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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도 괴로울 거야. 자꾸 두리번거리지 마.”
지명이 말했다.
사이크는 그 말을 듣고서야 미래가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별 일이야 있겠어? 그렇지? 아무 일도 없을 거잖아. 응?”
사이크가 말했다.
“들어가. 나도 떠나기 전에 마무리 할 일들이 쌓여 있어서 더 오래 같이 있어 주지는 못하겠다.”
“그래. 우리야 뭐 금방 만날 텐데.”
지명은 주차장으로 나와서 미래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풀이 죽은 모습으로 미래가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미래에게 다가가서 위로를 해주고 싶었지만 사이크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해 주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지명은 결국 미래를 두고 먼저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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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 형은 갑자기 일본을 떠나게 됐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두었었기에 택시에 오르기까지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별의 말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곧 다시 볼 사람들인데.
“그럼. 내일이나 모레 보자고.”
선우 형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 형이 택시를 타고 떠나자마자 히나타는 항과 함께 신사를 나섰다.
신사를 벗어나서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데 적절한 곳이 생각났다고 했다.
그리고 히나타는 항을 데리고 유우신이 숨어있는 곳으로 갔다.
그렇다고 유우신이 머물고 있는 집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고 그 근처의 암벽이 유난히 많은 산으로 올라갔다.
“너무 높이 올라가지는 말자고.”
항은 겨우 몇 걸음을 옮기고 나서 그렇게 말했다.
“조금만 더 올라가요.”
“왜 더 올라가야 되는 건데?”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이렇게 볼품 없는 산에 사람들이 왜 오겠어?”
“그래도 일단은 조금만 더 올라가요.”
뾰로퉁해져서 더 이상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기만 하던 항이 땀이라도 닦고 쉬려고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사방에 꽃이 피어 있었다.
그가 늘 넋 놓고 바라보던 그 꽃이었다.
서림이 여기 저기에서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만약 희영이 주위에 있었다면 항은 희영이 만든 환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희영은 그곳에 없었다.
“히나타. 무슨 짓을 한 거야?”
항은 감격에 겨워 말했다.
주책맞게 눈물이 고이더니 툼벙툼벙,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히나타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히나타의 의지만으로 거대한 바위 하나가 흔들리더니 그대로 밑으로 주저 앉아 버렸다.
“어떻게 한 거야?”
“나무 뿌리를 치웠어요.”
“그 일을 지금 나무 뿌리만 가지고 한 거라고?”
“나무 뿌리만이라고 하기에 나무 뿌리가 하는 일이 굉장히 많아요.”
장난스럽게 말하고 히나타가 항의 발 밑을 바라보자 항이 딛고 서 있던 땅이 흔들렸다.
항은 놀라면서 발을 옆으로 옮겼지만 그래봤자 마찬가지였다.
“히나타. 장난하지마.”
“땅이 흔들려서 불안하세요? 그럼 이건 어때요?”
항은 갑자기 자기 몸이 위로 솟구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며 개구리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의 손바닥에 닿은 것은 보드라운 땅이 아니라 단단한 바위였다.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말했잖아요. 나무 뿌리를 움직인 거라고.”
“나무 뿌리가 돌은 왜?”
“계속 눌려만 있다보니 답답했나보죠? 뿌리가 밀어내는 걸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히나타가 웃었다.
“바위를 던질 수도 있어?”
“전혀 불가능하지 않죠. 시간을 집약하기만 하면 되는 걸요.”
그리고 히나타는 자기 말이 맞다는 것을 곧 증명해 보였다.
신사의 반절만한 바위 하나가 십 미터 정도를 날아갔다.
항은 할 말을 잃었다.
“히나타. 그동안 혹시 내가 서운하게 했던 게 있었다면 이해해 줘. 본의는 아니었어. 알지?”
항의 말에 히나타가 큰 소리로 깔깔 거렸다.
“본의라고 해도 괜찮아요.”
히나타가 웃었다.
“아니야. 아니야. 정말 본의가 아니었다니까?”
항이 극구 부인을 하자 히나타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것도 해 봐.”
히나타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면서 항에게 말했다.
“기선이란 분은 정말 신기해요. 본인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지만 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에너지를 밀어 넣어 줘요. 그렇게 에너지를 쏟아부어주면 자기가 쇠잔해질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아요. 그 분은 다른 사람들한테 쏟아주는 것만큼 자신을 채워요.”
“그래? 나도 무뎌서 그런지 예민하게 느끼지는 못했는데.”
항이 멋쩍어하면서 웃었다.
히나타도 웃었다.
“제가 가장 희한하다고 생각하는 건 사람들이 아주 막연하게만 그 사실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저는 그거야말로 그 분의 진짜 능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하면서 주는 거요.”
“그렇게 생각해? 기선이도 자기가 주고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건지도 몰라.”
항이 말했다.
“하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 분을 보면 뭔가를 꾸미고 세세하게 계획해서 치밀하게 밀고 나갈 분은 아닌 것처럼 보이거든요.”
히나타가 웃으며 말했다.
“우린 기선이에 대해서 모르지.”
항의 말에 히나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보다도 더 많은 부분을, 항이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둬야겠어요. 이 아래에 유우신이 살잖아요.”
그렇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왜 안해?”
“했는데요?”
“뭘 했는데?”
“나무 뿌리가 지금 땅 밑에서 지독하게들 얽혀 들어가고 있어요.”
“아!”
“그럼 내려갈까요?”
“좋지.”
“일본을 떠나는 건 문제가 없다고 하면 좋아하겠죠?”
히나타는 들뜬 얼굴로 물었다.
항이 웃음을 지은 채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싫지 않아? 그런 부탁을 해서. 위험한 일이 될 텐데.”
히나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 번도 본 적 없던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에게 배척되기만 하다가 내가 누군지를 깨닫고 이제는 꼭 필요한 존재가 됐어요. 이게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모를 거예요. 얼마나 오랫동안 내가 죽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서 살았는지 모를 거예요. 저야말로 여러 분들한테 빚을 진 기분이에요. 저를 동료로 받아주셨잖아요.”
“아, 우리가 그랬나?”
항이 짓궂은 표정으로 웃자 히나타가 깔깔 거렸다.
“그래봐야 소용없어요. 멋대로 오해해 버리는 게 제 특기거든요.”
“성격이 좋네.”
내려가는 길은 훨씬 편했다.
항은 몇 번이나 뒤돌아서서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자신에게 손 흔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
히나타가 갑자기 자리에 우뚝 섰다.
“왜?”
항이 물었지만 히나타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허벅지 안쪽에서 방금 뭔가가 느껴졌다.
‘쇼스케의 젠’이라는 글귀, 쇼스케가 칼날로 새겨넣은 그곳에서 살이 돋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기에 그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거의 잊고 있었다.
그런데 왜 다시?
항이 없거나 자기 방에 혼자 있는 있는 중이었다면 허벅지를 곧바로 살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통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육체의 고통을 안겨주는 감촉이라기 보다는 그저 아련하고 애틋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왜 그래, 히나타?”
항이 다시 물었다.
히나타는 말하지 못하고 그냥 웃었다.
“아니. 뭔가 들린 것 같아서요. 제가 잘못 들은 모양이에요.”
대충 그런 식으로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럼 가보자고. 그런데 여기까지 왔는데 유우신은 안 보고 갈 거야?”
“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답을 해 버리는 바람에 항이 오히려 당황할 지경이었다.
히나타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항을 잡아 끌었다.
"왜?"
항의 질문에 히나타가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우리가 너무 위험한 존재가 돼 버렸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항이 말하자 히나타가 쓰게 웃었다.
"그런 건지도 몰라요. 아마 그 말이 맞을 거예요. 이럴 때 혼자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에요."
"히나타는 강해. 힘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강한 마음을 가졌다는 얘기야. 실패의 악취를 풍기는 루저가 아니라고. 내가 하려는 말. 무슨 뜻인지 알지?"
히나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책임져 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 그럴 의무도 없고 그럴 수도 없어. 자기한테 온 불운을 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거기에 일일이 죄책감을 갖지 말라고."
"노력해 볼게요."
"유우신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그건 히나타 책임이 아니야. 유우신의 운명이거나 유우신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사람의 책임인 거지."
"아이가 있다고 들었어요. 아이를 떼어 놨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맞아. 히나타한테 한 말을 나한테 적용시키자면 나도 자신이 없어지긴 하는군. 하지만 아이란 존재는 정말로 특별한 케이스니까."
"아이가 아니라도.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아요?"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 지키지 못했거든."
"꽃이 예쁘죠?"
히나타가 말했다.
항은 히나타를 보고 웃었다.
생뚱맞은 소리를 한다고 타박을 해 주고 싶었지만 그냥 웃음이 났다.
"이것만 기억해줘. 히나타. 히나타는 불운의 아이콘이 아니야. 우리 모두 그래. 남의 불운을 책임지도록 십자가를 진 사람들이 아니라고."
히나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
흑사의 사당 주변에 수상쩍은 그림자 몇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을 알 방법은 없었다.
하나같이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얼핏 봐선 원숭이 같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원숭이의 형상을 정교하게 따라서 그려놓은 가면도 아니었다.
지나치게 밋밋한 가면 때문에 공포가 극대화되는 감이 있었다.
남자들은 주변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폼새였다.