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자들-79화 (79/101)

0079 / 0101 ----------------------------------------------

사요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한 곳에 집중된 소름끼치는 통증으로부터 자유를 주는 것 같은 소리였다.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는 발걸음이 사요를 향해 다가왔다.

사요는 그 발소리를 들으며 단 번에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런 걸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을 거라고 그런 허튼 생각을 다했다.

그 소리는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다른 소리를 만들어냈다.

사요는 자신을 괴롭히던 남자가 발소리를 내며 걸어온 사람 앞에서 당황하고 허둥대는 것을 깨달았다.

발소리는 이어졌다.

그것이 더 가까워졌다.

이제는 그 소리만 났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며 사요의 귀를 찢으려고 고집부리는 것 같은 소리는 멈추었다.

사요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사요가 있는 곳에만 유독 강한 빛이 들어서 주위의 어둠은 바라보나마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 혼자만 빛 속에 놓였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윽고 발소리가 빛 안으로 들어왔다.

발이 먼저 들어온 것은 아니었겠지만 사요는 발을 먼저 보았다.

소리를 내며 사요에게 다가왔던 그것을.

그리고 발로부터 시작해서 다리를 훑고 그 위로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얼굴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제 막 생겨난 상처 같았다.

“나는 준 맥브라이언이다.”

그가 말했다.

“나는 사요.”

사요가 말했다.

눈이 멀었을까?

사요는 그 생각을 했다.

얼굴을 가로질러 난 칼자국은 눈 위라고 예외를 두지 않았다.

눈꺼풀 위에서 흐르는 핏방울이 위험하게 보였다.

소리를 거두어준 남자가 고마웠다.

준.

준 맥브라이언.

그가 다가와서 사요의 두 귀에 손을 얹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사요는 그 순간에 결심했다.

이 남자를 위해서 죽겠다고.

그가 해 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고요한 소리를 내면서 사요에게 다가와 줬다는 것 말고는.

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다.

“사요.”

그가 속삭였다.

사요는 그를 바라보았다.

특별히 정성들여 빚은 것 같은 섬세하게 아름다운 준의 모습을 보면서 사요는 눈물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자.”

준이 말했다.

사요는 그를 바라보았다.

준이 뒤를 돌아보자 크레이그가 나아와서 사요의 구속구를 풀어주었다.

“원하는 게 있어?”

준이 물었다.

사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요가 원하는 게 뭔지를 짐작한 듯, 사요를 줄곧 괴롭혀왔던 연구원의 얼굴이 빠르게 일그러졌다.

“좋아.”

준이 허락했다.

사요는 연구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괴력을 발휘했다.

사요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연구원은 사요가, 자기가 알고 있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인격체같다고 생각했다.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두려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요의 존재감은 모든 것을 압도했다.

크레이그마저도 광포한 두려움을 느꼈다.

사요의 몸에서 얼핏, 푸른 빛이 뿜어져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광기에 색깔이 있다면 바로 저런 색깔일 거라고 연구원은 생각했다.

사요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소리가 없었다.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사요는 그 감격의 순간에 눈물을 떨구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 조용하다. 정말 조용하다.’

사요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침묵에게 사죄를 고하는 것이었다.

곧 그 완벽한 고요함이 잠시 훼손되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미안하고 송구스러워져서 숨을 죽였다.

사위를 지배하는 정적 앞에 고개 숙였던 사요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사요의 시선은 흐트러짐도, 주저함도 없이 연구원을 향했다.

사요가 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붙잡았다.

연구원은 달아나려고 했지만 모든 시도가 헛될 뿐이었다.

사요는 춤추는 것처럼 우아하게 무릎을 들어 연구원의 안면을 가격했다.

연구원은 억 소리를 냈다.

그는 준이나 크레이그, 누구 한 사람이라도 그 상황을 말려주고 자기를 도와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절망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요는 그를 거칠게 바닥에 내던져버렸다.

사요의 발길질이 아무렇게나 그의 몸을 찔러댔고 연구원은 급소만큼은 피해 보려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사요는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고 그를 걷어찼다.

그러면서 뭔가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크레이그는 사요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는지 준의 얼굴에서 흐르는 핏자국을 닦아주는데만 집중했다.

“됐다. 이제.”

준이 말했다.

“상처가 깊습니다.”

“피만 멎으면 되겠지.”

“눈은 괜찮으십니까?”

“멍청하게 굴진 않았어. 눈은 괜찮다.”

크레이그는 그제야 안심한 표정이었다.

유채영은 눈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는 어둠의 일부처럼 보였다.

제대로 숨을 내쉬지도 않았다.

사요는 눈을 희번득거렸다.

사요의 눈에, 하얀 벽에 걸린 인터폰이 들어왔다.

사요는 수화기를 잡아 뺐다.

그리고 꾸불꾸불하게 감긴 플라스틱 선을 흡족한 듯 잡아늘였다.

그것으로 사요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알아챈 사람은 없었다.

사요는 곤죽이 되도록 맞아서 거의 의식이 가물가물한 연구원의 목을 그것으로 칭칭 둘러 감았다.

하지만 그것은 안타까울 정도로 늘어나서 연구원의 목을 질식시키기에는 역부족인 것처럼 보였다.

준과 크레이그 모두, 사요가 그를 질식시키려 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사요는 좌절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자기가 목표로 하는 것에 꾸준하게 다가가고 있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을 짓고 열에 들떠 있었다.

가끔 미소가 떠오르기도 했다.

사요는 연구원의 주머니를 더듬었다.

거기에서 지포 라이터를 찾아낸 사요는 완성을 목전에 둔 자의 희열을 눈에 담았다.

사요는 연구원의 몸에 불을 질렀다.

연구원은 비명을 질렀다.

준과 크레이그에게 살려달라고 애절하게 소리를 쳤다.

하지만 준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원장이 달려왔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을 했다.

“원장. 지금은 비상사태지?”

준이 말했다.

원장은 준이야말로 미친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요를 떼내고 연구원을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요의 괴력에 나가떨어져 버렸다.

“준. 당장 멈춰야 합니다!!”

연구원은 지옥에 갇힌 괴물같은 비명을 내지르면서 바닥에서 뒹굴었다.

“비상벨이라도 울려야 하는 것 아닌가? 화재 경보기라도.”

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구속구가 풀린 사요에게 그런 소리를 들려주었다가 어떤 참극이 벌어질지 준이 과연 모른다는 것인지 그는 따져 묻고 싶었다.

“그랬다가는!!”

원장이 소리쳤다.

그러다가 그는 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는 사요의 화력을 시험하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바로, 실험실의 실험체 뿐만 아니라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원장은 정신없이 달려나갔다.

“크레이그. 손도끼를 가져와라. 비상벨을 울려. 불이 났잖아. 화재경보기를 작동시켜.”

크레이그는 비열한 웃음을 짓고 준의 명령을 수행했다.

유채영은 이 모든 상황을 놓치지 않고 이해하려고 애썼다.

사요에게 허락된 평온의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사요는 귓가에 들려오는 화재경보기의 경보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피눈물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안돼요. 저것 좀 꺼 줘요. 저것 좀 꺼 주세요!!”

사요가 말했다.

하지만 준은 사요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사요는 바닥을 굴러다니는 불덩이에게 달려갔다.

그 불을 끄면 이 소리가 멈출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요는 어떻게든 연구원에게 붙은 불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불을 끄는 것도 쉽지 않았다.

플라스틱이 녹아들면서 연구원의 몸이 같이 녹아들어갔다.

사요는 울부짖었다.

연구원은 이미 쇼크로 정신을 잃은 후였다.

사요는 그의 고통이 이해되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하며 소리쳤다.

“제발 저것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사요는 손도끼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손에 들고 벽에 붙어있는 경보기를 깨려고 했다.

경보기는 소리를 멈추었다.

하지만 사요에게는 그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이미 준의 최면에 걸려든 덕이었다.

준이 해방시켜 주지 않는 한 그 소리는 무한으로 반복을 할 것이었다.

유채영은 사요가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크레이그는 상상할 수 있을 뿐이었다.

사요에게는 그 소리가 절대로 멈추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준이 자비를 베풀어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사요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그 소리는 두 손으로 귀를 막는다고 해서 들리지 않을 소리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사요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요는 뛰쳐나갔다.

들어올 때는 약물에 절어 있었던 데다 눈이 가려져 있어서 알지 못했지만 그곳을 돌아서 나가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실험실에는 일대 혼란이 왔다.

사요가 누구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연구원들 중 대부분은 사요를 탐욕스럽게 취한 적이 있었다.

그들에게 사요는 다른 실험체와 마찬가지로 인격이 없는 동물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 그런 사요가 구속구도 없이 날뛰고 있는 것이다.

연구원들은 이리저리 달아났다.

“크레이그.”

준이 조용히 크레이그를 불렀다.

“불을 내지는 못하도록 해. 우리한테는 중요한 자원이잖아. 전부 다 구워버릴 필요는 없는 거지.”

크레이그는 사요를 바짝 따라 붙었다.

유채영은 그들의 뒤를 따라 왔다.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채 45분을 지나면 그는 그들에 대한 정보를 키워나갈 수가 없었다.

유채영은 주머니에 손이 들어갈 때마다 거기에서 만져지는 포스트잇을 꺼내서 그것을 들여다 보았다.

[45분- 기억이 지속되는 시간]

거기에는 그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 문구는 그의 가슴에 새겨졌다.

아무리 깊이 새겨 넣어도 45분이 지나고 나면 다시 사라져 버릴 말이었지만 그는 어떻게든 그것을 새겨 넣으려 애썼다.

준에게 부탁해서 그 문구를 다른 팔에 새겨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싶었다.

하지만 사요를 다루는 것을 보니 준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조금쯤은 가늠이 되었다.

사요가 실험체들을 풀어주려는 시도를 하는 것을 보고 크레이그가 준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일을 너무 크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대충 화를 가라앉힐 정도로만 하게 해 줘.”

준의 말에 크레이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요는 닥치는대로 찌르고 꺾고 때렸다.

자신을 구속구로 속박한 채 변태적인 행위를 강요했던 연구원들이 우선 그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달아나려 했지만 규칙적인 소리에 시달리는 사요에게서 달아날 길은 없었다.

“제발. 제발 좀 이 소리에서 나를!!”

사요가 소리쳤다.

하지만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준이 원하는 것을 전부 다 얻게 될 때까지.

그녀의 지옥은 끝이 나지 않았다.

***

크레이그는 던칸 의원의 사무실로 은밀하게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