘다.
“그 사람이 그런 능력을 가졌다는 거.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도 서림은 흐뭇해했다.
서림이 행복해 하며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느낄 수가 있었다.
“오래 기다려 주셨어요. 정말 오래 기다려 주셨어요.”
기선이 말했다.
“고마워요. 내가 다시 뭔가를 소망하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내 그림에서 다시 꽃이 피어나고 있다는 거 알아요? 몇 송이가 피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흐드러지게, 나뭇가지가 꺾어질만큼 피어나고 있다는 거 알아요? 주체할 수 없는 내 기다림이 붓을 타고 흘러가는 것 같아요. 남편을 정말 보고 싶어요. 그 사람이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사랑할지 걱정이 된 적도 있었지만, 그 사람을 다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서림의 말에 희영은 기선의 손을 꼬옥 쥐었다.
가슴이 미어지려는 것 같았다.
너무 긴 시간 동안 헤어졌던 연인이 재회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몇 번, 항에게 어떤 식으로든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할 수 있게 해 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항이 잘 견디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지 그것도 문제였다.
항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화를 내곤 했다.
항에게 서림의 얘기를 꺼내면, 어떻게 잔인하고 무례하게 그 얘기를 꺼낼 수 있는 건가 하는 표정으로 항은 기선을 노려 보았다.
항에게 서림은 잔뜩 달구어진 장작불 같았다.
고통 없이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는 존재였다.
살아있다는 상상을 할 수가 없는 상태라서 그랬겠지만 서림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면, 그는 아마도 차분히 기다리지 못할 것이다.
당장 자기 몸에 불을 끼얹고 준의 신전에 뛰어들 사람이었다.
희영은 소명과 정인을 서림에게 소개했다.
소명은 다시 지강은과 진한을 서림에게 소개했다.
지강은과 진한은 이 모든 일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환시라니.
최면에 걸려 움직이지 못했다니.
자기 육체에 갇혀 있었다니.
그들의 상상의 틀은 계속해서 두들겨지고 무너져 내려야 했다.
이제 충분히 부쉈다고 생각하는데도 다시 일이 생겼다.
그리고 전보다 더 강도 높은 충격으로 상상의 틀을 다시 한 번 더 무너뜨리도록 강요받곤 했다.
지강은과 진한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뭐.’
거의 그런 표정이었다.
자포자기한 표정.
희영과 기선은 자신들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들려주었다.
그들이 서림을 구출하러 가면 서림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함께 나오면 된다고 했다.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을 가진 시영과, 경계심을 무너뜨리는 능력을 가진 선우 형이 함께 간다면 무력 충돌은 피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기선은 말했다.
“제단 아래의 사람들은……. 다를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