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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여기까지 들고 오는 거냐고 쏘아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소명이 재킷을 벗어 거실의 소파 위에 함부로 던져두었다.
부엌으로 가면서 소명은 공간을 둘러보았다.
사건을 맡고 있을 때가 아니더라도 그는 소명과 비정기적인 만남을 이어오고 있었다.
소명이 다루는 정보를 꾸준히 업데이트 해 두기만 해도 나중에 일을 맡게 되었을 때 방향 잡기가 수월해 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다.
집은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넓게 보였고 고풍스런 실내장식과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가구에서 집주인이 장소를 꾸미는데 특별히 신경을 썼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집이 좋은데요?”
“자주 오진 못해요.”
“그렇겠죠. 자주 오기에는 너무 멀잖아요.”
“일을 그만두면 여기에서 살 거예요. 돌아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심이 되잖아요.”
“무섭기도 하죠. 정작 돌아갈 곳도 없다고 생각되면 무서운 것도 별로 없게 돼요. 사람들은 돌아갈 곳이 있을 때,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하죠.”
“그런가요?”
유준열은 흥미롭다는 듯이 소명을 바라보았다.
“맞다니까요?”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네요. 무작정 동의하기에는 상당히 이상해요.”
유준열이 웃었다.
시원스럽고, 그에게 잘 어울리는 웃음이었다.
그 웃음이 자기에게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고 연습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샤토 페트루스라니.”
소파 앞의 대리석 탁자에는 와인 병과 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밤새도록 급하지도 않은 사진만 들추고 있을 건 아니죠?”
소명이 말했다.
그가 웃었다.
저 미소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소명은 생각했다.
유준열이 보기에 소명은 언제나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쉽게 감정에 휩쓸리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안목이 넓었고 용기와 결단력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은, 소명이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해서 그 모든 틀을 기꺼이 깨고 나와 감정적으로 굴며 실수도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였다.
빈틈없는 그녀가 흐트러지는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자극이 되었다.
지강은을 위해서 나선 것은 위험한 도박이었다.
거기에는 많은 모순과 너무 심한 비약과 쉽사리 납득되지 않는 우연이 끼어 있었다.
다른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남자가 자백한 사건에 대해서, 그것이 그의 죄가 아니라는 것을 호소하기 위해서 나타난 사람.
그런 소명이 어떻게 보일지는 뻔했다.
만약 유준열이 그 위험한 간극들을 메우고 다니지 않았다면 소명이 곤란에 처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먼저 마셔요. 나는 조금만 더 보다가 합류할게요.”
유준열이 말했다.
정말 대책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인잔에 와인을 따라서 소명이 벌컥벌컥 마셨다.
그 대단한 샤토 페트루스가 그야말로 덧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유준열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명이 화가 났다는 것을 유준열도 깨달았다.
소명에게는 곤두선 들고양이 같은 매력이 있었다.
소명은 자신의 잔을 빠르게 비우더니 한 잔을 다시 채웠다.
그리고 유준열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의 잔도 채워주었다.
와인은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다.
유준열은 취하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자신만만해하며 소명과 속도를 맞추었다.
소명의 입술 한 쪽이 비틀리며 올라갔다.
유준열이 직접 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는 은근히 소명에 대해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가 소명의 뒤를 봐줬다는 생각도 늘 가지고 있었고 소명이 남들에게 떳떳하지 못한 사람인데도 자기가 상대해 주고 있다는 생각마저도 하는 것 같았다.
유준열의 다른 많은 부분들은 마음에 들었지만 그 몇 가지 부분이 마음에 걸렸고 그날따라 그 부분이 아주 크게 거슬렸다.
“이 형사님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뭡니까?”
“한 번 붙어보면 안 되겠어요?”
“붙어 보다니요?”
“싸워보자고요.”
“소명씨랑 제가 왜 싸우겠습니까?”
“그야 너란 새끼는 더럽게 재수없고 확 턱주가리를 날려 버리고 싶으니까 그렇지, 이 개새끼야.”
싸움은 공정하지 못하게 시작됐다.
유준열은 가뿐히 그녀가 뻗은 팔을 피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몸을 뒤로 물리다가 흔들리며 넘어졌다.
소명은, 하려고만 들었다면 제대로 그를 뭉게줄 수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쓰러진 그의 몸 위로 여기저기에 발길질을 해댔다.
다리에서 완전히 힘을 빼고 툭툭 스치기만 하는 정도였지만 각도나 동작은 완벽해서 술에 취한 유준열도 소명이 자신에게 어떤 마음으로 공격을 해 온 건지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내가 다음에 싸우자고 하면, 여자하고는 안 싸운다는 말 따위는 하지 마세요.”
“그러죠.”
소명은 심술이 조금 풀렸는지 그를 일으켜 주려고 손을 내밀었다.
유준열은 제 몸을 일으키려는 시늉을 하다가 그대로 소명의 팔을 잡아 당겼다.
소명은 곧 그에게서 빠져 나오려고 했지만 억센 손이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꽉 누르는 바람에 쉽게 움직이질 못했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렇다고 곧장 소명의 옷을 벗기려고 파고드는 것도 아니었다.
손만 내리면 얇은 팬티 한 장만 걸친 그녀의 엉덩이를 만질 수도 있을 텐데 그는 그것조차도 하지 않았다.
“강도살해를 당한 여자가 있었어요. 제가 맡은 첫 사건이었습니다. 그 여자의 남편이 했던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서 지워지지를 않습니다.”
“…….”
“그 사람은 쓰러진 아내를 발견하기 전에 씻지 않은 그릇이 잔뜩 쌓인 씽크대를 먼저 발견을 하고 아내에게 화가 났다고 했지요. 이 여자는 도무지 제대로 하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고 지저분한 집을 보니 화가 더욱 솟구쳤다고 했어요. 아직도 침대에서 잠이나 자고 있나보다고,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침실로 들어가서 아내를 발견한 거죠. 그는 정작 범행 현장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묘사를 잘 해내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을 알지도 못하고 아내에게 불평을 해댔던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너무 심해서 그는 오랫동안 그 일로 시달렸어요. 범인은 이틀만에 잡혔어요. 열린 문을 통해 설거지 하는 여자를 보고 음심이 동해서 충동적으로 들어왔지만 강간은 성공하지 못하고 강도로 돌변해서 물건을 훔치다가 결국 살인까지 저지른 거였어요.”
“…….”
“피해자의 남편이 어느 날 내게 편지를 써서 보냈어요. 범인을 잡아 주어 고맙다고 하면서. 치우지 않은 식탁, 그릇이 쌓인 씽크대를 보면 여전히 두려워진다고 하더군요. 아내가 죽기 전날 아침에 나갈 때와 똑같은 아침이 반복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했어요. 이제 더 이상은 낯익은 일상이라는 것이 없게 됐다고 했어요.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자신이 완전히 내동댕이쳐졌다고 말하면서 그는 모호하게 편지를 마쳤지요.”
“그 후에도 그 사람을 만났나요?”
“만난 건 아니었지만 그의 소식을 들었지요. 뉴스에 단신 보도가 나왔는데 그는 강도를 하다가 붙잡혔어요. 붙잡히고 그는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지요. 자기가 잃은 것을 그런 방법으로 되찾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평화롭게 정돈된 것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 사람에게 골탕을 먹이고자 혼돈을 야기하는 사람. 금지된 것을 향해 욕망을 품는 사람.”
“내가 잘 아는 어떤 사람에 대한 얘기 같아요.”
소명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쩔 거죠?”
“그 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생각하시는 게 좋았을 텐데요.”
소명이 내려가려고 무릎을 바닥으로 내리려 하자 유준열이 소명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커다란 손이 허벅지를 움켜쥐자 소명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소명은 아래에 누워서 매혹적인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준열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소명은 그의 얼굴의 어떤 부분이 사람을 사로잡는 것인지 천천히 분석을 해 볼 마음으로 오랫동안 그를 바라보았지만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가 가끔 작위적인 미소를 보일 때가 있기는 했다.
그것은 그가 경험으로 터득한 속임수였다.
그는 자신이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었을 때 자신의 외모가 여자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간혹 부작용이 생기기도 했다.
그를 만족시키고 싶어서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목격자가 거짓 증인들이 속출하는 것도 미소의 부작용 중 하나였다.
그는 범죄현장에서 조력자를 얻어내는데 선수였지만 동시에 잘못된 정보로 사건을 오염시키는데도 선수였다.
소명이 흥미롭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넥타이를 느슨하게 만들고 그 아래서부터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 옆에 손을 짚고 한 손으로 단추를 풀어가면서 그를 향해 맞춘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페니스가 제대로 일어서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됐지만 그 문제는 곧 해결이 되었다.
그는 소명을 어떻게 규정지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한없이 차가운 사람 같다가 어느 때는 말할 수 없이 뇌쇄적이고 퇴폐적인 이미지를 풍겼다.
그를 미치게 만드는 건 정작 소명 자신은 자신이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은 생각이 기억의 어디쯤을 더듬고 계시는 거죠?”
소명이 그의 위에서 느긋하게 물었다.
유준열은 피식 웃어버렸다.
무방비 상태에서 터진 그의 웃음이 소명을 전율하게 했다.
소명의 입가에 걸쳐졌던 여유로운 웃음이 잠시 흔들렸다.
애써 침착해지려고 했지만 손이 떨려서 몇 개 남지 않은 단추를 한 손으로 푸는 것이 어려워졌다.
“남은 건 제가 하죠.”
바지춤에서 셔츠를 잡아 빼내 남은 단추를 익숙하게 푼 유준열이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그가 움직임을 멈추자 소명이 웃었다.
“마저 하시죠?”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잘 안 될지도 모릅니다. 사실은, 처음이에요.”
“아, 무당벌레에요.”
소명이 대리석 바닥 위를 기어 그의 목 가까이까지 기어가는 무당벌레를 발견하고 몸을 납작 엎드려서 손가락으로 그것을 다른 쪽으로 멀리 튕겨냈다.
그는 그녀가 어려운 논제를 가벼운 몸짓으로 멀리 튕겨낸 것을 깨달았다.
시의적절하게 나타난 무당벌레.
거기에 무당벌레는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그녀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섹스 파트너로서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었다.
그보다 더한, 끈끈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 조력자로서 그녀와의 관계를 오래 이어가고 싶다는 욕구가 그에게 강하게 생겨났다.
“살인을 하면 감정적으로 성취감이 생긴데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잘 아는 사람이. 그래서 너무 몰입하지 않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블랙홀에 빨려들어 스스로가 말소돼 버린다고 해요.”
소명은 그가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할지 두고 보기로 했다.
그는 수준보다 훨씬 높은 어려운 수학 문제를 받아든 아이처럼 전전긍긍하리라.
소명은 그를 혼란에 빠뜨린 후 천천히 그를 능욕하고 싶었다.
하지만 유준열은 소명마저 저항하지 못하는 웃음을 짓고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 쥔 손을 당겨 그녀의 몸을 자신의 발기된 페니스에 밀착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