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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면 네가 누렸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해 주겠다는 듯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때는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사요는 그 소리가 언제 다시 들려올지 알지 못해서 온몸을 긴장시켰다.
신경쇠약에 걸린 사요는 자기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크레이그는 준이 왜 그런 사요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알지 못했다.
사요가 아름다운 여자라서? 라는 생각은 곧 벽에 부딪쳤다.
크레이그는 동양 여자에게 매력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동양 여자의 아름다움을 알아볼 눈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더더욱 준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준은 크레이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
그는 무기력한 몸짓으로 제단으로 향했다.
크레이그가 앞장 서서 실험실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자 준은 그 아래의 계단으로 향했다.
그곳을 지나갈 때는 칸트와 함께 거길 내려가던 순간이 자주 떠올랐다.
칸트에게 에단이 가까이 다가가게 됐던 계기가 되었던 순간이 같이 떠오르면서 준은 늘 기분이 나빠졌다.
그 날은 특히 더 칸트의 망령이 집요하게 따라 붙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른 날보다 그런 감정이 한층 더 심했다.
연구원들이 갑자기 나타난 준의 등장에 놀라며 도열했다.
하지만 준은 그들에게는 일절 관심도 보이지 않고 곧바로 실험실 뒤의 밀실로 향했다.
원장이 조급한 걸음으로 그를 따라붙었다.
“준. 찾으시는 사람이라도 있나요?”
“사요. 사요는 아직 살아있지?”
준의 질문에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있기는 합니다. 뇌와 심장이 아직 기능을 하고 있기는 하거든요.”
그 말에 준은, 그것으로 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사요를 왜 보시려 하는 건지 여쭤 봐도 될까요? 사요는 구속구를 입히지 않으면 통제가 되지도 않습니다. 아주 위험하다고 봐야하죠.”
“그래서?”
“사요를 보셔야 한다면 충분히 안전장치를 하셔야 합니다. 저희가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강한 마취를 시키거나.”
“필요없어.”
준이 말했다.
그리고 원장을 바라보았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테니까 돌아가서 일을 보도록 해.”
원장은 머뭇거리다가 돌아섰다.
크레이그가 준의 뒤를 바짝 붙어 걸었다.
준은 밀실에 들어섰다가, 전에 보지 못했던 칸막이가 생겨난 것을 발견했다.
“원장을 다시 불러와.”
준이 크레이그에게 말했다.
원장은 크레이그의 부름을 듣고 달려왔다.
“저 방은 뭐지?”
“아, 신입이 있습니다. 준.”
“신입?”
준은 원장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모르는 일이 있었냐고 추궁하는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 앞에서 원장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누구지? 배교한 사람인가?”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습니다.”
“추상적인 위험으로 감금을 했다는 거군.”
“네. 맞습니다. 준. 위험성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교리에 대한 위험성이었나? 아니면 원장에게 위협적인 요소였나?”
원장은 얼굴을 붉혔다.
“그런 게 아닙니다. 준.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관심 없어.” 준은 그냥 그 방을 지나치려 했다.
그의 허락 없이 누군가를 감금했다고 해서 크게 문제 삼을 일도 아니었다.
그런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런 일에는 폭넓게 원장의 재량을 인정하고 있었다.
준은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이 준의 시선을 붙잡았다.
보려고 한 것이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그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준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백발에 어울리지 않게 얼굴은 젊었다.
이십 대 초반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누구지?”
준이 원장을 향해 돌아섰다.
“연구 가치가 있습니다. 준. 뇌 기능에 장애가 생긴 사람이에요. 그의 기억은 45분 정도만 지속됩니다. 그건 시계처럼 정확해요.”
“불을 켜봐.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준이 명령하자 원장이 백발의 남자가 앉아 있는 방의 불을 켰다.
벽에는 빽빽하게 포스트 잇이 붙어 있었다.
남자는 불이 켜지는 동안에도 종이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쓴 것을 바라보더니 벽에 붙여 두었던 다른 메모들을 보았다.
그 어두운 곳에서 뭘 보고 있었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연필이 위험하지는 않겠어?”
“자살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건 저 인간과는 상관없는 얘기라고 말씀드려야겠군요.”
원장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럼 저 사람은 뭘 알고 있는 거지?”
“2년 전에 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를 당한 시점의 기억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는 혼동을 일으키지만 생활이 불가능한 정도는 아닙니다. 45분 전에 일어났던 일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는 2년 전, 사고를 당하기 전 상황에 자기가 놓여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누군가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소개하면 45분 동안 기억이 유지될 겁니다. 그 45분이 지나기 전에 방을 떠나지 않는다면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겠죠.”
“흥미롭군. 왜 45분인 거지?”
“그건 모릅니다. 어쨌건 지금으로서는, 그 시간만큼은 아주 정확히 지켜지고 있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런데 왜 밀실에?”
“폭력 성향이 아주 강합니다. 2년 전, 사고를 당했을 때도 자기가 일으킨 강도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총을 맞아 저렇게 된 겁니다.”
“피해자는 어떻게 됐지?”
“죽었죠. 아주 잔인하게요.”
“이미 저렇게 된 상태였을 텐데 피해자를 죽였다고?”
“네. 그 사람을 죽이기 전에는 쓰러질 수도 없었던 모양이죠.”
“흥미롭군.”
“그리고, 한국 사람입니다.”
“그래?”
“자기 이름이 유채영이라고 하더군요.”
“다른 건?”
“다른 건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듣지 않는 모양이지?”
준이 말했다.
원장은 고개를 숙였다.
“뇌 기능의 상실인가?”
“네. 그렇게 보입니다.”
“치료는 불가능하고?”
“네.”
“치료를 원치 않았던 건 아니고?”
“그건 아닙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실험체였다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요.”
“머리는 왜 저렇게 된 거지?”
“그것도 신기합니다. 하룻밤 사이에 저렇게 쇠어버렸습니다.”
“폭력성향에 대해서 말해봐.”
“벽에 붙여 놓는 메모지에 특정한 장소들이 적히곤 했습니다. 자기가 완전히 잊기 전에 기록을 하고 싶었던 것 같더군요.”
“그래서?”
“찾아가 봤습니다.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정말로 뭔가 있던가?”
“네. 지하감옥이더군요. 전쟁이 났을 때 대피소로 사용하던 지하실로 보였는데 거기에 사슬에 묶인 사람들이 잔뜩 있었습니다.”
“죽은 채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희가 갔을 때 살아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검사를 해 본 결과 그들은 모두 살아있는 동안 끔찍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저 사람 짓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건물에서 노트 수 십 권이 발견됐는데 필체도 똑같아요.”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지?”
“그게. ‘붉은 번개의 틈’ 입교자들이었습니다.”
“왜 죽인 거라고 생각해?”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 정도 일이라면 나한테 보고를 했어야 옳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좀더 정확하게 내용이 갖춰지면 보고드리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나이는 몇 살쯤 되는 거지?”
“주변 탐문 결과로 알아낸 바대로라면 27세일 겁니다.”
“특이한 사람이군.”
준은 유채영을 바라보았다.
“어두운데서 글씨를 쓰고 있었던 건가?”
“네. 습관입니다.”
“불빛이 없어도 제대로 쓰긴 해?”
“그렇긴 합니다.”
“불을 꺼 놓는 이유는?”
원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준이 답을 재촉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응?”
“항상 그러는 건 아닙니다. 지금은 벌을 주고 있는 거예요.”
“벌이라.”
“네.”
“어두운 걸 싫어하나?”
“어두움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죠. 지나친 긴장상태가 지속되면 예민하고 피로해지죠.”
“원장의 개인적인 원한처럼 들리는군.”
“개인적으로도 저 사람을 싫어합니다.”
“이제 좀 솔직해지겠다는 건가?”
“그렇다고 꼭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이러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 믿어보도록 하지.”
준은 크레이그를 바라보았다.
“원장은 돌아가.”
“……네.”
“열쇠는 크레이그에게 주고.”
“네?”
“열쇠 말이야.”
“……. 알겠습니다. 저희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을 하시려는 생각은 아닌 거라고 믿겠습니다.”
“뭘 믿든지 그건 원장의 자유지.”
준이 말했다.
원장이 크레이그에게 열쇠를 건넸다.
크레이그조차 선뜻 나서지 못하고 준의 눈치를 살폈다.
"열어."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요?"
크레이그의 말에 준은 쓰게 웃었다.
어쩐지 그가 그냥 웃고 지나가주는 것은 그것이 마지막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열어라. 크레이그."
다시 말했을 때, 준의 얼굴에서는 웃음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크레이그가 열쇠를 들고 다가가자 유채영이 시선을 돌렸다.
그는 다시 시작된 45분 안에서 모은 정보로는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는 듯했다.
누구냐고 묻고 싶은 표정으로 그가 준과 크레이그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크레이그는 재빨리 열쇠를 돌려 문을 열고 뒤로 물러섰다.
준이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유채영이라고 한다지?"
유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벽에 붙어 있는 기억의 보조수단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것이 제 이름인지 확인해 보려는 행동인 듯했다.
"네 이름이 뭔지는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부터 네가 내 명령에 복종하게 될 거라는 것만 기억하면 돼."
준이 말했다.
유채영은 영리하게 빛나는 눈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실만은 45분의 지속으로는 안 된다. 원한다면 네 몸에 새겨주지."
준이 말했다.
준이 크레이그를 바라보았지만 크레이그는 준의 시선을 피했다.
준이 무엇을 시키려는 건지는 알겠지만 그 일만큼은 자기를 시키지 말아줬으면 좋겠다는 의지가 묻어났다.
멍청한 자식!
준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는 듯이 크레이그를 바라보았다.
"아무거나 가져와봐. 원장."
준이 말했다.
원장은 그에게 이그잭토 나이프를 가져다 주었고 준은 저를 향해 순순히 팔을 내미는 준을 마주하고 섰다.
[나는 준의 말을 따른다.]
한 글자 한 글자가 정교하게 새겨졌다.
한글로 새겨지는 글씨를 크레이그와 원장은 읽지 못했지만 준은 자랑스럽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둘만 아는 그것이 그들의 밀어처럼 느껴졌다.
준은 확실하게 최면을 걸어두었지만 그것이 손상당한 뇌기능을 뛰어넘어서까지 작용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려웠다.
유채영은 팔을 찢으며 들어오는 고통을 느끼면서 자신의 실존을 확인했다.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준이 누군지 내가 기억하지 못하면 어쩌죠?"
준은 망설이지 않고 동그란 얼굴을 그렸다.
그리고 얼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사선 하나를 그려 주었다.
준이 무엇을 하려는 건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준이 이그잭토 나이프를 들어 제 얼굴을 그어버릴 때까지는.
유채영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준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준이군요."
그는 팔에 새겨진, 사선의 흉터를 가진 남자를 볼 때마다 45분이 지나기 전의 맹세를 떠올리게 될 터였다.
크레이그가 허둥대며 준의 상처를 무명 천으로 눌러주었다.
"이제 사요를 만나러 가 보자."
준의 말에 원장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은 준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준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안다면 원장은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슬슬 전쟁을 시작해야지. 그러려면 나도 준비라는 걸 조금은 해야 한다고."
준이 웃었다.
아무도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