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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칸트에게 안겨서 모든 걱정을 잊었던 때가 그리웠다.
그리고 칸트의 몸 속에서 자라던 어린 생명체의 고동을 다시 듣고 싶었다.
칸트처럼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라면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사요가 떠올랐다.
사요는 주기적으로 들리는 소리를 참지 못했다.
주기적으로 어떤 소리가 들려오면 사요의 폭력성은 점차 증폭되었다.
사요가 일본에서 두 량의 지하철을 완전히 불에 태우고 백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것은 사요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서 계속해서 껌을 씹어댄 까닭이었다.
사요는 몇 마디 말로 그 여자에게 껌을 조용히 씹으라고 권고했지만 여자는 사요의 말을 무시했다.
사요는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여자의 몸에 칼을 찔렀다.
그리고 라이터를 꺼내서 불이 순식간에 붙는 재질의 옷에 불을 붙였다.
사람들이 동요하며 달아나려 했지만 사요는 재빨리 문밖으로 나가서 누구든 문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전부 칼로 찔러서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질렀다.
몇몇 사람들은 연기와 불과, 몸에 불이 붙은 여자가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소리를 피해 달아나다가 사요에게 찔렸다.
사요에게 찔린 남자가 문에 걸쳐지는 바람에 문은 닫히지 않았고 지하철은 출발하지도 못했다.
충동적인 범행이었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 사요에게는 이미 휘발성 인화물질이 준비되어 있었다.
사요는 이미 걸어다니는 시한폭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그리고 그것을 멈춰달라는 요구가 묵살되는 순간 그 불안한 도화선에 불이 당겨졌던 것이다.
사요는 겁에 질려 떨며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앞으로 인화물질을 쏟아 부었다.
그들과 사요 사이에 작은 강이 흐르듯 인화물질이 흘러 퍼져갔다.
그런데도 그들이 빠져나가려고 하지 못한 것은,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은 모두 사요의 칼에 찔렸기 때문이었다.
사요의 체격은 말랐지만 키가 181센티였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 사나워보이는 눈매. 눌러쓴 모자. 크게 키워 입은 점퍼까지.
대충 보아서는 여자라는 것을 눈치채기도 힘들었다.
더군다나 화가 나서 이성을 상실했을 때는 사요 자신도 믿기 힘들 정도의 괴력이 폭발해 나오곤 했다.
사람들은 백 퍼센트 칼에 찔릴 수밖에 없는 탈출을 시도하는 것보다는 안에서 안전과 기회를 도모해보고자 했다.
열려진 문은 많았다.
동시에 달려나간다면 몇 사람은 탈출에 성공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자기가 재수없는 한 사람이 되어서 칼에 찔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섣불리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사요는 그들과 대치한 상태로 그들을 바라보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자기가 쓰러뜨렸던 사람의 몸에 몇 번이나 다시 칼을 집어넣고 있었다.
그들은 완전히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도망가기만 해 봐. 너희들도 잡아서 이렇게 만들어 주겠어.
그 의지가 강하게 전달되었다.
역에 도착한 열차가 출발하지 못한지 5분이 지났다.
문이 닫히지 않는 이유를 확인하려고 당연히 기관사가 내려왔다.
하지만 그도 그렇게 운이 좋지는 않았다.
그는 연기에 당황했다.
더군다나 그의 눈앞에 일렁이는 불꽃은 살아 있었다.
그것은 불행하게도 아직 숨이 끊기지 않은 여자였다.
여자는 몸부림을 치다가 쓰러졌다.
여자의 몸은 불행의 촉매제가 되었다.
여자가 발화점이 되어 불길이 삽시간에 거세졌다.
기관사에게는 모든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
불이 나는데도 사람들이 떠나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대한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문 안쪽에 숨어있던 사요를 의심할 이유가 그에게는 전혀 없었다.
사요는 그에게 다른 승객들과 전혀 달라보이지 않았다.
옷에 피가 튀어 있었지만 기관사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사요는 그를 등지고 서 있다가 놀란 기관사가 쓰러져 있는 승객에게 달려간 순간 뒤에서 칼을 찔렀다.
정차중에 열린 문으로 빠져나간 사람의 수는 정말 적었고 불은 빠르게 번져나갔다.
순식간에 화염이 치솟았고 당황한 승객들은 비명을 질렀다.
불길이 번지자 사요의 위협을 무릅쓰고 탈출을 시도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사요는 문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탈출하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찔러서 죽였다.
지치지도 않는 힘이었다.
사요 자신조차도 놀랐다.
왜 지치지 않는지.
뜨거운 연기가 호흡 중에 사요의 기관에도 들어갔지만 사요는 대단한 사명감을 가지고 그곳에서 버텼다.
열차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이 무전과 방송으로 전해지며 승객의 대피를 유도하는 방송이 흘러나오기까지 너무 긴 시간이 흘렀다.
보조기관사도 없이 혼자 운행을 하다가 맞은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기관사마저 죽어버리자 그곳은 한동안 방치되기만 했다.
화재경보기의 작동으로 본부사령실의 경보 램프가 울리고 기관사와 연락이 닿지 않자 뒤늦게 취해진 조치였다.
불길은 기관실과 연결된 전력공급선까지 태워버렸고 열차는 불에 달군 거대한 고철덩어리로 변해갔다.
아수라장이 된 역사에서, 칠흑 같은 어둠 속,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곳을 떠나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았던 사요는 그때 겨우 열 일곱 살이었다.
준 맥브라이언은 지하철역에서 피어오르는 심상치 않은 연기를 보고 가슴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참기 힘든 희열을 느꼈고 동요의 기색도 없이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소녀를 발견했다.
준도 사요를 여자 아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사요가 사고에 관계되어 있다는 것은 직감으로 깨달았고 사요의 뒤를 따라가 납치하는데 성공했다.
사요를 비행기에 태워 제댄 아래의 실험실에 둔 것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을 공포에 떨게 했던 사람을 자신이 장악할 수 있다는 사실은 준에게 특별한 기쁨을 주었다.
사요는 실험실의 안쪽 구석에 마련된 작은 밀실에 갇힌 채 고통을 당했다.
사요가 있는 밀실에는 5초 간격으로 계속해서 알람이 울렸다.
사요는 자기 팔을 물어뜯고 허벅지살을 손톱으로 찢어냈다.
자폐적인 증상이 나타났고 음식을 섭취하지도 못했다.
링거를 꽂아 강제로 영양공급을 하려고 해도 도무지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바늘은 살 속에서 부러졌다.
결국 사요에게는 특단의 조치가 내려졌다.
온몸이 묶인 채로 눕혀져서 강제로 생명 연장을 받은 것이다.
그 후로 사요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사요가 갑자기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게 몇 년 전 일인가. 사요는 지금 몇 살이 된 건가. 스물 셋? 스물 넷?’
그렇다고 해도 상큼한 젊은 아가씨의 모습이 상상되지는 않았다.
온몸에 상처와 세균에 감염되어 썩어가는 부위,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멍이 알록달록하게 새겨지고 여기저기에 쥐어뜯긴 흔적이 남아있는 볼품없는 미친 원숭이처럼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준은 바로 그런 모습을 떠올리면서 참을 수 없는 흥분을 느꼈다.
그는 크레이그가 보는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자위를 했다.
크레이그는 특별히 자리를 떠날 생각도, 시선을 피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주위를 살피면서 쓸데없는 움직임을 보이는 자들이 없는지를 살폈을 뿐이었다.
“사요한테 가 봐야겠어. 인생이 심심하지는 않을 거야. 사요하게 빨리 친해지도록 해 봐. 크레이그. 너와 사요가 내 등 뒤를 지켜주면 재미있겠어. 내 등 뒤에, 나를 향한 살해 욕구로 가득찬 미친 여자를 달고 다닌다고 생각해 봐. 진짜 흥미롭겠지?”
크레이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굴욕적이기는 했지만 준이 빠르게 쏟아내는 말 중 몇 마디를 놓쳐버렸다.
준도 크레이그가 자기가 한 말 중 몇 마디를 놓쳤다는 것을 알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가 보자고.”
그가 크레이그를 다시 재촉했고 그때는 크레이그도 기운차게 걸음을 옮겼다.
사요의 세계에는 거친 혼돈만이 존재했다.
잠시라도 조용해지는 순간이 오기를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갈망했다.
왜 그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5초마다 들려오는 알람 소리.
5초.
5초.
다시 5초.
질서를 바로 잡아 자신을 안정시키고 다시 세우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사요는 자기가 미쳐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이미 훨씬 전에 그렇게 되어 버린 걸 거라고 믿었다.
어느날, 실험실의 연구원이 사요를 바라보았다.
자해를 멈추면 간격을 늘려주겠다고.
큰 변화는 아니었다.
5초 간격이었던 것을 7초로, 겨우 2초만 늘려주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요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요는 7초의 시간을 언제든 알아낼 수 있었다.
7초에 한 번씩 뭔가를 수행하라는 기상천외한 명령이 떨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사요에게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연구원은 다시 제안했다.
상처를 치료하도록 해주면 그 간격을 9초로 늘여주겠다고 했다.
사요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9초라면 무너져가는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든 다시 쌓아 올려볼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그리고 그 기이한 곳에 갇힌 지 일 년이 되는 날.
연구원은 사요가 차마 감당할 수도 없는 감격스러운 선물을 주었다.
세 시간 동안 알람이 울리지 않게 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사요는 언제 다시 그 알람이 울려올 것인지 잔뜩 긴장을 하느라 선물을 마음껏 누리지도 못했다.
연구원은 그 날에 대해서 자주 추억하도록 했다.
조용한 세 시간.
그것을 다시 원한다면 저항하지 말고 누워 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겁이 나기는 해서 사요를 가지며 그는 사요의 팔과 다리를 구속해 두었다.
사요는 완전한 침묵이 떠도는 시간 동안 오르가즘을 느꼈다.
그것은 남자가 주는 절정이 아니라 침묵이 주는, 절대적인 소리의 부재 상태가 안겨주는 오르가즘이었다.
남자는 구석구석 사요의 몸을 탐했다.
이제 사요의 몸은 더 이상 혐오스럽지 않았다.
살덩이가 움푹 움푹 패였던 흔적이 아직 남아 있기는 했지만 남자가 정성스럽게 보살핀 덕에 지금은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도 볼 수 있는 정도는 되어 있었다.
탄성이 나오는 몸은 아니었지만 얼굴은 달랐다.
동양인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이 섞인 편견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사요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사요는 자신이 그렇게 꿈꿔왔던 고요함을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